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알못이 슈베르트에 감동하는 순간
아빠 차에 타면 늘 클래식이 흘러나왔다. 조수석에 앉아 아주 조금은 친근한 독주곡부터 단출한 실내악, 웅장한 스케일의 협주곡과 교향곡까지 다양하게도 들었지만 내게 클래식은 좀처럼 읽히지 않는 어려운 책 같았다. 나긋한 목소리의 클래식FM 진행자가 어느 곡의 몇 악장이나 작품번호 몇 번을 들려주겠다는 말을 할 때면 외계어를 듣는 기분이었다. 락 음악에 빠져있던 청소년기에는 아빠의 음악 취향이 참 고상하다 못해 고루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피는 못 속인다더니. 어느 날 나는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연주하는 쇼팽의 영웅 폴로네이즈를 듣게 되었고 거대한 클래식의 일각이 내 마음의 수면을 뚫고 올라오는 지각변동의 순간을 맞이하게 됐다.
2015년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을 하며 '한국인 최초', '최고 연주상' 같은 이목을 끄는 키워드가 잔뜩 담긴 기사의 주인공이 되었던 그는 클알못인 내가 보아도 대단한 연주력을 지닌 듯하다. 섬세하면서도 대담하고 정석적이다가도 독창적인 연주로 듣는 사람을 강하게 끌어당긴다. 조성진의 연주를 들으며 가장 많이 했던 생각은 '이 곡이 이렇게 아름다운 곡이었나?'였다. 그는 유수한 연주자들이 몇 백 년에 걸쳐 연주하고 또 연주했을 작품들을 본인만의 해석으로 들려주며 새로움을 맛볼 수 있는 기회를 선사한다.
올해 5월 슈베르트, 베르크, 리스트의 작품이 담긴 앨범 <The Wanderer>를 발매한 그는 최근 전국을 돌며 리사이틀을 개최하고 있다. 나는 운이 좋게도 티켓팅의 전쟁 속에서 표를 구해 실연을 볼 수 있었다. 공연장에서의 조성진은 실로 대단한 연주와 무대매너로 관객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는 다소 낯선 시마노프스키의 Masques를 프로그램에 선보이기도 했는데, 관객으로서 꽤나 어렵게 느껴지는 곡이었지만 가고자 하는 길에 대한 그의 뚝심이 느껴져 오히려 반가운 마음마저 들기도 했다. 30분에 육박하는 리스트 피아노 소나타를 앵콜로 연주하기 시작하는 그의 모습을 마주했을 때는 정말이지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The Wanderer>는 앨범명에서도 엿볼 수 있듯 슈베르트의 <방랑자 환상곡>이 메인 테마로 자리 잡고 있다. 슈베르트 스스로도 '이 따위 작품은 악마나 연주하라지'라는 말을 남겼다는 이 곡은 연주자의 손가락을 보고만 있어도 엄청난 테크닉과 지구력을 요하는 곡임이 느껴진다. 총 4악장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인생 따위 속세에의 얽매임 없이 자유롭게 살아가리라는 방랑자의 기백이 느껴지다가도, 마음 둘 곳 하나 없이 본질적인 고독의 늪에 빠진 한 사람의 슬픔이 느껴지기도 한다. 내게는 노랫말 하나 없는 연주곡에서 서사가 느껴지는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게 해 준 작품이기도 하다.
취향의 지각변동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은 경험을 통해 나름의 알고리즘을 만들어 가기 때문이다. 삶의 시간이 쌓여 갈수록 자연스럽게 좋아하는 것만 보고, 듣고, 읽고, 먹게 되는 것이 사람이다. 하지만 몇십 년 만에 모습을 드러내는 블루문처럼, 살다 보면 새삼스럽게 마음에 싹을 틔우는 무언가가 찾아오기도 한다. 마치 용기가 필요할 때 꺼내 듣는 조성진의 영웅 폴로네이즈처럼. 아직 환상곡과 소나타를 구분하지 못하는 내게도 클래식이 일상의 즐거움이 되는 날이 올 수 있을까? 모르긴 몰라도 내년에도 그가 한국에서 리사이틀을 연다면 얼마든지 티켓팅 전쟁에 다시 참여하게 될 것 같다.
2020년 11월 낙엽이 떨어지는 흐린 날에
방랑자 환상곡을 들으며 K가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