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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란새 Oct 01. 2021

'#낮버밤반 하는 당신'의 아이에게 필요한 것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 가서 눈 흘기기

"김책임, 나 개발팀 M상무인데. 오늘 회의 회의록 썼나?"

매달 사업부장이 주관하는 디자인 회의가 끝나고 나면 각 부서 상무님들의 전화가 종종 오곤 했었다.

대기업의 특성상 모든 부서의 책임자들이 한 가지 이슈에 대해서 모여 논의를 하고, 중요한 의사결정을 하는 월간 회의는 매우 중요한 행사이다. 그 시간에 일어난 일들과 발언들은 훗날 성공과 사고가 발생했을 때, 중요한 증거 자료로 쓰이게 된다. 부서 간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자신들의 부서에 중요한 이슈가 행여라도 빠지거나 더해질까, 각 부서의 부서장들은 회의록에 민감하다.

회의록을 쓴다는 것은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많이 별 것인 일이었다.


호탕한 성격으로 유명하신 디자인 센터 대세 중에 대세, K상무의 비서에게 연락을 받은 것은 (경력 사원으로) 입사한 지 몇달 되지 않아서였다. 상무님이 나를 급하게 호출한 이유가 내가 방금 보낸 '회의록' 때문이었다는 것조차 짐작하지 못하는 햇병아리 시절이었다.

"김 선임은 뭐 하는 사람이야!!!!!!!!!!!!!!!!!!!!!!!!! 회의록을 내 허락도 없이 보내다니. 제정신이야????!!!!!!!!!!!!!!!!!!!!!!!!"

재떨이만 날아오지 않았을 뿐이지, 상무님의 불같은 샤우팅은 파티션 너머에서 일하고 있는 백명도 넘는 사람들이 듣기에도 충분한 대시벨이었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눈물이 핑 돌았다.

사회생활 5년 차에 자잘한 실수도 했더랬지만, 그렇게 머리 위로 떨어지는 불 같은 화를 우산도 없이 고스란히 맞아보기는 처음이었다.


200개도 넘는 눈들이 뜨겁게 나를 주시하는 가운데, 상무님 방을 나오고 복도를 지나서 엘리베이터 앞에 서기까지 다리가 다 후들거렸다. 나는 무슨 그렇게 큰 죽을죄를 지었는가. 온몸이 그대로 가루가 되어 사라져도 세상에 감사할 것 같았다. 나는 이토록 쓸모없는 인간인 것인가.

5년 차에 걸맞은 좌절과 5년 차에 걸맞은 인내심으로, 속은 너덜너덜 겉으로는 꼿꼿한 등과 일그러진 표정으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 선임 잘못이 아니야. K상무님이 화내는 대상. 김 선임이 아니야.

진짜 화를 쏟아부을 사람에게 화를 낼 수가 없어서, 김 선임에게 대신 낸 거야."

시커먼 얼굴에 걸걸한 목소리. 솥뚜껑 같은 손으로 엘리베이터 버튼을 대신 눌러 주시며 K수석이 위로를 건넸다. K수석은 만인이 인정하는 K상무의 왼팔이었다. 비주얼리 K상무보다 더 무서운 사람이다. K수석은 항상 화가 난 듯한 표정과 분석적이고 날카로운 평가로 디자인 품평회를 살얼음판으로 만들곤 했었다.

그런 사람이 내 어깨를 두드리며 내 잘못이 아니라고 말했다. 실제로 어깨를 두드리지는 않았지만, 그 솥뚜껑 같은 손으로 내 어깨를 따듯하게 두드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발송하자마자 나에게 그 난리를 겪게 만든 그날의 회의록은 사실 J상무의 컨펌을 받은 상태로 보내진 것이었다. K상무는 여러 조직을 수하에 거느린 곧 전무가 될 대세 상무였고, J상무가 이끄는 우리 조직도 그중에 하나였다. 당시 J 상무는 틈만 나면 우리 조직을 분리시켜 K상무 손을 떠날 궁리를 하던 참이었다. 그러니, 내가 보낸 별 것 아닌 회의록에는 그날의 디자인 결과물이 J상무의 공이라는 내용이 노골적으로 담겼던 것이다. 부르는 대로 받아 적는 햇병아리 김선임이 알 턱이 없었던 정치 관계는, 그렇게 김선임의 손으로 쓴 회의록에 고스란히 담겨, 사업부장님 이하 모든 유관 부서에 널리 널리 보내졌던 것이다.


10년도 지난 세월과 K수석의 배려 덕분에 이 일을 거의 잊고 있었다.

아이 앞의 나에게서 K 상무의 모습을 발견하기까지.





 

#낮버밤반

아이를 낳고 육아가 시작되니 '낮에는 버럭 하고, 밤에는 반성하는' 시간이 자주 찾아왔다.

하루 종일 넘치는 아이의 에너지를 따라가지 못하고, 제발 빨리 자라. 빨리 자라.  되뇌며  시간을 기다린다.  과정에서 버럭버럭 짜증을 쏟아내며  안의 미친ㄴ을 쏟아내는 것은 특히 아이와 .  둘이 있을 때이다. 드디어 난장판이  집안에 고요함이 찾아오고, 정리되지 않은 바닥은 내일  반복될 테니 치우기를 생략한다. 티비를 켜고 맥주  캔을 따며 휴식을 시작한다. 드라마나 한편 보고 자려고 했는데, 어느새 나는 핸드폰 안의 아이 사진들을 들여다보고 있다.

이렇게 예쁜 아이에게.

그냥 궁금한 게 많은 아이인데.

에너지가 넘칠 뿐인 건데.

또 나는 버럭하고 말았구나.

사실 나는 아이에게 화가 나서가 아니라, 화가 난 내 앞에 있는 대상이

연약한 아이. 그 아이 하나라서 화를 낼 때가 있다.

비겁한 일이다.

그럼에도 내일 아침 눈을 뜨면, 또다시 반복하게 될 비겁한 나의 버럭.


살다 보면 나에게 화를 내는 사람을 어쩔 수 없이 만나게 된다.

내가 잘못을 했을 때에도.

내가 잘못을 하지 않았을 때에도.

아이가 커서 언젠가 그의 잘못과는 상관없이 화를 퍼부어대는 사람이 있더라도, 아이가 스스로에게 네 잘못이 아니라고 얘기해주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

그러려면 엉뚱한 화를 내지 않는 것만큼이나 니 잘못이 아니라고 얘기해주는 것이 어쩌면 더 중요한 것 같다.


아이에게 화를 내는 K 상무와 니 잘못이 아니라고 얘기해주는 K 수석은 한 사람이다.

낮버밤반 하는 당신의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당신.

니 잘못이 아니라고 얘기해주는

당신.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라 배워가는 과정이라고.


엄마가 엄마에게 화가 나서 너에게 화를 낸 것이라고.

미안하다고 얘기해주는

당신이다.




[ 표지 사진 출처 ] https://pepnewz.com/2018/01/03/morally-good-kind-per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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