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더 랍스터(The Lobster, 2015)>를 보고
감독, 요르고스 란티모스
당신의 슬픔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신만큼 슬퍼야 한다.
당신만큼 아파야만 당신을 이해할 수 있다.
<더 랍스터>는 이러한 아픔을 통해 완성되는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다.
영화의 서사는 주인공 '데이비드'가 아내에게 버림받는, 그러니까 이혼 '당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한다.
버림받은 데이비드는 이별한 사람이라면 묵어야 하는 호텔에 들어간다. 강아지가 되어버린 자신의 형과 함께.
시작부터 이 영화가 그려내는 세상은 부조리한 규칙으로 가득하다.
외톨이들을 위한 '호텔', 연인들을 위한 삶이 펼쳐지는 '도시', 그리고 문명사회의 규칙을 따르지 않고 영원히 외톨이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숲'.
이 세 개의 공간에는 서로 다른 규칙이 존재하지만, 인간의 자유 의지를 강하게 억압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모든 외톨이들은 '호텔'에 들어가야 한다. 45일 내에 짝을 찾지 못하면 남은 삶을 동물로 살아가야 한다.
같은 처지의 짝을 찾아 결혼까지 인정받게 되면, '도시'로 떠날 수 있다.
이 규칙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숲 속에 숨어서 생활한다. 숲 속에서는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도와선 안 된다.
호텔의 사람들은 대부분이 중년의 나이, 혹은 이미 이별을 겪은 사람들이다.
젊음과 새로움 그 자체로 빛나는 청춘이 아니라 이미 뜨거운 사랑과 쓰라린 이별을 겪은 이들은, 사회에서 결여된 존재로 비추어진다.
타인보다 더 완벽해지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이미 낙오자라는 도장이 찍혀 있는 그들은 완벽해질 수도 없거니와, 그런 척 하는 것이 더 부자연스럽다는 것을 알기에) 더 쉬운 방법인 ‘공통의 결핍’을 갖는 일에 몰두한다.
관객인 우리는 자연스럽게 인물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결핍을 기억한다. 이를테면, '코피를 잘 흘리는 여자', '절름발이 남자', '비정한 여인' 등.
절름발이 남자는 코피를 잘 흘리는 여자에게 접근한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는 몰래 수영장 바닥에 코를 박곤, 여자에게 ‘코피가 나네요. 종종 이래요.’라고 태연하게 이야기한다.
그의 결핍은 다리를 저는 것이지만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 결핍을, 그리고 상대방에 대한 이해를, 나아가 사랑을 연기한다.
하지만 가짜 사랑에 대한 벌은 그 어떤 것보다 가혹한데, “누구도 원치 않는 동물이 되”는 것이다. 동물이 되어서도 자신의 짝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공포로 작용한다.
(이 점에서 이 영화는 평생의 짝을 찾고자 하는 열망, 그러니까 사랑이 모든 사람의 공통된 꿈이라는 것을 전제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을 아름다운 것이 아닌, 인간의 연약함으로 그려낸다.)
동물이 되기 이틀 전, 주인공 데이비드는 감정이 없는(폭력에서 희열을 느끼는)여자와의 만남에 성공한다.
그는 여자와 같은 결핍을 연기하기 위해 폭력과 고통, 슬픔, 기쁨, 분노를 외면한다.
(끔찍하지만 창문에서 뛰어내려 온몸이 꺾인 여자를 보고도 아무렇지 않은 척 한다.)
하지만 자신의 형을 잔인하게 죽인 여자 앞에서 가짜 사랑은 무너진다.
거짓 감정을 발각당한 그는 감정이 없는 여자에게 마취총을 쏘고 동물로 변하게 만든 뒤, 호텔 밖으로 도망친다.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이 그려내는 세상이 그렇듯, 숲의 규칙 역시 묘하게 뒤틀려있다.
반대되는 규칙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호텔의 사람들과 숲의 사람들은 각자의 생존을 위해 서로를 공격한다.
호텔의 사람들은 숲의 사람들을 사냥하는데, 사냥에 성공하면 동물로 변하는 시기를 늦출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궁극적으로 호텔 안의 모든 가짜 사랑이 무너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른다.
외톨이들의 숲으로 도망쳐 온 데이비드 역시 사냥을 당하던 중, '근시 여자'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한다.
그들은 숲 속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대화를 나눈다.
“언제 근시가 됐어요?”
“16살 때. 당신은요?”
“12살 때.”
“처음 썼던 안경은 어떤 거였어요?”
“기억이 안 나요.”
“난시도 있어요?”
“네.”
"..."
“등에 연고 발라줄까요?”
그녀의 호의는 데이비드와 아픔을 공유할 수 있다는 데에서, 그리고 본인이 그에게 위로를 줄 수 있다는 것에서 비롯된다. 단순한 기브 앤 테이크를 넘어선 위로이자 사랑이다.
(구해 준 대가로 토끼고기를 달라는 예전의 태도와는 확연하게 다르다.)
