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의 일상을 보내다 얼마 남지 않은 막차 시간을 보며 지하철역으로 급히 달려가는 사람들. 하지만 열차는 무심한 듯 바람과 함께 떠나버렸고, 어쩔 수 없이 새벽 첫 차를 기다려야 한다는 운명에 직감한 사람들은 개찰구 앞에서 아침까지 영업하는 가게를 찾아야 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혼자 기다리는 것보다 다 같이 일상을 공유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 덜 따분하겠다 싶었는지 개찰구 앞 네 명은 뜻밖의 회동을 가진다. 얼떨결에 한 테이블을 잡고 이야기를 나눠보니 마주 보고 있는 두 명은 직장인인 듯했다. 대학생이었던 나머지 두 명인 키누와 무기는 자신들과 다른 세계에 있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따분한 눈치였다.
서로만 신났던 직장인들의 대화를 흘려들으며 음료를 마시던 무기는 옆 테이블을 보더니 화들짝 놀란다. 바로 일본의 세계적인 애니메이션 영화감독, '오시이 마모루'가 옆에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직장인들은 그를 모르는 눈치였고, 무기는 이 뜻밖의 회동이 더 지루해진 듯했다.
마침내 회동이 끝나고, 말이 통하지 않아 답답했던 직장인들이 택시를 타고 떠났다. 마침내 집에 가는 것만 생각했던 무기가 바랐던 순간이 찾아왔기에, 무기는 서둘러 집으러 향하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왠지 모르게 흥미로운 표정이었던 키누는 무기의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사실 오시이 마모루를 알아봤었던 키누가 무기에게 '마니아로서의 동질감'을 느꼈던 것이다.
그렇게 아까와 달리 대화가 잘 통했던 대학생 키누와 무기는 서로에 대해 알아가기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통하는 점이 많았다. 호무라 히로시, 나가시마 유의 책부터 시작해서 영화 티켓을 책갈피로 쓰는 것, 그리고 텐지쿠 네즈미의 원맨 콘서트의 티켓을 구매하고 못 간 것까지 취미와 행동이 대부분 비슷했던 것이다.
이렇게 수많은 공통점을 찾으며 서로에게 흥미를 느낀 키누와 무기는 국립과학박물관에서 열리는 미라 전에서 만남을 기약하며 아쉬움을 뒤로한 채 헤어진다. 어쩌면 다음에 밥 한번 먹자는 식의 예의상 한 말이었을 수 있지만, 서로 수많은 공통점을 찾으며 호감을 쌓은 남녀의 약속이 결렬될 리 없었다.
이후 썸을 타던 둘은 수차례 만남을 가지다 막차 시간이 임박했을 때 서로의 마음을 전달하며 마침내 연인이 되었다. 막차를 통해 시작된 이들의 인연은 수많은 공통점을 품고 증기를 내뿜으며 달려가고 있었다.
출처 : 네이버 영화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 스틸컷
집을 구해 함께 살 정도로 행복 가득했던 그들에게도 현실의 벽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대학생이었던 둘은 곧 졸업이 예정돼 있었고, 이 행복한 생활을 영위하려면 취직을 해야 했다. 마침내 서로를 응원하며 열심히 노력한 끝에 사회인이 된 키누와 무기는 퇴근하고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며 호기롭게 구매한 닌텐도 스위치를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나마 직장생활과 퇴근 후 일상에 여유가 있었던 키누와 다르게, 구직과 직장생활이 모두 힘들었던 무기는 일상에 여유가 없었다. 키누와 행복한 미래를 그리려면 금전적 여유가 보장되어야 했기에, 무기는 한때 꿈꿨던 그림도 키누와 공유하던 취미도 모두 내려놓으며 힘들어도 일했다.
하지만 키누는 이런 무기의 모습이 불편하고 속상했다. 무기가 점점 사회에 찌들어 흑화 돼 이전과 다른 모습을 보일 때면 키누는 심란했다. 과연 키누와 무기는 행복한 미래를 꿈꿀 수 있을까?
