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 엄마가 캐나다를 다녀가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손바닥만 한 집을 한국돈으로 200만 원 가까이 월세로 내고 있다는 말이 마음에 걸렸는지 고향에 있는 작은 밭을 팔아 돈을 보태어 줄 테니 집을 살 수 있으면 사보라고 했다.
아직은 너무 젊은 엄마라 자식들에게 뭘 물려주기도 애매한 때였지만 그래도 먼저 도와주신다면이야 감사히 받아서 집을 사고 나중에 꼭 갚아드려야겠다는 마음먹으면서 들뜬 마음으로 준비를 했었다. 우리가 모아둔 돈 조금에 엄마가 보태어 줄 돈을 합치면 그럭저럭 지금 사는 집 정도는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손바닥만 해도 월세 내는 것보다는 모기지 갚는 게 훨씬 남는 장사니까.
엄마는 정말 돈을 해주기로 마음을 먹었는지 고향에 내려가 부동산에 밭을 내놓고 왔다고 했고 대략 어느 정도 값은 받을 수 있을 거라고 귀띔도 해주며 일은 일사천리 진행되는 것 같았다. 꿈에도 생각지도 못했던 아니 한참 뒤, 그것도 5-6년은 훨씬 뒤에 계획할 수 있을 만한 캐나다에서 내 집 사는 일을 지금 할 수 있다니 감사하고 행복한 감정까지 들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부터 엄마와 통화를 할 때마다 이상하게 돈 얘기는 쏙 들어가고 또 남동생 얘기를 줄줄이 늘어놓기 시작했다. 분명 내가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도 돈 얘기가 나올법하면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전환하고 어떻게든 말을 돌리면서 엄마의 밭을 판 돈의 행방은 온데간데없어 보였다.
그때 감을 차리긴 했다.
'아, 또 물 건너갔구나.'
돈이란 게, 그것도 내가 직접 벌지 않은 돈은 내 수중에 들어오기 직전까진 절대 희망을 걸지 말아야 하는 거라지만 먼저 물어본 것도 아니고 엄마가 먼저 제안(?) 한 것이기에 이렇게 손바닥 뒤집듯 날아가 버릴 줄은 솔직히 예상 못했다.
엄마 생각에도 아무리 이 얘기 저 얘기로 돌려도 이제는 말해줘야겠다는 타이밍을 직감했거나 더 이상 실토를 미룰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여하튼 엄마의 입에서는 예상을 전혀 빗겨나가지 않은 동생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나왔다.
변변한 직업 없이 살고 있는 동생이 하고 있는 배달 일을 제대로 해보고 싶어 해서 사업자용 트럭을 사줘야 될 것 같다고 했다. 그냥 트럭이 아닌 개인 사업자용 트럭은 무지 비싸다는 말을 꼭 덧붙이고 강조하며.
어려운 형편에도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았던 동생은 서른이 훌쩍 넘긴 나이에도 쥐꼬리만큼 남은 부모 찬스를 참 잘도 당겨 쓰는 참 요령 있는 녀석이다. 엄마가 조금 여윳돈이 있다는 사실을 흘렸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결국 낚아채어 가는 데 성공했고 나는 눈앞에서 또 놓쳐버렸다.
눈에서 멀리 그럭저럭 살고 있는 딸내미보다는 눈앞에서 어렵게 살고 있는 자식이 더 안타까운 거야 당연한 일이겠지. 그렇겠지만, 여러 번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참 서운한 것은 어쩔 수가 없더라. (시간이 아주 많이 지나서 더 큰 일을 막느라 그 돈을 쓸 수밖에 없었다는 사연을 듣긴 했지만 뭐 어쨌든 내 운은 항상 동생 놈이 인터셉트를 해가는 기분은 저버릴 수가 없다.)
