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가구는 뭣에 쓰는 물건인지 결론이 없어야 한다.
우리는 한때 어린이었다!
이 사실을 일깨워 ‘한때 어린이’었던 우리에게 선물을 주고 간 이가 있다. 환경운동가이자 작가인 레이첼 카슨이다. 그녀는 세상을 떠나기 얼마전 <센스 오브 원더sense of wonder>라는 책을 통해 말했다. ‘어린이나 어린이를 인도할 어른에게서나 자연을 아는 것은 자연을 느끼는 것의 절반만큼도 중요하지 않다.’ 그녀에게 ‘원더’란 우리 주변의 모든 자연물에 대한 호기심이다. 주변의 생물과 무생물을 애정으로 바라보고 친구처럼 여겨 궁금해 하는 것. 아는 만큼 궁금하고, 아는 만큼 사랑한다. 세상을 무심이 아닌 유심으로 바라보는 것. 그건 한때 어린이였던 우리가 가졌을 그 감성을 회복하는 일이다. 이 ‘원더’야말로 아동 가구 디자인을 결정하는 결정적 열쇠다. 가구로 아이의‘원더’를 자극할 수 있다면 참 좋을텐데… 이게 화두다.
왜 지금 아이 방에 놓일 가구를 얘기해야 하는 걸까.
우리는 안다. 바이러스 대공황 속에 놓인 2021년이 인간의 이기적 족적 때문이란 걸. 아이의 마음으로, 그 순결한 호기심으로 자연을 바라보지 않고 그저 소유하고 이용하려 한 지난 시간. 산업화 이후의 그 시간들이 쌓여 지금 재앙의 비가 내린다는 것을. 자연은 2백 년 남짓 타오른 인간의 물욕과 과오를 ‘결국, 바이러스’라는 한 문장으로 정리해 버렸다. 아무 죄가 없지만 이 재난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아이들은 오늘도 무기력하게 적응해 간다. 그렇게 24시간 마스크를 입게 된 아이들은 갈 곳이 없다. 그래, 갈 곳이 없다. 대책을 세워야 한다. 집안이 학교이자 놀이방이 된 그들에게 ‘센스 오브 원더’의 빛이 비추이도록. 산으로 들로 거리로 뛰쳐나가 자연과 대화할 기회를 놓친 아이들에게 어른들이 뭐라도 해야 한다. 그중 하나가 어린이들의 방에 놓인 물건들을 다시 보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와서야 가구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 어린이들의 놀이, 안식, 창의의 대상이 되어야만 하는 물건이다. 바위와 모래가, 꽃이랑 나무가 하던 ‘원더’의 역할을 나눠가질 수 있는 가구. 아쉽지만 그래야만 한다.
이전의 우리는 어땠을까.
말해 뭐하나. 어른인 우리는 아이들을 그저 가르치려 들었다. 지식과 규범을 주입해 최대한 어른과 비슷하게 만들겠다는 의지를 불태웠기에 아동 가구의 발전은 늦었다. 19세기까지는 아동 가구에 대한 개념조차 없었다. 그러다 1920,30년 대 유럽에서 어린이의 신체 발달을 고려한 제품 디자인이 시작됐다. 이후 백 년. 아이의 마음을 읽은 디자이너들의 작품이 속속 탄생하곤 했지만 상용화가 된 건 극히 일부다(다행히 안전과 친환경 소재 부분은 눈부신 발전이 있었다.). 우리가 아는 바대로 어린이 가구는 대충 다 비슷비슷하다. 어른들이 보기에 예쁘고, 수납이 용이한 것으로 통일되다시피 했으니까. 지난 수십 년 간 아동 가구엔 학습적 기능과 인테리어 기능이 주가 됐다. 거북목을 예방하는 기능적 의자와 창의를 가장한 화려한 컬러로 장식을 더했다. 핑크와 블루로 이분화된 성별도, 디즈니 동화 속에 나올 법한 테마파크 형 디자인도 여전했다. 그런 디자인이 꼭 나쁘다는 것이 아니지만 그게 최선이었냐고 말한다면 고민없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답은 언제나 있었다. 그저 미루고 있었을 뿐.
