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소란 아닌 소란
"아가씨 나 좀 도와줘요." 도서대여 창구 쪽에서 큰소리가 들린다. 잠시 후 내가 사용하고 있는 PC 뒷자리에서 소란 아닌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린다. "아이디는 무엇으로 해드릴까요? 비밀번호는 무엇으로 할까요?"라는 도서관 직원의 소리다. 그녀는 아주 차근하게 도서관의 PC를 사용할 수 있도록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만들어 주었다. 그 후 이 아이디로 예약해서 PC를 사용하면 된다고 이야기한다. 그 말에 7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는 "비밀번호가 8개였는데 10개가 넘네!, 아이고 감시가 더 심해졌네", " 비밀번호를 AB135780##하면 돼요?" 같은 말을 서너 번 더 하였다. 직원은 하는 수없이 노인이 가져온 USB를 열어서 사용하는 방법까지 설명해 준다. 이에 옆에 앉아 설명을 듣던 남자가 간절한 목소리로, "사진이 350개 넘는데 이걸... "이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예!?" 직원의 깜짝 놀라는 소리에 나는 '아이고! 큰일이네.'라고 중얼거리면서 다시 내 일에 몰두하였다. PC 작업을 마치고 일어서면서 남자의 모니터와 그의 뒷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는 멈춘 화면을 계속 바라만 보고 있었다.
늙어가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진화하는 기계가, ‘늙어 감’을 더 초라하게 만드는 것 같다. 'AB'를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이며, ' #'을 또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지, 게다가 10개나 되는 비밀번호를 외우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PC라는 것이 요망하여 뜻대로 되지 않아 속에서 천불이 날 지경일 것이다. 누가 인화한 사진이 아닌 USB를 건네주었을까? 타국 멀리 간 자식이 보낸 걸까!
세월의 바람 때문에 휘어진 그 남자의 등을 바라보는 순간, 멀지 않은 시간 나의 모습이 교차된다. 미래의 나의 세상은 어떨까? 직원 없는 도서관에 설치된 키오스크를 잡고 끙끙대고 있을 것 같다. PC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린 세상에서 나는 누구와 대화를 하게 될까?
'퍼펙트데이즈'라는 영화가 생각난다. 주인공은 디지털카메라가 아닌 필름카메라를 사용한다. 그는 매일 같은 장소에서 나무 사이로 일렁이는 햇빛(아마도)을 찍는다. 그리고 이미 단골인 듯한 가게에서 인화를 하고 마음에 드는 것을 보관한다. 영화의 시작과 끝부분까지 그의 사진 놀이는 반복된다. 디지털화된 세상에 그는 아날로그 방식으로 삶을 누린다. 70년대의 음악을 테이프로 듣고, 책을 읽고 일을 하는 단순한 삶을 산다. 이 세상의 주어진 삶이 버거우면 선택하는 삶을 사는 것도 즐거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