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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빛달 May 03. 2023

알바와 집안일, 글쓰기 사이를 오가다.

<쓰지 못한 몸으로 잠이 들었다>를 읽고.

추운 겨울, 지인이 제안을 하나 했다.

육아용품 브랜드에서 블로그 작업을 해줄 사람을 구하는데 마침 내가 생각나서 연결해주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덧붙인 말.


"민아라면 엄마로 사는 일 말고 다른 무언가를 해보고 싶어할 것 같아서."


고마운 제안이었다. 게다가 내가 쓰는 글이 어떤 브랜드에 "쓰임"이 있을 것 같아서 기뻤다.

마침 휴원 중이던 둘째를 데리고 브랜드 관련자 분들과 미팅을 했다.

쌍둥이 엄마로 해당 브랜드를 이끌어왔기에 엄마의 삶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사장님과 6살 아이를 키우고 있는 실장님은 최대한 내 상황에 맞춰서 기다려주셨고, 경력단절엄마임에도 원고료도 충분히 책정해주셨다.


그렇게 신학기가 되고, 작업이 시작되었다.

브랜드에서 기대하는 원고의 퀄리티를 맞추기 위해서는 생각보다 품이 많이 들었다. 해외 논문, 연구자료 등을 뒤지고 그것을 이해한 후 대중에게 쉬운 언어로 바꾸는 작업. 영어로 된 전문 용어 앞에 작아져서 어렵게 열람한 자료들을 닫고 또 닫았다. 그렇게 시간과 에너지를 모으고 모아 원고를 썼다. 그것이 그 브랜드에 작은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아이들을 보내고 주어지는 오전의 자투리 시간이 시작되면 알바 모드로 뇌의 스위치를 바꾸고 작업을 하고, 아이들이 돌아오기 시작하면 엄마 모드를 켜서 미뤘던 집안일과 아이들 케어를 했다. 그렇게 어울리지 않는 옷감들로 퀼트 작업을 하듯 하루를 얼기 설기 기워 가는 동안, 차마 글쓰는 모드는 켤 수 없었다. 내 뇌와 신체는 그렇게 많은 용량을 감당하지 못함을 다시금 몸으로 알수 있었다.




엄마로 살며, 일과 육아, 글쓰기를 동시에 하는 일.

이 모든 것들을 다 놓치고 있진 않은가 하며 그 사이를 오갔다.


그리고 나와는 글쓰는 급이 다르지만 그래도 비슷한 고민을 하는 엄마들을 <쓰지 못한 몸으로 잠이 들었다>에서 만났다. 6인의 쓰는 사람이자 엄마들의 이야기.

그들에게도 육아는, 그리고 엄마됨은 쉽지 않은가보다. "엄마가 되는 일은 가끔 인생이라는 만원 열차에 서서 영영 앉을 자리 없이 종착역까지 가야 하는 길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열차에서 내리지 않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백은선 작가) 라는 의문을 가지기도 하고 "엄마가 되는 일은 깊은 강에 아주 큰 돌다리를 스스로 놓으며 건너는 일과 같다. 어렵지만 매일 새로운 곳에 발을 딛는다. 혼자 건너지 않고 함께 건넌다.(안미옥 작가)" 라고도 한다. "나는 엄마로서도 시인으로서도 자주 실패한 하루를 산다.(조혜은 작가)" 라는 고백에는 하아..하는 한숨과 동시에 위안을 받기도 했다. 등단한 작가들도 이런 고민을 하는데 나라는 사람이 글쓰는 모드 스위치를 못킨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말이다.


알바를 하는 짧은 기간동안 내가 느낀 고민도 들어있어 반가웠다.

"그러니까 내가 엄마 작가로서 육아와 집필을 병행하는 것이 힘에 부쳐 소설을 못 쓰고 있는 것이 아니라 김미월이라는 인간 자체가 원래 게을러서, 체력이 형편없어서, 시간을 효율적으로 운용하지 못해서, 근성이 없어서 이 모양인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 나는 어쩌면 나 자신의 나태와 무능을 엄마라는 허울 좋은 명분으로 포장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

나는 정말 엄마로서, 알바생?!으로 최선을 다했던가? 바빴다는 건, 시간이 부족했다는 건. 핑계 아닐까

하는 자책.


내가 생각하는 육아는 집을 짓는 것에 가깝다. 집터를 평평하게 골라주고, 기둥을 세우고 뼈대를 만드는 일.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집을 짓는 손이 내가 아닌, 아이가 되어야 하는 일. 그 집은 아이의 집이니까.

글쓰기도 글을 짓는 과정이다. 다만 글은 기초를 세우고 살점을 붙이는 모든 순간들이 나의 책임이라는 것이 다를 뿐.


그렇게, 나는 다시 육아와 글쓰기 사이를 오가기를 선택했다. 어쩌면, 알바를 통해 나는 '정규직'에 속하지 못하는, '돈 안되는' 일로 시간을 보내는 나의 해소하지 못한 욕구를 달래고 싶었는지 모른다.


"누군가를 돌보는 일은 늘 홀대받는 일이었으며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내 삶을 정당하게 살아가는 것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생활비를 버는 일에 비해 중요하지 않은 일로 취급당했고 일하지 않는 사람으로 여겨졌다. 돌봄은 노동이었지만 일이 아니었다. 이건 시를 쓰는 일과도 비슷했다.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시인은 직업이 아니었고, 내 몫의 육아와 가사노동을 모두 마치고 가족들이 잘 시간에 시를 쓰는 것도 내게는 사치였다. 굳이 정의하자면 나는 가정에서 낮에는 돌봄 노동과 가사 노동을 하는 엄마이자 아내였고, 밤에는 쓰는 노동을 하는 나이자 시인이었다. (조혜은 시인)"

 

알바를 그만 두는 과정에서 나는 또 나를 미워했고, 나는 돈되는 일은 하지 못하는 사람이구나 하는 한탄을 하곤 했다. 하지만 이 일로 나는 나를 더욱 잘 알게 되었고 내 삶에서 읽고 쓰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다시 깨닫게 되었다. 엄마로 살며 아이들을 돌보는 가운데, 글을 쓰는 일이 나에게는 숨구멍 같은 순간이며 나만의 집을 짓는 일이라는 것을 말이다. 나는 다시 아이라는 집을 짓고, 글이라는 집을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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