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이 Dec 23. 2020

희생이란 단어를 사람으로 만들면 엄마인가요

“'희생'이란 단어를 사람으로 만들면 엄마인가요”


“엄마 내가 커서 뭐가 되면 좋겠어?”

“음... 사회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면 좋지.”


엄마는 의사나 변호사 같은 잘난 직업보다 사회에서 꼭 필요한 사람이 되길 바라셨습니다. 치맛바람을 날리지도, 왜 공부 1등을 못하냐고 잔소리하는 여느 엄마들과는 다른 우리 엄마.


엄마는 항상 밝은 분입니다. 사람은 이름 따라 간다고, ‘밝을 명’자가 이름에 들어가서 그럴까요. 우울했던 내 청소년기 내내 아침마다 “항상 웃는 얼굴로~~ 화이팅!”을 외치시며 배웅해 주셨어요. 가족들의 꽃 길을 만들어 주느라 정작 자신은 웃음 뒤에 아픔을 숨기고 계셨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한 번도 만난 적은 없는, 엄마 아빠의 젊은 날


스물 여섯에 서울로 시집오신 엄마는 별난 시어머니 밑에서 20년동안 시집살이로 고생하셨고, 없는 살림에 자식 셋을 부족함 없이 키우셨어요. ‘희생’이란 단어를 사람으로 만들면 우리 엄마인가 할 정도로 정말 쉽지 않은 인생을 살아 오셨습니다.


“집을 떠나고 나서야 알게 된 엄마의 사랑”


결혼 준비를 하면서 처음 느끼는 감정들이 많았습니다. 어느 날은 엄마가 내 방에 곱게 개켜 놓은 옷을 보고 갑자기 눈물이 터져서 당황했습니다. 그 전에는 몰랐는데... 지금까지 엄마가 개켜 주신 옷이 내 방에 있는 장면은 너무나 당연한 광경이었는데 그게 아니었던 겁니다. 마치 매직아이에서 글자가 튀어나오듯, 갑자기 엄마의 사랑이 커다랗게 보여서 한동안 방문을 잠그고 훌쩍였어요.


2018년은 우리 가족에게 잊지 못할 한 해입니다. 저는 6월에, 둘째는 12월에 결혼을 했어요. 한 해에 두 명이 시집가는 일은 흔치 않은데, 그래서 텅 빈 집만큼 엄마의 마음도 많이 허전하셨을 거예요. 결혼 초기에 엄마 집을 더 자주 가고 싶었지만 반찬이라도 한번 가지러 가면, 돌아오는 길은 이상하게 슬프기도, 미안하기도 한 감정과 우는 내 모습이 싫어 가지 않았다는 걸 엄마는 아실까요?



“가족의 꽃 길을 일구시느라 정작 본인의 꽃 길은 돌보지 못하신 엄마”


엄마는 평생 아빠와 세 딸들의 꽃 길을 일구느라 정작 본인의 꽃 길은 제대로 가꾸지 못 하신 듯 해요. 항상 가족들의 행복을 위해 바깥 일, 집안 일 모두 엄마가 도맡으셨기 때문입니다. 좋은 반찬이 생기면 항상 자식들 주고, 어쩌다 용돈이 생기면 아빠 옷을 사러 가셨어요. 빠듯한 살림살이 아끼시느라 항상 대중교통 환승을 따지셨고, 마트 봉투 값도 항상 아끼며 평생을 사셨네요.


정도 많고 효심도 깊은 우리 엄마. 주중 직장 생활로 피곤하실 텐데 매 주말마다 청주에 내려가서 할머니의 귀여운 둘째 딸 역할에 충실하셨습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엄마는 외갓집 이야기만 나오면 눈이 빨갛게 되십니다. 우리 세 자매는 외갓집에서 보냈던 기억이 즐거워 이야기하고 싶지만, 말을 아끼게 됩니다. 엄마의 눈물을 아껴 드리고 싶기 때문에...



“결핍을 채워주는 사랑”


이번엔 신랑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어쩜 이렇게 귀여울까~' 매일 한 번씩은 신랑에게 듣는 말인데요, 퇴근하고 집에 오면 항상 애정표현을 하며 ‘귀엽다, 이쁘다’를 연발합니다. 사실 결혼 후 6kg나 살이 쪄서 저런 말은 민망한데요. 하도 많이 들어서 이게 빈 말인가 싶지만, 표현을 많이 하는 신랑에게 고마움을 많이 느낍니다.


서울서 직장생활을 하던 신랑은 연애 1개월차에 본가가 있는 부산으로 발령이 나버리고... 그렇게 2년동안 주말마다 장거리 연애를 했습니다. 주말마다 서울로 달려왔던 신랑은 제가 생각해도 정말 대단해 보였어요. 직장에서 야근하고 토요일 새벽에 일어나 KTX 혹은 직접 차를 몰고 부산에서 서울까지 오는 열정이라니...


이런 신랑의 성실함, 열정, 저에 대한 진심이 느껴져 결혼을 하게 됐습니다. 언젠가는 신랑이 이런 말을 했어요. '나는 돈 버는 일 자체를 좋아하니, 네가 돈이 없어서 무언가를 못 하는 일이 없으면 좋겠고, 회사 안 다녀도 된다, 무엇이든 하고 싶은 걸 하라'고.


저는 딱히 이루고 싶은 목표나, 목표가 있어도 행동(Do)이 바로 안 되는 타입인데요. 그래서인지 열정이 꽤 식은 직장생활에 대해 퇴사를 고민하기도 하고, 인생의 목표가 없어 걱정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 때 들었던 신랑의 그 말은, 행동을 바로 하지 못하는 저의 근본적 원인인 결핍에 대한 영역을 채워주는 한 마디였어요. 늘 비어 있던 무언가 채워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차가운 세상 속 따뜻한 쉼터가 되어 주는 Family, Sweet Family”


각자의 일터에서 하루를 충실하게 보낸 뒤, 집으로 돌아가면 나를 맞아주는 이가 있다는 것은 정말 축복 그 자체입니다. 겨울이 되면 더욱 그 소중함이 크게 느껴지지요. 추운 손을 후후 불며 도착한 집. 그리곤 현관에 불을 탁-! 켰을 때 비로소 마음도 환하게 밝아지는 느낌이 들어요.


코로나, 미세먼지, 이상기후, 취업난, 경제난 등 무수한 위협과 위험이 있어도 가족이 있기에 저의 인생은 일단 무사한 겁니다. 제가 딸로서, 또 아내로서 살아가는 가족과 사랑을 주고받으며 한층 더 깊은 ‘인간’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저에게 가족은, 이 글을 쓸 수 있게 하는 가장 큰 원동력입니다. 시간이 지나며 나의 역할은 딸과 언니에서 아내와 엄마로, 나아가 할머니로도 바뀔 텐데요. 가족 구성원의 역할을 두루두루 경험해 본다는 것, 그로 인해 나의 엄마와 딸을 모두 이해해 볼 수 있다는 것. 세월의 흐름이 슬프지만은 않은 이유입니다.

작가의 이전글 남편이 땅을 사니 배가 아프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