나는 다행인지 어쩐지 자식이 하나라 누구를 더 해주고 덜 해주면서 마음 속상할 일이 없어 백 프로 공감은 못해주겠지만 그래도 자식일인데 철천지 원수인 부모가 아니고서야 모른 척 살아갈 수 있을까. 그렇게 또 속상함을 속으로 달래었다. 그냥 이번에도 그렇게 넘어갔다.
'내 운이 아니었겠지.' 하고 나를 탓하며.
누가 보면 내가 대단히 잘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뭐 하루하루 생활비 걱정하며 어렵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니라 세상 평범하게 살아가는 우리가 아빠, 엄마 눈에는 걱정이 덜 가는 고마운 자식일 것이다.
노후 준비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나이 드신 부모님의 자식 걱정에 마흔이 넘어가는 내가 굳이 한 스푼 더 보태어 줄 필요는 없지 싶어 노력하고 있지만 서운하고 섭섭하고 한 번씩 차 오르는 건 어찌할 수가 없다.
알아서 잘 사는 자식, 걱정 안 끼치는 자식, 마음으로 든든한 자식 역할만 도맡아 했던 지난 40여 년이 몽땅 후회가 될 때도 있다. 부모님의 눈에 들고 싶어 열심히 공부했고, 집안일도 잘 도우고 어린 동생도 잘 챙겨가며 살아왔는데 결국엔 끝까지 나는 알아서 잘 크는 자식이라 되려 신경을 덜 써도 되는 관심받고 싶어 안달이 난 것 같은 미운 40살이 되어 버린 것 같다.
앞뒤 사연 없이 이 글만 읽는다면 돈 안 보태어 준다고 화가 난 못난 딸자식이 앙심을 품고 쓴 글 정도로 보일 수 있겠지만(뭐 그런 면도 없진 않지만) 얼마 전 아빠와 했던 통화로 부모님의 마음에 그려져 있는 나는 어떤 모습이고 얼마만큼 차지하고 있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항상 혼자 있는 아빠 걱정에 티브이에 나오는 할아버지들만 보아도 눈물이 나고 하루라도 빨리 더 안정되어 캐나다에 모시고와 살고 싶다는 생각으로 정말 열심히 살아왔는데 전화 밖으로 나오는 아빠의 미래 계획에는 나는 전혀 없었다.
"나는 이제 다른 거 다 필요 없다. 지금 하고 있는 일 조금 더 잘 키워가 네 동생 가게 하나 차려주고 은퇴하는 게 목표다."
".............."
그랬구나, 뻔한 노후 자금에 팍팍하게 살 아빠가 걱정되어 은퇴하시면 다달이 드릴 용돈을 계산하며 그때의 나의 소득을 올리기 위한 생각만 하고 살았던 나 스스로가 참 바보 같게 느껴졌다. 나에게 돌아올 재산, 콩고물이 없어 아쉬운 게 아니라 아빠, 엄마의 걱정에는 아직까지도 동생뿐임이 너무나도 허무해서 눈물까지 났다.
환갑이 넘어서까지 노후보다는 자식 걱정에 한 푼이라도 더 벌려는 부모님의 모습이 마음 아프면서도 한편 자식의 독립을 끝까지 받쳐주지 못하는 답답한 모습에 한숨이 난다.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하고 살고 있는 아픈 손가락인 자식의 현실이 모두 부모님이 만들어 놓은 결과로 받아들이시는 것처럼.
부모 자식 간의 사랑에도 쌍방이 힘든 일일까. 부모님의 관심이 목표라면 너무 열심히 착하게 살지 말았어야 했나.
점점 나이 들어가는 부모님을 놔두고 이역만리 타국으로 와버린 주제에 너무 큰 욕심을 내었던 것일까. 지금 당장 몸이 편찮으셔도 달려갈 수 있는 자식은 동생 녀석이라 어쩌면 당연한 처사인데 말이다. 몇십 년을 그렇게 살아왔는데, 이제 포기할 만도 한데 불혹을 넘기면서도 참 서운하고 서운하다.
왜 하필 덜 아픈 손가락으로 태어났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