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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제주 Jun 03. 2020

고요한 도순다원

혼밥의 아쉬움

   제주에서 얻는 작은 선물을 소개하고 시작하고자 한다. 원래의 목적지를 찾아 헤매다가 우연히 발견한 해변의 매끈매끈한 조약돌 같은 정경이다.

이 절경이 사진으로는 완벽히 표현되지 않아 아쉬울 뿐이다.(좌측부터 산방산, 용머리해안, 그 뒤로 희미하게 보이는 한라산, 바다 위의 형제섬, 우측의 송악산)

 제주 서남부의 알뜨르 비행장에서 섯알오름 학살터를 지나 올레길을 따라 올라가면 일제가 태평양 전쟁 때 만든 고사포진지가 나온다. 안내지도에는 이 곳에서 조금 더 가면 갱도진지가 나온다고 되어 있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갱도진지가 나오지 않았다. 한참을 비슷한 자리를 맴돌다 결국에는 찾지 못했는데 나중에 보니 3차원의 입체를 2차원의 평면도에 표시하다 보니 생긴 문제였다. 지도에는 고사포진지에서 조금만 더 가면 갱도진지가 나온다고 표시되어 있지만, 고사포진지는 오름의 꼭대기에 있고 갱도 진지는 절벽 아래에 있으니 못 찾을 수밖에... 그것도 모르는 순진한 여행자는 고사포 진지를 넘어 갱도진지를 찾기 위해 송악산 방향으로 하염없이 걷게 되었다.

(좌) 저멀리 가파도와 마라도가 보이는 오름 정상에 있는 고사포진지 (우) 그 절벽아래 위치한 갱도진지

 그러던 어느 순간 여행자는 한 폭의 그림을 마주하게 된다. 파란 바다와 형제섬, 산방산, 용머리해안, 저 멀리 한라산이 같이 보이는 절경. 이 풍경을 보고 나도 모르게 주저앉아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이런 풍경을 보고 그냥 지나치면 그게 여행자의 자세는 아니지 않은가. 여기서 하루를 보내도 전혀 아깝지 않은 기분. 아 이 절경만으로도 이번 제주와의 만남은 전혀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사진을 배우고 싶을 때는 보통 이런 때다.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는 환상적인 풍경인데 이걸 나의 사진 기술로는 온전히 전달할 수가 없음이 너무 애석할 뿐이다.


 


무릉도원인가 도순다원인가


 협재에서 중문 관광단지로 가는 길목에 사람들에게도 익숙한 오설록 티 뮤지엄이 있다. 그 앞을 지나가면서 얼핏 보기만 해도 주차장에 가득한 차량들로 사람들이 미어터지는 게 느껴진다. 그런데 그 바로 옆 동네로 시선을 조금만 돌려보면 한라산을 배경 삼아 푸른 녹차밭이 펼쳐진 도순다원이라는 곳이 있다. 이곳은 오설록  티 뮤지엄처럼 앉아서 쉴 수 있는 카페나 관광객을 위한 편의시설은 전혀 없으나 그런 한가함과 꾸미지 않음이 이곳의 매력이다.

 도순다원 입구, 들어가도 될지 망설이게 만든다. 빨간색으로 떡하니 쓰여있는 유명한 경비업체  S사 이름은 마치 경고문구 같다

 도순다원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제주 남부를 관통하는 1136번 도로를 달리다가, 아주 좁은 골목길을 따라 올라가야 한다. 이 길로 계속 올라가면 뭐가 나오긴 하는 것인가, 이대로 가다 보면 남의 집 대문이 나오고 길이 끝날 것 같은 곳으로 한참을 들어간다.


한참을 두리번거리며 들어가 보면 커다란 표시가 없어 자칫하면 지나칠 것 같은 곳, 여기가 입구 같긴 한데 들어가도 되나? 그냥 사유지 아닌가? 들어가면 경비원이 나와서 관계자 외 출입금지라고 말할 것만 같은 곳으로 들어가야 한다.(제주관광공사 홈페이지에 관광명소로 나와있으니 들어가도 되는 곳이 맞는 것 같긴 하다) 들어가서도 어? 여기 나름 유명한 곳이긴 한데 왜 이렇게 사람이 없지? 맞게 온건가? 이렇게 계속 들어가도 되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만큼 들어가서, 여기만 해도 충분히 녹차밭이 넓은데? 저쪽으로는 진짜 가면 안 될 것 같은 건천(乾川) 위를 지나면 드디어 인터넷에 많이 돌아다니는 한라산의 설경을 배경으로 다원이 드넓게 펼쳐진 장소를 만날 수 있다.

저 멀리 바다가 보인다.

 저 멀리 바다가 보이는 다원의 끝까지 갈 동안 다원 직원은 고사하고 관광객 한 명 보지 못했다. 갑자기 주민들이 증발해 버린 미스터리의 마추픽추처럼 사람의 그림자를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내가 사유지에 무단침입을  한 것이 아닌가 라는 의문을 떨쳐버릴 수 없다. 그럼에도 다원은 주말 당직사관의 두발 점검을 마친 후의 군인의 머리처럼 매우 깔끔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반듯하게 정리된 다원의 모습, 강한 햇빛 아래 사진을 찍으면서 사진을 잘 찍고 싶다는 생각이 계속 들게 만들었다

 너무 고요해서 이상하기도 하고 평화롭기도 한 곳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현대인은 살아가면서 아주 많은 소음을 경험하게 된다. 사무실에서는 누군가 항상 대화를 하고, 키보드와 마우스 소리가 멈추질 않고, 아주 조용한 날에도 컴퓨터가 윙윙거리며 돌아간다. 거리를 돌아다니면 자동차 소리가 없는 곳이 없고, 집에 돌아와도  TV, 스마트폰의 소리가 우리를 반긴다. 심지어 아무 소리 없는 적막감이 싫어  TV나 라디오를 켜 놓는 사람도 있다.


