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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제주 Jun 12. 2020

문과생은 거대한 주상절리를 보고도 시큰둥하다

추사의 작은 글씨에 더 흥미를 느낀다 

 「문경수의 과학탐험」을 보면  보면 저자는 갯깍지의 거대한 주상절리를 보고 감탄하고, 협재 앞바다의 비양도에 가서 각종 화산지형들을 보고 감탄한다. 그래서 나도 호기심이 들어 그 주상절리가 얼마나 대단한가 보려고 돌무더기 해안가를 탐험했고, 높은 파도를 헤치고 비양도에 들어가서 화산지형을 보았지만 역시 전형적인 문과생인 나에게는 오히려 추사관에서 본 추사의 글씨가 더 마음에 와 닿았다. 주상절리와 비양도를 평가절하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내가 문과생일 뿐이다.         

 갯깍 주상절리대

 우리가 교과서에서 많이 보는 추사 김정희 선생의 글씨는 원래 우리가 아는 추사체처럼 기골이 마른 글씨가 아니었다. 그의 글씨는 획이 풍부하고 기름진 글씨체를 가지고 있었으나, 7년간의 거친 유배생활은 그의 글씨체를 바꿔 놓기에 충분했다.

 박규수의 「추사체의 성립론」에 따르면 “추사가 어려서는 중국 명나라의 서예가인 동기창에 뜻을 두었고, 연경을 다녀온 후에는 옹방강을 열심히 본받았다. 이때의 글씨는 너무 기름지고 획이 두껍고 골기(骨氣)가 적다는 흠이 있었다. 제주도 귀양살이를 다녀온 다음부터는 남에게 구속받고 본뜨는 모습이 사라지고 대가들의 장점을 모아 스스로 일가를 이루었다.”라고 한다.

(좌) 대둔사 무량수각 현판, 제주 유배길에 쓴 작품이다 (우) 제주 유배 중에 쓴 예산 화암사 무량수각 현판. 이 두 작품은 추사 글씨의 변화를 알수 있게 해준다

  추사가 제주로 귀양을 내려가면서 있었던 두 개의 일화가 전해진다. 하나는 전주지역의 명필이던 창암 이삼만 선생과 관련된 일화이고 다른 하나는 원교 이광사 선생의 해남 대둔사 현판과 관련한 일화이다.

 

 창암 이상만 선생은 전주지방의 유명한 서예가였는데 추사가 귀양길에 그 지역을 지나간다는 얘기를 듣고 자신의 글씨를 보여주며 평을 부탁하였다. 추사는 자신보다 열여섯 살이나 많던 창암에게 “노인장께선 시골에서 글씨로 밥은 먹겠습니다”라고 얘기했다고 한다.


 또 하나의 일화는 절친한 벗인 초의선사를 만나기 위해 해남 대둔사에 머무르게 되었을 때의 일이다. 그곳 대웅전에는 원교 이광사 선생이 쓴 대웅보전 현판이 걸려있었다. 추사는 이 현판을 내리게 하고 내친김에 무량수각이라는 현판을 직접 써주고 제주도로 내려간다. 이 두 일화는 9년의 제주 귀양살이에서 풀려나 한양으로 올라가는 길로 이어진다.


 추사는 초의선사를 만나기 위해 대둔사에 들러서 원교의 현판을 다시 가져오게 하고는 말없이 한참으로 바라보다가 자신이 쓴 현판 대신 원교의 현판으로 바꾸라고 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는 전주에 와서 창암 선생을 만나 9년 전의 일을 사과하려고 한다. 하지만 창암은 이미 2년 전에 유명을 달리했고, 추사는 선생의 묘소에 ‘명필 창암 완산이공삼만지묘’라는 묘표와 묘문을 남겼다고 한다.


 그리고 앞서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추사는 제주 유배 중에 백파 망증15조라는 논쟁을 백파 스님과 주고받았는데 추사의 글이 공격적인 말투로 백파는 원색적으로 비난한다. 이에 대해서도 대둔사에서 올라오는 길에 백파 스님을 만나 사죄하려 하지만 거친 눈보라로 길이 늦어져 약속 날짜에 약속 장소에 도착하지 못해 끝내 사과를 하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백파 스님 입적 후 백파 율사비를 남긴다. 

