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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숨터 Jun 02. 2022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코로나로

  아버지가 코로나 확진이 된 건 3월 31일이었다. 그 바람에  한 집에서 살고 있던 엄마까지 발이 묶이게 되었다. 문제는 엄마는 치매환자라는 거였다. 아침  9시면 주간케어센터에 가서 저녁 다섯 시에 돌아왔다.  복용하는 치매약 때문인지 매우 얌전해서 오면 곧장 침실로 가서 조신하게 옷을 벗어 두고 이불속으로 들어가 금방 잠이 드셨다. 

 아버지는 기저질환 때문에 거동이 불편했다. 하지만 정신은 비교적 맑은 편이었다. 식사는 요양사가 와서 챙겨주었다. 몸은 건강한데 정신에 문제가 있는 엄마와, 정신은 건강한데 몸이 불편한 아버지. 두 분은 그렇게 서로 의지하며 살고 계셨다. 

그런데 아버지가 확진자가 되면서 이 모든 생활 패턴이 깨지게 되었다. 코로나 환자 집에는 요양사도 올 수없었다. 엄마는 음성이었지만 한 집에 사는 아버지가 환자이니 센터에서도 당분간 엄마를 받을 수없다고 했다.  몸 불편한 확진자와 치매환자가 최소 일주일 이상 집 안에 갇혀 지내게 된 것이다. 누군가 돌볼 사람이 반드시 있어야 했다. 그리고 내가 바로 그 사람이 되었다. 

나는 한 달 전 코로나를 치렀다. 형제들 중 코로나를 치른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그러니 내겐 다른 사람들 보단 면역력이 있지 않을까 라는, 확신은 없는 믿음을 안고 기차를 탔다. 

 최소 열흘을 집안에서 꼼짝하지 않고 두 분만을 위한 시간을 보낼 각오였다.  몸 불편한  두 분 때문에 나의 외출조차 힘들 테니 삼시세끼 차려내는 게 가장 큰 문제일 거 같았다. 기차를 타기 전 서둘러 열무김치와 파김치를 담았다. 집을 열흘 이상 비울 테니 남은 식구들도 먹을 수 있는 넉넉한 양이었다.  몇 가지 밑반찬도 만들었다. 집을 나서니 그동안 읽을 책과 시간 보낼 뜨개질 거리, 고기를 좋아하는 아버지를 위해 챙긴 육류까지 넣은 가방이 묵직했다. 

 



 부모님 집에 들어갔을 때는 이미 해가 진 뒤였다. 부모님과 같은 지역에 사는 여동생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부모님의 저녁을  챙겨주기 위해서였다.

 동생은 비닐 방역복, 의료용 장갑, 방역 마스크로 완전무장하고 있었다.  비로소 현타가 왔다. 여긴 코로나 환자 집이고 난 그분들을 간호하러 온 거였다. 그런데 나는 식사 문제에만 신경을 썼지 정작 방역에는 소홀했던 거 같았다. 방역을 위해 내가 챙긴 건 손 소독제와  마스크가 전부였다. 아무리 한번 지나가긴 했지만 재감염이 안된다는 보장도 없는데... 

 나는 코로나에 걸리긴 했지만 무증상으로 워낙 쉽게 넘어갔다. 그래서 코로나에 대한 경각심이 다소 무뎠다. 어쩔 수 없었다. 어쨌든 나는 코로나 환자를 간호하러 온 거고 그다음 일은 그다음에 생각하기로 했다. 



 엄마는 방에서 아기처럼 자고 있었다. 거실에 누운 아버지는 나를 매우 반겼지만 상태가 그리 좋진 못한 거 같았다. 살이 많이 빠졌고 기운이 없어 일어나기도 힘들어했다. 여동생 말로는 잘 먹지도 못하고 먹은 건 거의 토하여 기력이 쇠잔해 있다고 했다. 아버지는 이석증이 있었는데 그때는 그 때문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이제 생각해보면 그것도 코로나의 증상이 아니었나 싶다. 

