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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백하게 Jan 16. 2021

가보

가끔 집에 보면 나보다 더 나이 먹은 물건들이 있다. 물통, 반찬통, 젓가락, 숟가락, 등등 보통 주방 식기들로 부모님이 결혼 살림으로 마련한 것들이다. 하지만 오래 버틴 세월만큼 대단한 것들은 아니고 단순히 플라스틱이나 스테인리스 소재의 평범한 것들이다. 나는 이것들을 볼 때면 새삼 놀라운 마음이 들면서, 이렇게 오래된 물건들이 고작 플라스틱이나 스테인리스 인 게 아쉬울 때가 있다.      


도자기, 서화, 평면화, 조각 등 오로지 예술이 지상 목적인 물건들이 집에 있는 경우가 있다. 그것들은 잘 보이는 곳에 배치돼 호스트의 기호나 취향을 대변한다. 반대로 식기, 가구, 문구, 침구 등 생활에 쓰임이 목적인 집안 살림들은 의식 없이 집안을 메운다. 이것들은 시종 구석구석 호스트와 함께 하며 그 성격과 버릇이 묻는다. 이 두 가지를 찬찬히 보면 눌러앉는 자리마냥 대접이 사뭇 다르다. 아무래도 예술이라고 모셔온 것들이 장식적으로 한몫하고, 본전 아까운 마음도 있고, 특히나 있어 보이는 모양새를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끔 평범한 살림살이에도 장인정신이나 집안의 역사 같은 것이 붙으면 예술은 아니었을망정 앤틱이 되는 경우가 충분히 있다. 흔히 말하는 가보가 되는 것이다.      


외국에서 홈스테이를 잠깐 할 적. 첫날에 호스트가 집안 이곳저곳을 소개해 준 적이 있다. 일단 집부터 백 년이 다 돼간다는 것을 시작으로 가구부터 식기까지 오래된 앤틱을 가리키며 그 유래와 역사를 자랑스레 설명했다. 당시는 이해하기 힘든 장황한 설명이 지겹기도 하고, 그 대단한 식기들과 함께 저녁에 초대된 게 부담스럽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 생각해 보면 호스트의 그런 자부심이 근사 하단 생각이다.     


내력 있는 집에는 그에 걸맞는 가보가 있다. 안동 차암 고택에는 정갈한 장식의 묵묵한 반닫이와 이제는 용도를 다한 선비의 고비가 걸려 있었다. 오랫동안 손 기름을 먹은 그것들은 깊고 은은한 와인빛을 뗬다. 언젠가 TV에서는 집 소개와 더불어 이태리에서 들여왔다는 정교한 장식의 화장대를 선보였다. 기술의 세밀함에 연신 감탄했다. 국적은 모르겠지만 유럽에서 들여왔다는 화려한 은식기. 벌써 네 번째 나라라는 잉글랜드 약갑. 삼대째 딸에게 물려주고 있다는 소반. 이런 것들은 집에 있으며 호스트와 함께 나이를 먹는다. 그리고 자연스레 집의 역사를 증명한다.     


앤틱 컬렉팅도 예술작품처럼 호스트의 격을 높인다. 안목과 식견 없이는 조잡해질 수 있어서다. 하지만 진짜 앤틱에는 인내심이 필요하다. 정수는 사는 것이 아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에도 유럽 명품 앤틱을 사볼 수는 있겠지만, 우리 집 가보라며 떳떳할 순 없을 것이다. 대대로 내려오던 조각보, 증조할머니부터 쓰던 다듬이 방망이, 조선시대 거라는 곰방대 등 시간만큼 귀해진 것들이래야 집안 터주대감이 될 것이다. 그런 의미로 진짜 앤틱은 돈이 필요치 않을 때도 있다.      


일요일이면 부모님께선 진품명품을 보면서 ‘저런 거 예전에 많았는데’라는 말씀을 하신다. 그리고 우리 집에는 내 나이보다 많은 플라스틱 반찬통, 스테인리스 식기 같은 것들이 남았다. 단칸방 신혼집에서 자수성가하신 부모님. 그분들의 역사가 묻은 이 것들에 나는 감사한 마음이 있다. 하지만 플라스틱이나 스테인리스가 우리 집의 가보라기에는 마음이 걸린다. 미래엔 어떨지 모르지만 당장 반찬통 뚜껑에 물든 김치 국물을 자랑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나는 간혹 내 주변에서 앤틱이 될 수 있는 물건이 무엇일지 고민한다. 지금은 열정이 식은 필름 카메라, 먼지가 뽀얀 일렉기타, 입사 기념으로 받은 만년필, 이런 것들이 후보일 수도 있겠다. 혹은 생각도 못한 전혀 다른 것이 남을 수도 있고... 그런데 새로운 것과 내다 버리길 좋아하는 내게 끝까지 남을 물건이 하나라도 있을까 싶다. 종국에는 끝내 채우지 못한 모자란 식견과 안목으로 조잡한 컬렉팅을 갖추는 건 아닌가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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