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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urney kim Mar 19. 2020

열다섯 번째 산맥

16. 재충전

작은 에펠탑이 있는 카페 겸 레스토랑, 할아버지와 그의 손자가 심각한 표정으로 체스를 두고있다.



Brisbane



브리즈번은 날 지치게도 했지만, 다시 일으키기도 한 사랑과 고통의 도시다. 꼰대들과의 유학원 업무, 도라이들과의 카페 생활로 인해 지친 나는 제나에게 브리즈번 여행을 제안했다.


스물셋이었던 내가 브리즈번을 떠나온지는 벌써 오 년이란 시간이 흘러 느새 이십 대 후반이 되었고 호주라는 나라와 영어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 다시금 그 곳이 궁금했다. 예전에 갔던 카페들은 여전한지, 종종 한국 책이 읽고 싶을 때 방문했던 도서관은 안녕한지 말이다.


우리는 금요일 저녁 출발해 일요일 저녁에 돌아오는 짧은 여행 계획을 세웠다. 비행시간은 고작 한 시간 반, 비행기 값은 인 당 왕복 20만 원. 가깝고 짧고 저렴했던 이 여행은 매직 포션이 되어 어마어마한 힘을 불어넣 되는데...


도착한 시간은 대략 오후 10시 가령. 가게들은 이미 문을 닫았기에 근처 맥도널드에서 햄버거 하나를 사 먹었고 호텔로 가자마자 즉시 곯아떨어졌다.


다음 날 아침, 하늘은 무척이나 맑았다. 오늘의 목적지는 에펠탑이 세워진 식당. 우리는 조금 일찍 일어나 얼마 멀지 않은 강 근처로 갔고, '여긴 내가 와봤던 곳이고, 저긴 건너편에서 구경만 했던 곳이다.'라는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나누며 크게 한 바퀴를 돌았다. 시티 근처로 가까워져오니 흐릿했던 기억들이 차 선명해진다.


브리즈번에서 가장 많이 갔던 곳이라고 하면 퀸 스트릿에 있는 (아마도?) 백화점이다. 이유는 지하에 버스정류장이 있기 때문일 것. 안 쪽으로 들어가면 푸드코트가 있는데 거진 맨 끝에 서브웨이가 있고 그 곳을 지나치면 지하 벙커 같은 곳에 정류장이 나온다. 그래서인지, 브리즈번을 떠올리면 샌드위치 냄새가  앞에 아른거린다. 브리즈번에 대한 생각들은 누군가 날 위해 샌드위치를 만어 주는 것과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우리는 시티 뒷 쪽의 무료 페리를 탈 수 있는 곳으로 갔다. 이 페리도 나에게는 사실, 조금 아팠던 기억들이다.


타인과 함께 방을 쓴다는 것이 싫어 시티와는 조금 멀리 떨어진 가정집 쉐어생으로 들어가고서부터는 누구와도 말할 일이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 멍하니 누워있다가 근처 한국인이 하는 일식집에서 밥을 사 온다. 한 끼의 식사로 세 번을 나눠 먹으며 자기 전까지 누워만 있는 삶. 나의 하루는 그랬다. 그렇게 지내다 정말이지 참기 힘들 만큼 쓸쓸한 날에는 이 페리를 타고 브리즈번의 낮과 밤을 지켜보았다.


도서관에서 바라보는 경관과, 내가 항상 가보고 싶어했던 2층 음식점의 모습.



뜨끈하게 우린 치유 정식



매일 밤 축축이 젖은 베개를 베고 눕던 이 도시를, 왜 나는 여즉 사랑하고 있는 걸까. 사무치게 외로워 떠난 이 곳들이 왜 다시 또 반짝이는 건지.


슬픈 기억들을 잔뜩 헤집어놓았으나 놀랍게도 아무렇지 않았다. 강바람이 좋았고, 흩날리며 엉키는 머리카락이 좋았고, 희미한 듯 선명하게 보이는 다리도 좋았다. 나는 이제 괜찮나 보다.


우리는 작은 에펠탑이 세워진 식당에서 피자 한 조각을 먹었고, 브리즈번에 와 처음 갔었던 카페에서 아주 맛없는 (그 당시도 맛이 없었다. 깜빡 잊고 있었지 뭔가.) 커피를 마셨고, 또 그저 그랬던 훠궈 집에 가서 끼니를 해결했다. 마지막으로 와인 한 병을 사서 반씩 나눠 들고 잠이 들었다. 정말이지 이보다 더 완벽할 수 없는 사이지 않은가.


다음 날인 일요일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 홀로 브리즈번 시내 한 바퀴를 걸었다. 떠오르는 생각들을 굳이 정리하지 않았다. 그저 모든 걸 뒤로 제쳐두고서 마사지샵에서 시간을 보내고 제나를 깨워 텔을 나왔다


언제고 가보고 싶어 했던 시내 큰 도로의 2층 음식점. 그곳에서 아침을 먹고 도서관으로 가 조용히 책을 읽었다. 그러기를 세네 시간, 커피 한잔을 들고서 공항으로 향했다.


외로운 날들 위로 잔잔한 기억들을 새로이 쌓아 놓았다. 이 바래 흐릿하던 곳들이 이제는 파스텔톤으로 반짝인다. 주에서 제일 좋아하는 도시가 어디냐는 질문에, 나의 대답은 언제나 브리즈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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