은밀한 밤, 호텔의 사람들처럼 숲의 사람들도 총과 무기를 챙겨 호텔의 연인들을 기습한다.
그들의 목적은 하나다. 연인들의 가짜 사랑이 얼마나 깨지기 쉬운 것인지 '알려주는' 것.
(빈 총으로 아내를 쏘라고 하는 것이나, 친구의 아내에게 그의 코피가 가짜라고 말하는 것)
이들은 이런 방식을 통해 부조리한 사회의 규칙에 저항한다.
(꾸며진)사랑은 가짜이므로 불필요하며, 인간은 홀로 생존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 한다.
호텔 안에서의 끔찍한 가짜 사랑을 보다 보면 이 뒤틀린 행동은 합리적인 것'처럼' 보인다.
덫에 걸린 동료를 돕지 않고 떠나는 모습도, 춤은 혼자서 춰야 한다는 규칙도.
“자기 무덤은 스스로 준비해야 해. 누군가 묻어줄 거란 기대는 마.”
레아 세이두가 연기한 외톨이들의 리더는 데이비드와 근시 여자가 서로 사랑한다는 것을 눈치채고, 근시 여자를 장님으로 만들어버린다.
앞을 볼 수 없게 된 여자에게 리더는 어떠한 감정도 없이, “너를 위해 안내견을 구해줄게”라고 이야기한다. (다른 감각이 더 깨어날 것이라며 오히려 잘 되었다는 듯 이야기하기도 한다.)
혼자 살아나갈 수 없는 그녀에게 어떠한 대안을 제시하는 것. 그것이 외톨이들의 세계가 말하는 선의이다.
사랑은 무엇이며 정의는 무엇인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자신이 장님이 되었다고 고백하며 미안해하는 여자에게 데이비드는 위로를 건네며, 대신 다양한 물건을 가져와 그녀가 직접 만지며 알아낼 수 있도록 도와준다.
테니스공을 만지며 키위라고 말하는 그녀에게 '정답'이라고 이야기하며, 그녀가 모르는 모든 것들을 가르쳐주겠노라 약속한다.
“울지 마. 울면 눈에 더 안 좋을 거야. 해결책이 있겠지.”
숲에서 도망쳐나온 그들은 연인들만이 살아갈 수 있는 도시로 향한다.
여자와 함께 카페에 도착한 데이비드는 마지막으로 여자의 옆모습, 손가락, 팔꿈치, 그리고 미소를 차례로 눈에 담는다.
그리곤 스테이크 칼을 들고 화장실로 간다.
그는 눈을 찔렀을까, 혹은 도망쳐 결국 랍스타가 되었을까. 우리는 알지 못한다.
영화 초반 데이비드의 아내가 그를 버렸던 것처럼, 데이비드 역시 장님 여자를 언제든 버릴 수 있다.
이별의 경험이 있는 데이비드 버림받는 일의 비참함을 안다.
하지만 여자를 사랑하는 일, 평생 그녀와 함께 사는 일에는 자신의 눈을 스테이크 나이프로 찔러야만 하는 것과 같은 용기가 필요하다.
1. 영화를 다 보고 포스터를 보니, 영화의 모든 이야기가 이 안에 담겨 있다는 것을 느꼈다.
2. 하지만 네이버 영화 '기본정보'의 줄거리는 이 영화를 유쾌한 이야기처럼 보이게 만드는데, 좀 아쉽다.
3. 콜린 퍼렐은 다양한 마스크를 갖고 있는 배우다. <더 랍스터(2015)>의 콜린 퍼렐, <신비한 동물사전(2016)>의 콜린 퍼렐, <킬링 디어(2017)>의 콜린 퍼렐 모두 다 다른 얼굴이다. 매년 다른 사람이 되는 게 신비하다.
0. 이 영화는 총 두 번 보았는데, 첫 번째는 2021년 여름 혼자였고 두 번째는 2023년 1월 친구와 함께였다.
어떤 영화가 안 그렇겠냐마는, <더 랍스터>는 어떤 마음으로 감상하느냐에 따라 느껴지는 메시지가 많이 달라지는 듯 하다.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이 자주 다루는, 인간이 거스를 수 없는 초월적인 규칙(<킬링 디어>, <송곳니>와 같은)에 대한 부조리를 느낄 수도 있고
그가 그려내는 다양한 인물을 보며 사랑의 본질에 대해, 나아가는 인간 존재에 대해 고민할 수도 있다.
좋은 영화는 물음표를 많이 던지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나에게 좋은 영화였다.
이 글의 초안은 첫 번째 감상 직후에 썼고, 최종본은 두 번째 감상 후 오랜 시간의 퇴고를 통해 완성되었다.
재작년에 썼던 감상을 곱씹어보며 2021년 여름의 나를 마주했는데, 사랑을 대하는 나의 태도가 1년 반 전에 비해 많이 성숙해졌음을 느낀다.
다행이다. 치열하게 살아내길 잘 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