 그런 현대인이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는 고요한 대자연을 마주했을 때는 적막감이 아니라 평화로움이 느껴진다. 귀가 정말 편안해지는 느낌. 이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노트북이 윙윙거리고, 이에 질세라 작은 냉장고도 잠에서 깨어나 존재감을 알리고 있다. 다원의 평온함이 그리운 지금이다.

 

또 다원에 서서 외로이 솟은 백록담을 보고 있으면 백록담이 너무 비현실적으로 가깝게 보이는 것도 신기했다. 분명 남한의 최고봉인데 일반적인 육지의 산처럼 비교대상이 될만한 봉우리가 없이 백록담 홀로 우뚝 솟아서 그런가 하는 생각이 든다.

구름에 반쯤 가린 저 봉우리가 백록담이다



도순다원의 상징과도 같은 눈 덮인 백록담과 잘 정리된 다원(출처 : 제주 관광공사 홈페이지)




혼밥의 아쉬움


 제주도에서 혼자 여행을 다니면 여러 가지 메뉴를 시켜서 하나씩 맛을 보는 호사를 누리기가 어려운 경우가 많다. 이건 비단 제주여행만의 문제는 아니고 혼자 다니는 여행에서 자주 마주하게 되는 문제일 것이다. 일단 갈치, 흑돼지 같이 2인 이상 주문이거나 몇 인분 단위가 아닌 소·중·대로 구분되는 경우에는 내가 프로 먹방러에 대식가가 아닌 이상 주문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렵다. 아니면 괜찮은 식당을 만났을 때 여러 가지 메뉴를 맛보고 싶으면 2가지 메뉴를 시켜서 먹어보면 선방이다.

       

비빔국수와 고기국수를 모두 먹어보고 싶다면 혼자서 두개를 시켜먹을 수 밖에 없다.

 얘기가 나온 김에 음식점 얘기를 계속해보자. 관광지든 일상에서든 어느 식당은 유명세에 비해 맛을 보면 도통 유명한 이유를 알 수 없는 식당이 있는가 하면, 유명한만큼 이름값을 하는 식당이 있고, 마지막으로 왜 유명해지지 않았는지 의문을 가지게 되는 식당이 있다.

 도순다원을 다녀온 뒤 산방산 근처에서 방문한 이 식당은 원래 가려던 식당이 문을 닫았고, 다른 식당을 찾다가 워낙 한적한 동네여서 문을 연 식당조차 별로 없는데 날은 어두워져 가는 바람에 숙소 근처에 문을 연 식당이 있길래 밥은 먹어야 하니 별  기대 없이 찾아 들어갔는데 정말 인생 식당을 만나버렸다.

이게 만원 1인분이다.

 메뉴판에도 없는 저녁 정식 메뉴가 1인분에 만원인데 말도 안 되게 푸짐한 반찬에 수육에 생선까지 나왔다. 김치찌개도 한 뚝배기 나오는데 찌개만 1인분에 만원 받고 팔아도 될 정도의 큼직한 고기가 한가득 들어가 있었다. 심지어 수육을 반쯤 먹으니까 사장님이 오셔서 고기를 더 썰어드리냐고 물어보기까지 하셨고, 더 이상 아무것도 먹을 수 없을 정도로 배부르게 먹고 식당을 나갈 때는 바구니 가득 쌓여있는 귤을 “많이” 가져가라고 하시는 게 아닌가(물론 겨울에 제주에는 귤이 워낙 많아서 제주 사람들은 귤을 돈 주고 사 먹지 않고 종종 이런 식당이 있다는 풍문을 살짝 들어본 것 같긴 하지만 미담을 위해 넘어가자) 사장님이 원래 엄청난 재력을 가지고 있고, 식당은 부업이자 취미생활로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여유와 인정이 넘쳐흘렀다. 많이 주신 반찬이 아까워서 언젠가는 사람들 여러 명 데리고 와서 한 번은 정말 푸짐하게 싹싹 긁어먹어야겠다는 생각조차 들었다.(두 달 뒤 가족여행에서 정말 부모님을 모시고 재방문한다)

 

 결국 예상보다 숙소에 늦게 도착했고, 원래 가려고 했던 식당이 문을 닫아 버린 우연이 모여 나에게 인생 식당을 소개해줬다. 눈앞에서 무언가를 놓쳤다고 너무 속상해하거나 노여워하지 말자. 지금 놓친 눈앞의 기회가 다른 더 큰 보상을 들고 찾아올지도 모르니까(이게 새옹지마던가).

 

이렇듯 삶이 우리를 힘들게 할지라도 경주마처럼 앞만 보지 말고 한 번쯤 허리를 펴서 주변을 둘러보고 파란 하늘도 좀 보고, 밤하늘 쟁반같이 둥근달, 새색시 눈썹 같은 초승달 한 번씩 쳐다보고, 북두칠성과 오리온도 한 번씩 찾아보면서 그렇게 살아가면 얼마나 좋을까


 나도 20대를 겪으며 많이 변했나 보다. 경주마처럼 눈을 가리고 앞만 보며 달려가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앞을 보며 달리다가 문득 사방을 둘러보니 나는 사막 한가운데를 달리고 있었고, 목적지는 저 너머에 신기루처럼 보였다. 그게 신기루였는지 정말 오아이스였는지 혹은 사막의 끝에 있는 황금의 나라 말리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설령 진짜 샘물이 넘쳐흐르는 오아이스가 바로 앞에 있었다고 할지라도 어찌하겠는가 사막을 건너던 여행자는 지치고 힘들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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