여동생이 가고 나자 갑자기 두려워졌다.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없는, 하나부터 열까지 내 손만 기다리는 두 노인과 나만 남아 있다는 현실이 무겁게 어깨를 짓눌렀다.

 대소변을 실수하기 때문에 기저귀를 차고 의사소통이 안 되는 치매환자 엄마도 문제지만,  아버진 치매 환자 엄마보다 상황이 더 안 좋았다.  의사소통은 되지만 몸을 일으킬 기력이 하나도 없어 대소변도 누운 채로 의료용 변기로 받아내야할 상태였다. 게다가  감염 위험 때문에 모든 생활을 엄마와 분리를 해야했고 나도 단단히 방역조치를 하고 접촉해야했다.

 두 분을 먹이고, 씻기고 대소변 문제까지 누구의 도움도 받지못하고 모두 나 혼자 해야할 것이다. 코로나 감염의 위험 때문에 이제부터 이 집에는 아무도 찾아올 사람이 없을 테니까.

하지만 나 역시 나이가 들었고 손녀까지 둔 할머니였다.  매일매일 체력이 떨어지는게 느껴질 정도인 내가 이 일들을  감당해 낼 수있을까? 그리고 나는 정말 코로나로부터 안전하기는 한 걸까? 재감염이라도 되면 그때는 나이든 내가 이겨낼 수있을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깊이 생각하면 더 무서워질 뿐이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해보지 뭐, 못할 거 뭐 있어.

나는 가지고 온 음식들을 냉장고에 넣었다.  무인도에 떨어진 사람들처럼 부모님하고만 지내게 집 안을 이리저리 챙겼다.

그런데  현관 번호키 누르는 소리가 났다.  뜻밖에 동생이 다시 들어왔다.

"가는 데 119에서 전화가 왔어. 그래서 차를 돌렸어."

119에서 아버지를 모시러 온다는 연락이었다. 코로나 환자가 급증하던 때라 병실 잡기가 하늘의 별따기라고 했지만 아버진  연세 많고 기저질환자여서 우선 관리대상자로 분류된 덕이었다. 아버지를 엄마와 분리할 수있어 정말 다행이었다. 아버지 씻길 일이 내심 걱정되었는데 그 문제부터도 해방이었다. 


방역복으로 온몸을 감싼 119 대원 두 명이  좌식 들것을 들고 집으로 들어왔다. 대원들은 멀찌감치 서 있었고 아버지는 동생과 나의  부축을 받고 좌식 들것에 앉았다.

"내가 이 길로 가면 다시는 못 돌아오는 거 아냐?"

들것에 앉힌 채 엘리베이터에 타는 아버지는 약간 두려워 보였다. 나는 부러 더 밝게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마세요. 일주일만  있으면 돼요. 잘 치료받으시고 일주일 후에  봐요."

동생과 나는 두 손을 흔들어 아버지를 보냈다. 

정말 그럴 줄 알았다.

그게 마지막 모습이 될 줄 몰랐다. 그 말씀이  유언이 될 줄도 몰랐다.  

코로나가 겁이나 거리를 두려고 몸을 사렸던 게 그렇게 후회가 될 줄 그때는 몰랐다.

알았다면 보내기 전 한 번 꼭 안아라도 주었을 텐데. 




아버지가 119 대원들과 함께 떠나고 오일이 지난  4월 4일.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며칠 후 돌아오실 아버지 맞을 준비로 열심히 집을 치우다 전화를 받은 나는 다리에 힘이 빠져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운명하셨다는 것이다.

'위독'이라는 전 단계도 들은 적 없는데 돌아가셨다고 했다.

홀로.

착오가 아닌가 몇 번이나 확인했지만 사실이 바뀌지는 않았다. 그렇게 아버지는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할 겨를 없이, 기족들도 없는 곳에서, 아무도 모르는 사이 외롭게, 코로나로 목숨을 잃은 수많은 사람들 중에 한 명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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