  

 제주의 모진 바람은 추사에게 무슨 메시지를 남겼을까.


 우리가 추사체로만 알고 있는 추사 김정희 선생은 글씨뿐만 아니라 당대의 제법 명문가에서 태어나서 청나라를 드나들며 청의 유명 문인들과 교류하였고, 북학의 영향을 받아 금석학 등 학문적으로 두각을 나타내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당쟁에 휘말려 제주에서도 서남쪽으로 가장 멀리 있는 대정현(지금의 서귀포시 대정읍)으로 유배 오게 된다. 머나먼 제주 땅에서의 유배생활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에도 각종 질병에 걸려 고생한 흔적과 음식이 입에 맞지 않으니 반찬을 보내달라는 현실적인 모습도 등장한다. 사실 이역만리에서 몸이 힘든 것도 있었겠지만 정계에서 밀려난 것도 모자라, 땅끝보다 먼 남쪽의 바닷가에서 기약 없는 복귀를 기다리는 심정이었으니 정신적인 박탈감이 더 심했으리라. 윤선도처럼 꽤나 부유한 형편에서 어촌의 어부의 삶을 보며 안빈낙도를 노래하는 그런 심정은 아녔으리라.

 세한도는 그런 제주 유배시절 내내 그를 잊지 않고 매일 귀한 서적을 구해 보내주던 제자인 우선 이상적에게 추사의 나이 59세에 선물로 준 서화이다. 제주의 칼바람을 맞고 있는 소나무가 외롭게 제주의 바람을 맞고 있는 자신을 표현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추사가 쓴 세한도의 발문에는 이런 글이 적혀있다.

  공자가 말하길 날이 차가운(歲寒) 이후라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알게 된다

 
 이상적은 이 세한도 들고 연경(당시 청의 수도, 지금의 베이징)에 가서 청나라 명사 16명의 제(題), 찬(贊)(지금으로 말하면 그림에 댓글을 달아준 것이다)을 받아서 돌아오고 여기에 근현대사를 거치며 정인보 등의 명사가 글을 덧붙여 지금의 세한도가 완성된다. 그래서 세한도는 그림 한 장이 아니라 세한도 그림과 발문 옆으로 명사들의 글이 주욱 덧붙여져 있는 하나의 커다란 두루마리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세한도의 그림 옆에 당시 명사들의 그림에 대한 평가인 제, 찬이 붙어있다

 세한도는 실존하는 풍경은 아닌 것으로 추측된다. 일설에는 대정향교 앞뜰에 서있는 소나무가 그림의 모티브를 준 것이 아니냐는 설도 있는데(대정향교 앞뜰의 소나무를 보면 세한도의 소나무와 꽤나 비슷하게 생겼다) 정확히는 알 수 없다. 아마 공자의 글과 찬바람, 주변의 소나무가 복합적으로 시상을 불러일으키지 않았을까 싶다. 서울에서 가장 먼 남쪽의 끝자락 제주의 모진 겨울을 겪으며, 당시 추사의 나이가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59)였으니 얼마나 복잡한 심정이었을까. 아니 어찌 보면 추사의 골기가 서린 추사체와 간결하게 서있는 세한도의 소나무는 이제 많은 것을 내려놓고 인생을 허허하게 뒤돌아 보는 모습이 아니었을까.

대정향교의 소나무, 과연 추사가 그린 소나무일까

  사람들이 많이 지적하는 부분 중 하나는 세한도의 집에 그려진 창문이다. 창문이 동그랗게 생겼는데 이는 조선의 창문 형태가 아닌 청나라의 형태로서 추사의 머릿속에 있는 관념을 나타낸 것이라는 평이 있다.

 관념의 소나무 이든 대정향교의 소나무이든 무엇이 중요하랴, 세한도를 그린 추사의 마음과 현재에 그 세한도를 보는 우리의 감정이 중요하지 않을까


추사 기념관과 대정향교의 수선화, 추사는 수선화를 매우 좋아했는데 제주사람들이 농사를 위해 잡초처럼 뽑아내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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