유학원 생활에 실패한 나의 마음은 이러했다. <역시 나는 사무직보단 현장에서 발로 뛰는 직업이 잘 어울린다.>, <사실 조금 지루하긴 했었다.> 등. 솔직히 말하자면 더운 날 에어컨 바람앞에서 입안이 끈적이게 단 믹스커피를 마시는나날들은마약과도 같았다. 그러나 자신감이 한층 꺾인 나로서는 여우가 신 포도란 핑계를 대는 모습으로 자력구제할 수밖에.
몇 번의 검색을 끝으로 이른 아침에 시작해 세시가 되면 끝나는, 주말에는 문을 닫는, 대타조차 필요 없는 그런 카페의 바리스타 자리를 찾아냈고 또다시 단 한 번의 면접만으로 가게에 덜렁 붙었다. 정말이지 일복 하나만큼은 기깔나는 나 자신이었다.
카페는 시내의 가장 큰 백화점인 웨스트필드(Westfield)의 맨 꼭대기층에 위치했다. 그곳은 금융회사인 JP Morgan의 중간 지층 입구가 이어진 스카이라운지 카페였다. 고로 손님들은 대부분 백화점 간부 혹은 금융회사 직원들이라는 말이다. 그래서인지 사장님의 복장 단속과 화장단속 또한 깐깐했는데 화장은 무조건 풀 메이컵, 복장은 흰 셔츠에 검정 치마, 검정 단화였다. 여태껏 일해왔던 캐쥬얼한 차림의 카페와는 다른 모습에 나는 아주 진득한 매력을 느꼈더랬지. 하지만 이 끌림 또한 내 인생의 자그마한 실수 중 하나가 되겠다.
Jeane & Frank
사장님인 진과, 매니저인 프랭키는 둘 다 한국사람으로 둘의 관계는 남매다. 사장님은 꽤 지저분한 성격인데 자신이 결벽증인 줄 알고 살아가는 다소 희한한 인물이며, 프랭키는 본인이 지극히 정상이라 생각하며 지내지만,사실 그는 결벽증이다.
이 기이한 남매는 한 달에 한 번씩 크게 싸운다. 그들이 싸우면 그 불똥은 주변 아르바이트생들에게 튀곤 했다. 사장님은 본인에게 말대꾸 (실상은 질문 정도)를 했다는 이유로 대책 없이 직원을 짜르기도 했고 (다음날 그 빈자리로 인한 두배의 고생은 나머지 알바들이 한다) 프랭키는 할 일이 차고 넘치는 우리에게 다 내려놓고 청소부터 하라고 시켰다. (지가 하지) 마흔이 훌쩍 넘어가는 둘이서 달에 한 번꼴로 저러고 있으니, 그것은둘 다 정상이 아니라는의미다.
리사 언니
리사 언니는 가게에서 꽤오래 일한 메인 바리스타로 동양미가 넘치는 페이스에 서양미가 넘치는 바디를 가진 매력적인 인물이다. 언니는 영어도 잘했기에 손님들과 쨉쨉이 타임도즐겼는데 홍콩계 호주인이었던 남자가 언니에게 꽂혔다. 심지어 그는 그 건물 내에서 일하던 사람도 아니었으나 어쩌다 알게 된 리사 언니가 보고 싶어 아침 점심마다 백화점 7층까지 올라와 커피 한잔 마시고 돌아가는 등의 지극 정성을 보여주었다. 리사 언니 또한 그런 그를 좋게 보았다. 그녀는 그와 몇 번의 만남을 가진 후에, 연인 관계로 진전시켰다. 진과 프랭키는 자연스레 그 사실을 알게 되었고 곧바로 프랭키가리사 언니를 해고시켜버렸다!
실직자가 된 리사 언니에게 들은 이야기는 이러했다. 사실은 회식 이후 프랭키가 몇 차례 그녀에게 대쉬를 했다 한다. (프랭키는 그녀와 15살 나이 차이가 났다.) 언니는 계속해서 거절했음에도 불구하고그는 더욱 더 질척거렸다. (영주권 이야기까지 해대면서 말이다.)
괴로웠던 그녀는 진에게 이 사실을 털어놓았고, 진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프랭키가 카페 슈퍼바이저였던 제니와 아주 오래된 연인관계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제야 리사 언니는 깨달았더랬다. 왜 제니가 리사 언니를 볼 때마다 쌀쌀맞게 대했는지, 왜 틈만 나면 본인을 갈궜는지를! 퍼즐이 착착 맞춰졌다 했다.
아무튼간에 나는 이 기묘한 남매 사이에서 1년을 버텼다. 커피 타는 게 재미있다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십팔 개월을 견뎠다. 진은 내가 힘든 일을 겪을 때 격려차원에서 보너스를 더 넣어주기도 했고, 프랭키는 배가 고프다 하면 백화점으로 내려가 맛있는 것을 사주기도 했다.
이렇게나 사람은 복합적인 존재다. 세상 둘도 없는 도라이 같았지만 내가 아는 단편적인 부분만 보고서 그사람의 전부를 판단할 수는 없다. 가게를 그만둘 때 역시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됐고 그냥 오늘 당장 나가라'며 진은 멋대로 행동을 했다. 그렇다고 해도 그녀의 전부를미워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런 모습들이 그저 아주 작디작은 파편일 거라믿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