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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drew Park Jul 30. 2021

슬픔을 나누다

더 낮은 곳으로

배움은 '머릿속에 지식을 쑤셔 넣는 행위'가 아니라 '세상의 해상도를 올리는 행위'라고 합니다. 뉴스의 배경음악에 불과했던 코스피나 S&P500 지수들이 의미를 지닌 숫자가 되거나, 경복궁 옆 지나치는 외국인 관광객들의 대화에서 들려오는 단어들의 뜻을 알아들을 수 있게 되거나, 정릉 산책 중 보이는 단순한 가로수가 '개화 시기를 맞아 꽃이 만개한 때죽나무'가 되기도 합니다. 같은 것을 보아도 남들보다 더 많이 보는 일, 흐릿하게 보이는 것에 윤곽을 그리고 디테일을 덧대는 일. 이 해상도를 업그레이드시키는 감각을 즐기는 사람은 강합니다. 마찬가지로 성숙한 사람이 된다는 건 공감의 해상도가 높아지는 일인 듯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혹은 잔인하게도 모든 불행은 개인의 고독까지도 휩쓸고 지나간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대지진이든, 전쟁이든, 홍수든 참사가 벌어진 뒤에 우리가 직면하는 풍경은 피난민 대피소와 같은 공동의 공간이니까요. 거기에 혼자만의 방은 없습니다. 개인은 자신의 고통과 슬픔과 절망을 모두의 앞에 꺼내놓아야만 합니다. 당연히 그 감정들은 균질화되겠죠. 그러나 대피소 바깥의 다른 모든 인류에게 그 감정들은 너무나 생소합니다. 몇 해 전 어느 봄날의 참사 이후 저는 TV나 인터넷을 통해서 수많은 고통을 목격했습니다. 그 고통은 때로는 방송용 카메라의 녹화된 화상으로 혹은 녹음된 절규로 전달됐습니다. 감각적으로 볼 때, 시각과 청각이 압도적이었고 코와 입과 살갗으로 들어오는 정보는 없습니다. 매체가 전달하는 재앙은 저의 고독마저도 휩쓰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건 잘 가공된, 결국에는 우리를 시청자로 만들고, 관람객으로 만들고, 안심시키는 종류의 그런 재앙이었습니다. 덕분에 저의 고독은 안전합니다.


그런 밤이면 혼자 우두커니 누워 문득 코와 입과 살갗으로 경험하는 침몰에 대해서 상상할 때가 있습니다. 불안한 징조를 가득 머금은 바람의 느낌이라거나, 압도적으로 밀려드는 바닷물의 압력, 혹은 온 존재를 뒤흔드는 갑작스러운 오한 같은 것들을 말입니다. TV가 전달하지 못하는 그 감각들에 대해서. 그러면서 고독이란 다시 감각의 부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제가 느끼는 것들을 다른 사람이 느끼지 못한다거나, 다른 사람들이 느끼는 것을 제가 느끼지 못한다거나. 예컨대 그게 책갈피에 검지가 베이는 것 정도로 아주 사소한 것이라고 하더라도요. 그렇다면 모든 재앙은 개인의 고독까지도 휩쓴다는 말은 틀렸겠습니다. 결코 전해줄 수 없는 감각적 정보들 앞에서 고독은 늘 상존하는 것일 테니까요.


우리는 점점 멀어질 뿐입니다. 기쁨은 노력하지 않아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지만, 그래서 아는 순간 바로 질투하고 시기할 수 있지만, 고통은 단 하나의 감각적 정보만 결여되어도 타인은 그 고통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고독이란 우리가 고통으로는 서로 연대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기인할 것입니다. 불행은 우리를 가장 외롭고 연약한 사람들로 만듭니다.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이 연대 불가능한 고통 앞에서 위로 역시 불가능합니다. 한숨이라거나, 눈물이라거나, "이 모든 게 꿈이었으면 좋겠다."라고 TV에서 말하던 할머니의 무연한 한탄처럼 단순하고 갑작스러운 몸의 반응만 있을 뿐입니다.




안톤 체호프의 단편 <대학생>에서 주인공 신학대학생인 이반은 쓸쓸한 겨울날, 철새 사냥을 마치고 귀가하는 중에, 문득 이 모든 추위와 굶주림과 어둠이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으며 미래에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절망적인 기분에 빠집니다. "1천 년이 지나도 현실은 더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들자 그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때 모닥불을 쬐고 있는 두 과부 모녀를 만납니다. "바로 이렇게 추운 밤에 사도 베드로가 모닥불을 쬐었죠." 이렇게 말문을 열면서 이반은 두 여인에게 '베드로의 부인(否認)'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저 모닥불 때문에 생각났을 뿐이고 잠시 시간이나 때우자고 시작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이반의 이야기가 예수를 세 번 부인한 이후 서럽게 우는 베드로를 묘사하는 데까지 이르렀을 때, 과부는 눈물을 떨어뜨리고 딸은 격해진 감정을 어쩌지 못합니다. 당황하는 쪽은 오히려 이반입니다. 이 여인들은 왜 이러는가. 베드로의 그 무엇이 두 여인의 마음을 건드린 것일까. 무려 19세기 전에 일어난 일이 아닌가.


그는 생각했다. 잇달아 발생하는 사건들의 끊임없는 사슬로 과거와 현재는 연결된다. 그리고 그는 방금 자신이 이 사슬의 양끝을 본 것처럼 느꼈다. 한쪽 끝을 건드렸더니 다른 한쪽 끝이 떨리는 것 같았다. (⋯) 산 위로 올라가서 그는, 자신의 고향 마을과 차가운 자줏빛 노을이 가느다란 한 줄기 빛으로 빛나는 서쪽을 바라보며, 동산과 제사장의 마당에서 인류의 삶에 방향을 제시했던 정의와 아름다움이 끊어지지 않고 지금 이날까지 계속되고 있고, 분명히 인류의 삶과 이 지상 전체에서 언제나 가장 중요한 것을 형성해왔다는 생각을 했다.


