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슬픔들은 따뜻하다
저는 말하는 것보다는 듣는 것을 좋아합니다. 말하기에는 재주도 없을뿐더러, 실언은 다언에서 온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어딜 가던지, 어떤 자리에서건 내 이야기보단 상대방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대화하려고 노력합니다. 최근 주변인들의 가슴 아픈 일들을 지켜보면서, 또 이후에 이야기를 나누면서 느낀 점들과 오래된 생각들을 나누려 합니다.
저는 집에 누군가를 초대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보아온 어머니의 모습 중 하나는 손님 들이기를 즐겨하셨다는 것입니다. 집에 손님을 초대하려면 여간 손이 가는 일이 아닙니다. 바닥부터 쓸고 닦고, 냄새도 좀 나는 것 같으면 향초도 켜놓아야 합니다. 남들에게 보여주기 어려운 것들은 눈길이 닿지 않는 곳에 숨겨 놓기도 합니다. 수저는 말끔히 윤택이 나야 하고 평소에는 쓰지 않는 손님용 그릇들도 내놓습니다. 그렇게 하고 나면 손님들이 떠나시고 난 후에도 한동안 집이 깨끗합니다.
마음에 누군가를 들일 때에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집안을 치우지 못하고 있다가도 누군가를 초대하게 되면 금방 집을 치우는 것처럼 우리네 마음도 그러합니다. 마음을 열고 다른 이들을 초대할 때 마음이 정리가 되기 시작합니다. 오래도록 집을 치우지 않고 놔두면 집안 곳곳에 먼지가 쌓이고 때가 되어 굳어 남듯이 부정적인 감정들 - 분노, 자기 연민, 무기력증, 음란, 게으름의 찌꺼기들은 우리가 마음의 문을 닫음으로써 축적되고 시간이 지날수록 고형화 되어 나중에는 밀어내기조차 어려워집니다. 이런 고민들을 숨김없이 솔직하게 나누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마음은 한결 깨끗해집니다.
가끔씩 이렇게 마음에 들어앉은 먼지들, 청소할 때를 놓친 오물들이 쌓이고 쌓이면 우리는 그 크기와 위엄에 위축될 때가 있습니다. 금방이라도 나를 집어삼킬 듯이 서있는 모습을 보며 우리는 금세 무력해지고 주눅이 들기 쉽습니다. 뭔지도 모를 것들이 쓰나미처럼 밀려오면 발버둥 칠 겨를도 없이 그저 잠식당할 거라는 생각에 그저 맥이 빠지고 괜스레 먼저 겁을 집어먹는 겁니다. 우리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것들은 수천수만 가지지만 깨끗하게 하는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그저께 청소한 집이든, 10년 전에 청소한 집이 든 간에 청소하는 방법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먼저 문이던 창문이던 최대한 활짝 열어놓고 먼지부터 털고, 쓸고 닦아내야 합니다. "千里之行 始於足下 천리지행 시어족하"라는 말처럼 백리를 가든 천리를 가든 한 걸음을 내딛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괴물이 얼마나 크던 사실 별 상관이 없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낙숫물을 떨어뜨리면 결국엔 어떤 바위라도 쪼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은 한 단어씩 합니다. 제아무리 빠른 사람도 단어 열 개를 한꺼번에 뿌릴 수 없습니다. 한 단어 한 단어씩 말해야 문장이 만들어지고 이 문장들이 모여 이야기가 됩니다. 그렇게 한 문장 한 문장이 차례대로 쌓여야 이야기를 끝낼 수 있다는 것은 의외로 중요합니다. 말은 시간의 순서대로, 처음에서 끝으로 한 문장 한 문장 놓는데요. 이렇게 말해나가는 동안 우리에게는 변화가 생기고 이게 축적됩니다. 막상 커튼을 젖히면 의외로 별 볼일 없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차마 표현하지 못했던 감정을 한 단어 한 단어 언어화하는 동안 우리는 차분하고 냉정하게 그것을 내려다보게 됩니다. 언어는 논리의 산물이어서 제아무리 복잡한 심경도 언어 고유의 논리에 따라, 즉 말이 되도록 이야기해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좀 더 강해지고, 마음속의 어둠과 그것에 대한 막연한 공포가 힘을 잃습니다. 이것이 바로 말하기가 가진 자기 해방의 힘입니다. 우리 내면의 두려움과 편견, 나약함과 비겁에 맞서는 힘이 거기에서 나옵니다.
