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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빛달 Oct 25. 2022

외로움의 기슭을 건너. 책에 닿다

오랜만에 쓰고 싶은 마음이 차고 넘쳐 흘러

브런치를 열어본다.


아이를 키우며 가장 힘들었던 것이 무엇이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외로움"이라 대답할 것이다.


아이를 키우면서 참 외로웠다.

그래서 아이가 눈을 뜨면 유모차를 끌고 나왔다.

놀이터를 가고, 슈퍼를 가고, 산책을 하면서

잠시나마 사람들 속에 있노라면 마음이 안정되곤 했다.

친정엄마나, 시어머니의 방문도 반가웠다.

누군가와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 숨통을 트이게 했던 것 같다.


남편은 좋은 아빠이고, 좋은 배우자이지만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내가 느끼는 감정을 그와 다 나눌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연애할 때는 나의 세밀한 감정의 결을 함께 나눌 수 있었지만

육아를 하면서 느껴지는 나의 감정덩어리를, 그가 다 이해할 순 없겠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우리가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아무리 사랑해도 상대의 모든 것을 알수는 없다는 것을 말이다.

육아는 생활의 영역이라

그 시간 그 공간을 통과해 보지 않으면 알수 없는 것들이 있다.

아이가 잠을 자지 않아서 진땀 흘리고, 아이가 떼를 써서 열이 뻗쳤다가도 남편에게 이런 이런 일이 있었다 이야기할 때쯤이 되면 그것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일들이 많았다.


원래 알던 친구들 중에서도 내가 빨리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서 더 의지할 육아동지가 없었다.

친구들은 원래 내가 속한 세상에서 여전히 일하고, 연애하고, 맛집을 가고, 여행을 떠났다.

하지만 나는 어느 순간 아이와 함께 먹고 자고 노는 일로 하루가 가득 찼다.

다른 속도로 살아가는 친구들에게 무리해서 다가갈수 없었고,

동네에서 만나는 엄마들과는 예전 친구들만큼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 홀로 둥둥 떠있는 느낌을 받곤 했다.


얼마전 읽은, 서유미 작가의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 작품 해설 중 내 안에 들어갔다 나온듯한 문장이 있어 옮겨본다.

관계에 대한 자신감이 결여된 자리에 자격지심이 가득 들어선 경주가 자신의 삶에 확실히 새겨진 늦어버린 시차를 인식하지 않는 방법은 자신과 다른 속도로 살아가는 사람들 곁에 자신을 두지 않는 것이다. 다른 속도로 살아가는 사람들로부터 멀리멀리 달아나는 것이다. 단절되고 도망가는건 막다른 길에 선 경주가 선택한 유일한 방법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혼자 서 있는 것은 외롭다. 고독하고 쓸쓸하다. 그러나 늦었다는 생각에 서두를 필요없고 기을 잘못 들었다는 생각으로 불안해할 필요가 없으므로 혼자 서 있는 것만이 그녀를 주저앉지 않게 한다. 경주는 혼자 서있는 것을 피할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아이와의 시간을 후회한 적은 없다.

아이와 내가 단둘이 살결을 마주하고, 숨결을 느끼고, 눈을 마주친 그 순간들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충만한 행복이었으니까.

하지만, 나도 세상에 연결되고 싶었다.

그래서 SNS에 접속하고, 무리해서라도 카페를 찾아가서 새로운 공간이 주는 전환감을 느꼈다.

그리고 원래는 듣지 않던 라디오를 듣기 시작했다.


남편은 라디오 광고라든지, 멘트가 아이에게 너무 자극적이고 교육적이지 않다고 싫어했지만

나는 라디오 듣기를 고집했다. 애청자의 실시간 반응을 옮겨주고, 전화통화를 하고, 게스트와 이야기 나누는 자체가 살아있는 느낌이 들어서 좋았다. 매일 아이가 좋아하는 노래를 듣고, 만화를 보다가 라디오를 켜면 세상에 접속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외로움은 어느순간 활자에 닿았다.

처음은 그림책으로 시작되었다. 아이와 함께 그림책을 읽으며 아름다운 삽화와 이야기에 매료되었고 마음이 채워짐을 느꼈다. 그러면서 점차 어른의 이야기가 담긴 책으로 마음이 옮아왔다.

책을 펼치기만 하면 그곳에 목소리가 있었다.

때론 다정하고, 때론 아름답고, 때론 단단한 목소리가 있어

나의 단조로운 일상이 다양한 색깔을 가지게 되었다.




델리아 오언스의 "가재가 노래하는 곳"의 주인공 카야는

가족에게 버림받고 홀로 습지에서 살아가는 소녀다.

새벽녘에 혼자 홍합을 캐고 그것을 판 돈으로 겨우 끼니를 떼우며 혼자 커가는 소녀.

그녀에게 테이트라는 소년이 다가와 글을 가르쳐주고, 책읽기를 알려준다.


하지만 테이트는 절대 서두르지 않고 th라는 특별한 소리를 설명해주었고, 카야는 간신히 그 단어를 소리내어 읽고는 신이 나서 두 팔을 하늘로 치켜들고 깔깔 웃었다. 테이트는 활짝 웃으면서 카야를 바라보았다.
카야는 천천히 문장의 단어들을 풀었다. "야생의 존재 없이 살수 있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다".
"아" 카야가 말했다.
"카야, 넌 이제 글을 읽을 수 있어. 까막눈이던 시절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거야"
"그게 다가 아니야." 카야의 말은 속삭임에 가까웠다.
"단어가 이렇게 많은 의미를 품을 수 있는지 몰랐어. 문장이 이렇게 충만한 건지 몰랐어."


카야처럼 혼자 습지에 고립되지 않아도

우리는 누구나 카야처럼 외롭고 고독하다.

그런 외로움의 기슭을 건너지 않았더라면

책을 만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항상 사람에 둘러쌓여.

결핍을 모른채 살았다면 책에 닿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델리아 오언스가 70의 나이에 "가재가 노래하는 곳"이라는 소설로 다른 이들과 맞닿았듯

이렇게나마 책의 힘을 빌어 짧은 글이나마 쓸 수 있어 다행이다.

책을 읽고 글을 쓰며 다시금 세상에 손을 뻗어 본다.

무언가를 달성하고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내기 위함은 아니다.

나만의 방식으로 세상에 연결되기 위해서, 오늘도 책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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