출처 : 네이버 영화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 스틸컷
이 영화를 보고 나서 가장 먼저 떠오른 단어가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이울다'. 사전적 의미로는 '꽃이나 잎이 시들다', '점점 쇠약하여지다'의 뜻으로 사용되는 고유어다. 처음에는 꽃다발처럼 아름다운 시작이었지만, 사회라는 바람을 맞으며 꽃잎이 떨어지고 향기도 점점 잃어가는 키누와 무기의 모습은 '이울다'라는 단어로 표현하기에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대부분 일본 멜로 영화처럼 이 영화도 비슷한 양상으로 흘러가지 않겠나 했는데, 영화 엔딩을 보고 나니 여운이 짙게 남았다. 책상에 있던 드림카카오 72% 통을 열어 세 알 정도 남아 있던 걸 먹은 것 같았다. 뭔가 아쉬우면서도 씁쓸한 이 느낌은 뭘까.
연인이 헤어지는 사유 중 하나가 '성격 및 가치관의 차이'가 아닐까 싶다. 이 부분이 서로 맞지 않아서 헤어졌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 한 사람이 별 것 아니라고 생각했던 점이 상대방의 가치관에서 큰 비중을 차지할 수 있기에. 역으로 장수 커플에게 비결을 물어보면 서로 어긋나는 구석 하나 없이 잘 맞기 때문이라는 원론적인 답변을 듣게 될까? 사실 잘 모르겠다. 세상에 제대로 발 담가보지도 않은 멀대 같은 어린놈 하나가 이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키누와 무기는 취미부터 시작해서 행동, 습관 등 공통점이 많았다. 어쩌면 이런 점은 분명 두 사람이 연인이 되는 데 좋은 조건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결말을 보니 마음 한 구석이 시원찮았다. 물론 자기들 딴에 쿨하게 이별했다는 시답잖은 마무리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렇게 잘 맞았는데도 종착역에 도달한 그들의 막차에 느끼는 안타까움이었으리라.
출처 : 네이버 영화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 스틸컷
무기는 결국 변했다. 문학이라는 취미와 함께 개성 있는 그림을 통해 가지고 있었던 무기의 매력은 그가 사회에 찌들어 흑화함으로써 모두 사라졌다. 하지만 이는 키누와의 행복한 미래를 꿈꾸며 포기한 자신의 것들이기에 더 안타까웠다.
서로를 사랑했기에 서로에게 베풀었던 배려는 오히려 서로에게 오해 섞인 독이 됐고 결국 둘 사이에 균열을 만들고 말았다. 키누와 무기의 서사를 보며 많이 안타까웠다. 대학생과 직장인으로 만나 서로의 힘듦을 이해하지 못하는 간극으로 헤어지는 경우와 취직 준비에 집중해야 해서 헤어지는 경우 등 내 세대의 이야기인 것 같았다.
누구보다도 잘 맞았던 키누와 무기는 결국 현실의 벽을 넘지 못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서로의 입장을 조율하지 못했다는 큰 요인을 통해 볼 때, 사랑에 있어서는 시작도 중요하지만 서로 이해하며 입장 차를 줄여나가는 '일련의 과정'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역사적 참패 후 줄리우 세자르는 이렇게 말했어 "지금까지 우리의 길은 아름다웠다, 조금 아쉬웠다"
그들의 열차는 순환열차가 되지 못하고 결국 종착역으로 향했다. 그들의 마지막에서 무기가 웃으며 했던 말은 키누와 무기의 시간을 정리한 구절이라고 생각했다. 남부럽지 않게 아름다운 사랑을 했지만, 결국 현실의 벽에 막혀 전해지지 못하고 어긋난 그들의 진심. 결국 이울어버린 그들의 꽃다발은 여전히 씁쓸하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