체호프의 말마따나 과거와 현재가 연결되어 있다면 그 둘을 연결하는 사슬은 '이야기'일 것입니다. 먼저 베드로가 울었고, 그 울음은 천구백 년 뒤 한 신학대학생의 '이야기'를 통해 오늘로 이어져, 두 여인의 울음이 됩니다. 각각의 삶은 하나씩의 이야기이고 그 이야기들은 서로 연결돼 있으니, 우리는 어디에서 무엇으로 살더라도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한쪽 끝을 건드리면 다른 한쪽 끝이 떨립니다. 그 공명과 공감 속에서 예수 시절 이래의 "정의와 아름다움"이 이어져올 수 있었습니다. 이 발견과 더불어 "1천 년이 지나도 현실은 더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라는 비관은 극적이게도 "삶은 매혹적이고 경이로우며 또한 고귀한 의미로 가득 차 있다."는 낙관에 자리를 내어줍니다. 불과 다섯 페이지가 채 안 되는 이 짧은 단편은 묘하게 읽는 이의 마음을 흔듭니다.


실제로 우리의 삶이 매혹적이고 경이로우며 고귀한 의미로 가득 차 있는지는 불확실하지만, 그렇다고 믿을 때 우리의 마음이 어떤 힘센 위안으로 안심하게 된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삶의 비참한 진상을 모르는 이의 미숙한 낙관이 아니라, 다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살아야만 한다고 믿는 이의 성숙한 낙관입니다.


발터 벤야민이 <이야기꾼과 소설가>에서 한 말을 조금 비틀어 말하자면, 오늘날 우리는 수많은 매체를 통해 많은 불행들을 전해 듣지만 그 불행들은 상투적인 표현들로 이차 가공되면서 그 단독성을 상실하고 일종의 정보들로 추락하고 맙니다. 너무나 많은 불행이 있고 우리는 그 불행에 무뎌집니다. 우리 그 가공되는 과정에서 깎여나간 슬픔의 디테일, 매끔히 다듬어진 슬픔의 윤곽을 지켜내야 합니다. 일률적이고 단편적으로 재편집된 슬픔들의 본래 모습을 찾을 수 있게끔 해야 합니다. '슬픔의 평범화'에 맞서서 '슬픔의 단독성'을 지켜내는 것입니다. 카프카가 <변신>에서 한 은행원을 벌레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의 불행이 여전히 기억되는 것처럼, 또 황정은이 <모자>에서 아버지를 모자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 불행은 일반성 속으로 소멸되지 않고 보존되었습니다. 날 것 그대로의 슬픔이 오롯이 보전되어, 읽는 이들은 그 슬픔의 세세한 부분까지 톺아낼 수 있고 감각적으로 공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삶은 이야기가 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야기들은 서로 연결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이 이야기가 우리를 묶는 원동력입니다. 우리의 삶이 이야기가 될 때, 그 이야기들이 서로 연결되어 하나의 거대한 서사가 될 때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높은 곳에서 바라본 도시는 화려합니다. 반짝이는 유리알을 뿌려놓은 듯 휘황찬란한 불빛들과 마천루들이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저 도심 속은 모두가 행복하고 무탈한 멋진 신세계일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멀리서 바라볼 땐 삶이 고단한 자들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눈높이를 낮출 때 비로소 높은 곳에서는 보이지 않던 낮은 곳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들의 삶의 영역 한 곳, 한 곳을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온통 현실적인 고통 투성이 입니다. 노숙자, 청소년, 노인, 직장인, 가장, 유흥가를 찾는 사람, 유흥가에서 일하는 사람, 아르바이트생, 일용직 노동자, 경비원. 길가에 막 자란 풀꽃처럼 이름도 불리지 않은 채, 눈길도 주어지지 않은 채 쉬이 흐드러져 갑니다.


우리가 다 같은 학생이라고, 직장인이라고 다 똑같은 고민을 가지고 살아가는 게 아닌 것처럼 우리 주변에 도움이 필요한 이들도 그러합니다. 늦은 밤 지하철역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노숙자들은 다 똑같은 하루를 보낸 것 같은 모습이지만 사실 그들도 각자 삶이 있고, 신념이 있고, 고민이 있고, 가고 싶은 곳이 있고, 후회가 있고, 꿈이 있고, 살아가는 원동력이 있습니다. 물론 그들이 당장 필요한 것들, 비를 막아줄 지붕이라던지 허기를 지울 끼니도 중요하지만 그만큼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로서 그들의 삶에 윤곽을 그리고 디테일을 덧대는 일. 더 구체적이고 감각적으로 공감하는 일. 공감의 해상도를 높여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일. 그렇게 그들의 슬픔의 평범화에 맞서 슬픔의 단독성을 지키는 일.


그런 게 아마 성숙한 사람이 되어가는 일인 것 같습니다.



어찌 보면 물길이 하늘로 치솟는 것 같은
흘러간 물길이 되돌아올 것도 같은
아무리 둘러봐도 아늑한 이 광야에
흘러야 할 높낮이가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이 세상에는 흘러야 할 낮은 데가 끝끝내 있다고
낮은 데마다 보아란 듯이 젖은 황사를 채우면서
하늘도 구름도 다 등지고
낮은 곳으로 더 낮은 곳으로
누런 손가락으로 이 세상을 더듬고 있다.

정양, <더 낮은 곳으로> 전문



참조: 김연수, <시절일기>. 안톤 체호프, <체호프 단편선>. 발터 벤야민, <이야기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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