어떠한 일이던지, 어떠한 생각이던지 혹은 어떠한 감정이던지 간에 그것을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할 때 마법이 일어납니다. 사실 이 고민이라는 녀석들이 참 웃깁니다. 단지 입 밖으로 나옴으로 인해서 언어로 표현되고 텍스트화 되고 개체화되면서 우리는 이 개인적인 고민들을 제삼자의 시선으로 재구성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재미난 일이 생기는데, 우리 안에 있으면 되게 커 보이는 고민들도 막상 입 밖으로 말해버리면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기 시작합니다. 가슴을 짓누르는 듯한 무거운 고민들에 며칠 밤잠을 설치고 괴로워하다 용기를 내어 어렵게 발걸음 한 술자리에서 한참을 망설이다 꺼내놓은 이야기. 정작 꺼내보이고 나니 생각보다는 김 빠지고 시시했던 경험. 말주변이 없어서 생기는 일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그 고민들은 정확히 혀 끝에서부터 힘을 잃고 작아지기 시작합니다.
모든 슬픔은, 그것을 이야기로 만들거나 그것들에 관해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견뎌질 수 있다.
한나 아렌트가 <인간의 조건> 5장의 제사(題辭)로 사용하면서 유명해진 이 문장은 이자크 디네센이 뉴욕타임스 북 리뷰에 수록된 인터뷰에서 한 말로 알려져 있습니다. 저는 아직도 이 문장을 턱 아래에 괴고 삽니다. 단지 슬픔을 내 밖으로 꺼내 보이는 것 만으로 그것을 견디어 낼 수 있는 힘이 생긴다면, 내가 견디지 못하는 건 없겠죠. 그 사실 자체가 저에겐 큰 위로이자 마음속 단단한 부분이 되었습니다.
많이 아프고, 많이 슬픈 사람이 건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연수 작가가 말한 것처럼 가장 건강한 마음이란 쉽게 상처 받는 마음입니다. 세상의 기쁨과 고통에 민감할 때, 우리는 가장 건강합니다. 때론 즐거운 마음으로 조간신문을 펼쳤다가도 우리는 슬픔을 느끼고, 철없이 살갑게 인사를 건넸다가도 친구의 마음 아픈 소식을 들었을 때 우리는 슬퍼합니다. 물론 마음이 약해졌을 때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 약한 마음을 통해 우리는 하나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가장 건강한 몸은 금방 지치는 몸입니다. 자신은 지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약한 것들은 서로의 처지를 너무나 잘 압니다. 그리고 다행히도 저희는 모두 그렇게 태어났습니다.
이렇듯 우리는 좀 솔직한 삶의 태도를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힘들면 힘들다 얘기하고, 우리가 뭘 잘못해서 힘든 게 아니잖습니까. 또 속상한 일이나 고민이 생기면 그냥 편하게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삶의 고민이라는 게 항상 거창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점심에 밥은 먹어야 하는데 당기는 음식이 없다던지, 아니면 친한 친구가 연예를 시작했는데 배가 아프다던지. 그런 이야기들을 편하게 나눌 수 있을 때, 인격적이고 관계지향적인 나눔도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절망과 두려움은 이겨내는 게 아니라 밥처럼 마주 앉아 나누는 것이라 합니다. 나누는 사이로 희망이 끼어들기 때문이라고.
이것이 나의 오래된 바람이며 사랑의 언어입니다.
어떤 슬픔들은 따뜻하다.
슬픔과 슬픔이 만나 그 알량한 온기로 서로 기대고 부빌 때,
슬픔도 따뜻해진다.
조병준, <따듯한 슬픔> 중
참조: 김영하, <말하다>. 최종원, <텍스트를 넘어 콘텍스트로>. 김연수, <지지 않는다는 말>. 김소연, <시옷의 세계>. 수전 손택, <문학은 자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