이젠 그 답안지를 펼쳐 합리적 생산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탈리아의 대표 디자이너인 브루노 무나리의 지난 작업들은 교본과 같다. 미래파 화가로 활동하다 산업 디자이너로 명성을 떨치던 그는 어느 날 뜬금없이 동화책을 디자인한다. 1945년, 그의 나이 서른 일곱. 다섯 살 아들 알베르토를 위해서였다. 아이의 마음으로 보는 책을 구하기 어려워서 였다고 한다. 그냥 집에서 함께 볼 요량으로 만든 것이 몬다도리 출판사에 의해 발간된 후 그의 아동용 디자인은 점차 범위가 넓어졌다. 책뿐만 아니라 장난감, 가구 등으로 진화했다. 대표적인 책 중 하나가 바로 당신 이 아는 그 <ABC>다. 알파벳을 아이들의 놀이 카드처럼 시각화 한 것. 이전까지는 아무도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었다. 훗날 노인이 된 무나리는 이렇게 말했다. “너무 늦기 전에 아이들은 제멋대로 생각하고, 상상하고, 꿈을 꾸고, 창조적인 이가 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의 이런 생각이 고스란히 드러난 것이 바로 1970년 디자인한 어린이 가구 ‘아비타콜로(Abitacolo)’다. 높이206cm, 넓이 194cm에 이르는 이 거대한 알루미늄 메쉬 구조물은 언듯 놀이터의 정글짐처럼 보인다. 이 물건은 책꽂이고 선반이고 조명이며 벤치인데, 무엇보다 침대다. 아니, 무엇보다 책상이다. 아니, 무엇보다 놀이터다. 아니 무엇보다 다락방이다. 이층 구조인 아비타콜로는 양 측면의 파이프가 계단으로 이용된다. 제공되는 나무판은 원하는 높이에 설치해 책상으로, 매트리트를 올려 침대로 사용하기도 한다. 아이들은 원하는 대로 용도를 바꾸며 이 물건을 꾸미면 된다. 여기서 놀고 먹고 읽고 숨고 쉬고 잔다. 여기에 자신만의 아지트를 완성한다. 정답이 없는 공간이자 가구다. 그가 발표한 <읽을 수 없는 책 libro illeggibile>처럼 이 가구도 어른들은 읽을 수 없는 물체가 되어 진화하는 것이다.
사실 어린이가 원하는 가구는 아예 없을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가구란 무용한 것이니까. 책장, 책상, 침대, 옷장 등 할 일이 정해진 가구는 도시화된 어른들의 전유물이다. 호기심을 타고 난 아이들에게 한 자리에 묵묵히 서있는 단정한 수납 가구(그 색깔이 암만 화려해도)가 대체 무슨 소용일까. 아이들에겐 수납장 안의 물건이, 그 여닫음의 감각이, 형태의 신기함이 먼저다. 그래서 아이들이 마주할 가구는 아비타콜로처럼 빈 도화지 같은 구조물일 때 빛을 발한다. 의외의 것을 만들어내는 데 아이들은 천부적이다. 돌맹이 몇 개, 나뭇가지 몇 개로도 하루 종일 새로운 놀이 도구를 만들어 내는 게 애들이다. 아이들이 알아서 용도를 정할 수 있는 가구는 살아있다. 키와 생각이 자라면 가구도 자란다.
아이들은 작은 걸 본다. 어른들은 보지 못하는 작은 벌레들의 움직임을 보고 웃는다. 아마 어른들은 중요치 않다고 간과하는 작은 디테일에 아이들은 정신을 팔 것이다. 스마일 문이라는 국내 브랜드의 옷장은 달처럼 동그랗다. 문짝에는 손잡이가 9개나 달렸다. 9개의 손잡이는 아이의 키가 자라나면서 손잡이 위치 역시 달라져야 한다는 의미를 담았다. 이런 기능은 어른들의 뇌에서 나온 기능적 효용이지만 아이들에겐 9개의 작은 가지가 신기하고 재밌는 놀잇감이다. 이 작은 손잡이들을 보고 꼼지락꼼지락 놀이를 기획하고 또 웃는다.
놀이를 부르는 가구는 얼마나 감사한가.
아이의 가구는 놀잇감이 될 때 빛을 발한다.
결국, 결론이 없는 가구, 아이의 생각과 함께 변신할 수 있는 가구.
방향성은 그렇다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