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숨터 May 11. 2022

코로나의 종말(6)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3월. 새싹 움트고 꽃이 피어나는 그 아름다운 계절을 우리 가족은 코로나와의 전쟁으로 보냈다. 남의 일일 줄 알았던 코로나를 우리 집에 처음 데리고 온 사람은 바로 나였다.   2월 말에 내가 먼저 감염되는 것으로 전쟁은 시작되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3월부터 법이 완화되어 자가격리 기간이 14일에서 일주일로 바뀌었고 확진자 가족들도 같이 격리하지 않아도 되었다. 나 때문에 다른 가족들의 일상까지 망치지는 않았으니 불행 중 다행이다 싶었다.

나는 내 작업실에 처 박혀 일주일을 견뎌내고 무사히 풀려나왔다. 자유의 기쁨을 누린 지  열흘 좀 지나 이번에는 남편이  어디에선가 감염되어왔다. 이틀 후에는 남편에 의해 아들 며느리까지 확진자가 되었다. 

그런데 손녀는 음성이었다. 제 부모와 같이 자고 먹고 한 손녀가 걸리지 않은 건 정말 다행이었지만 확진자가 된 가족들과는 분리해야만 했다. 먼저 코로나를 치른 내가 손녀를 맡을 수밖에 없었다.  손녀가 유치원에서 돌아오면 좁은 내 작업실에 둘이 콕 박혀 다른 가족들을 피해 격리를 했다.

 나는 내가 양성일 때도 자가격리하고 음성일 때도 자가격리 한 셈이었다.  식구들은 일주일 후 풀려났고 그렇게 코로나와 더불어 나의 아름다운 3월이 흘러갔다.

손녀를 빼고 식구들 모두 코로나를 치렀으니 이젠 정말 마지막이겠지. 그럴 줄 알았다.

그래야만 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코로나로 보낸 3월의 마지막 날. 가족들이 오래간만에 간신히 한 식탁에 앉았는데 지방에서 살고 있는 올케가 전화를 해왔다.

"아버님이 코로나에 걸렸어. 아가씨가 와서 간호 좀 해줬으면 좋겠어."

아버지는 몸이 불편해서 집 밖 출입을 잘 하지 않는다. 코로나 사태가 터진 후부터는 거의 집 안에서만 지내고 있었다. 

 아버지는 치매 증상을 보이고 있는 엄마와 두 분이 같이 살고 있었다. 엄마에게서 조금씩 문제점이 보이기 시작할 무렵 코로나 사태가 터졌다. 경로당도 문 닫고 외출도 못하고 사람들을 만날 수 없게 되면서 엄마의 치매 증상은 급격히 심해졌다.

두 분이 모두 문제는 있었지만 아버지 식사나 일상은 요양사가 와서  돌봐주었고 엄마는 아침에 주간케어센터로 가서 저녁 5시에 돌아왔고 같은 지방에 사는  형제들이 챙겨주어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코로나 환자가 되자 이 모든 생활패턴이 무너져 버렸다. 주간케어센터에서는 엄마를 받아줄 수가 없다고 했다. 주간케어센터에는 모두 면역력이 약한 노인들이 있으니 엄마가 음성이라고 해도 한 집에 사는 아버지가 확진자이니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를 돌보던 요양사도 올 수가 없었다. 요양사는 음성이었다. 아버진 도대체 어디서 걸린 거지?

 정신은 또렷하지만 몸이 불편한 아버지와 몸은 건강한데 정신이 아픈 엄마, 두 분이  최소 일주일 집 안에 갇혀 있게 된 것이다. 두 분의 일상은 물론 당장 식사를 챙겨줄 사람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코로나 환자를 돌보는 건 감염의 위험까지 안아야 하는 일이었다.  형제들 중 이미 코로나를 치른 사람은 나뿐이었다. 얼마 정도의 항체가 생긴 건지는 알 수없지만 적어도 한 번도 걸리지 않은 사람보다는 항체가 있지 않을까? 

 나는 기꺼이 부모님을 맡기로 했다. 열흘은 지나야 올라올 수 있지 않겠냐고 하자 아들이 웃었다.

"엄마는 코로나 복 터졌네. 엄마 본인이 결려서 자가격리, 우리가 걸려서 손녀하고 같이 격리 생활, 그리고 이번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때문에 또 격리 들어가야 하게  됐네."

"그러게 말이야."

나도 하하 웃었다.


이때까지 나는 코로나, 즉 오미크론을 크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그랬고 다른 식구들이 그랬듯이 시간만 보내면 될 거라 생각했다. 처음 코로나에 걸렸을 때는 무척 놀라고 당황했지만 지나고 보니 별 거 아닌거 처럼 여겨졌다. 

 나는 무증상으로 넘어갔다. 가족들은 저마다 증상들을 보였고 아들은 그때까지도 후유증이 제법 있긴 했지만 모두 심각하진 않았다. 시간만 지나면 어떻게든 넘어가는 병이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겁을 냈지만 치르고 나니 오히려 홀가분하기도 했다. 

 내가 걱정한 것은 코로나가 아니라 열흘 동안 몸 불편한 아버지와 치매 환자 엄마 두 분을 동시에 어떻게 돌봐야 하나,  인지능력이 상실되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엄마를 아버지와 어떤 방법으로 분리시켜야하나, 혹시 내가 재감염되면 어떡하나, 그것을 걱정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영원히 끝이 없을 거 같은 코로나,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타나는 코로나. 그 끝은 비극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코로나로!

 

매거진의 이전글 코로나에 걸렸다 (5)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