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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백하게 Dec 20. 2020

빚쟁이의 변(辯)

지난주에는 책을 세 권 샀다. 셰익스피어 로미오와 줄리엣, 현대미술 책, 사주 명리 책. 물론 아직 읽지 못했다. 책이라면 의욕에 전후 생각 않고 지르는 편이다. 그래서 그때그때 욕심으로 사둔 책이 벌써 한 보따리다. 순번을 생각하면 이번에 산 책들은 과연 언제나 훑어볼까 걱정부터 된다. 우선 읽어야 할 책들이 이미 한가득인 때문이다. 쌓아 둔 책을 보고 있으면 부채에 시달리는 빚쟁이가 된 기분이다. 마음이 조급해서 쫓기는 것만 같다.     


책 한 권 읽지 못할 만큼 바쁜가 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퇴근하고, 저녁 먹고, 운동하고, 그래도 시간은 남는 편이라 보자면 못할 것도 없다. 하지만 책 좀 읽자던 의욕은 구입까지가 한계고, 그 뒤를 받쳐줄 추진력이 미미해 번번이 아무 책도 못 읽는 중이다. 겨우 책을 들었다 싶어도 조금 만지작거리다 내려놓기 일쑤다. 결국 목차나 훔쳐보고 마는 것이다. 이러고 뜸 들인 시간을 모아 보면 몇 권이라도 읽었을 건데 생각해보면 한심한 일이다. 책이 언제부터 이렇게 버거운 것이 됐나 싶다.     


변명해보자면 결국 풍족하지 못한 시간 때문이다. 쪼개 보면 못 만들 것도 없는 시간 이랬지만 그 쪼개야만 하는 시간이 사실 부담이다. 짧은 하루에서 직장생활을 차감하면 남는 게 고작 한두 시간인데, 그 반발력 때문인지 자투리 시간을 알차게 보내야 한다는 사명감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는 독서가 여흥이 아닌 책무가 된 거고.     


사회생활 시작과 함께 많이 읽은 게 자기 계발서다. 그러다 터무니없단 생각이 있어 각종 취미 및 전공 관련 책을 다시 사 모았다. 하지만 그것도 의미 없단 생각에 결국은 고전이다 싶어 세계문학 전집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넉넉하지 않은 시간을 촘촘하게 보내야 한다는 압박감은 ‘양질의 독서’라는 슬로건에 목매게 했다. 사회생활과 함께한 독서 리스트는 그 미명 아래 이루어진 일이다. 재미보다는 성장에 초점을 둔 나름의 선택이었다. 그러자 지금 아주 책을 못 읽는 것이다.     


피천득의 ‘인연’이란 수필집을 좋아한다. 믿고 따를 종교가 없는 무신론자로서 나를 돌아보고 가다듬을 B급 탈무드라 여기고 자주 읽는 편이다. 책 속 금아 선생님은 소심하고 수줍고 철이 없다. 그리고 간혹 치사하고, 쪼잔하고, 비겁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그가 솔직하고 순수하기 때문에 적을 수 있던 것이다. 실제론 왜소한 그가 거인처럼 담대해 보이는 이유다. 그리고 언제나 위트를 잃지 않는 점!    


‘인연’을 읽고 나면 세 가지를 다짐하게 된다. 솔직할 것. 해학을 갖출 것. 그리고 잘 웃자. 그런데 올해는 이것마저 읽지 못했다. 내가 유독 이번 연도 채무 관계에 초조한 이유다. 올해는 이미 조졌으니 내년을 기약하기로 한다. 그 시작은 ‘인연’으로 하겠다. 잊고 있던 독서의 여흥이 다시 부흥할 수 있으면 좋겠다. 책상 위 쌓인 책들은 전당포 장물마냥 시간에 여윳돈이 붙으면 가끔 찾기로 하겠다. 올해 쌓은 채무를 내년까지 물려주진 말아야지. 상환은 천천히 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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