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는 글> 제2화 꿈의 동사를 잊은 채, 그저 서울사람이 되어있었다.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가서 진정으로 원하는 꿈을 펼치라는 말을 찰떡 같이 믿었다.
그렇게 어딘가 불만스러운 ‘인서울’을 중얼거리며, 자라나는 어린 꿈을 애써 덮어냈다.
결국 서울에 있는 꽤나 괜찮은 대학에 입학을 하면서 마침내 서울에 사는 사람이 되었다.
지하철이 낯설었던 그 소녀는 노란 일회용 표를 순식간에 삼켜버리는 섬뜩함에 더이상 놀라지 않았다.
미어터지는 지하철에 내 몸 하나를 쑤셔 넣고 숨 죽이는 법이 익숙해졌다.
문이 열리는 짧은 시간 동안 사람들 틈 사이로 몸을 비집어 드나드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어릴 때부터 바라기만 했던 놀이공원도 전시회도 연극도 부모님과 싸우지 않고, 온 가족이 눈물을 흘리는 불상사 없이 혼자 가볍게 걸음을 뗄 수 있었다.
하지만, 서울에 살면서도 내 모습은 언제나처럼 세련되지 못했다.
서울에 터전을 잡고 있던 친구들과는 늘 다른 구석이 있었다.
나는 서울에 살게 되었지만, 여전히 서울사람이 될 수 없었다.
한 때,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최 씨의 딸은 이런 말을 했다.
“좋은 부모를 만나는 것도 능력이야”
그랬다. 90년생들에게 부모의 영향력은 실로 대단했다.
더 뛰어난 능력을 가졌으면서도, 부모보다 못한 세대는 어떤 부모를 만나는지에 따라 인생의 많은 부분이 결정되었다.
부모의 능력이 스펙이 된 90년생들에게 최 씨의 딸의 말은 서늘하고 분하지만 사실이었다.
그러나, 나는 꼭 부모의 능력이 돈과 명예에만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부모가 어디에 사는지도 능력이 될 수 있었다.
지방에서 올라와 서울에 이제 막 씨를 뿌린 학생들은 비싼 월세와 살림살이를 감당하면서 싹을 틔워야 했다.
꿈에 호기심을 갖기에는 비싼 월세가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실패한다면, 지방에 사는 가족들에게 일말의 죄책감을 느끼기 마련이었다.
때로는 너무 미안해서 원망이 들었다. 왜 나의 부모는 대한민국의 반에 가까운 사람들이 수도권에 산다는데, 그 반의 확률에 들지 못한 것일까 하는 터무늬 없는 원망.
그래서 꿈을 또다시 제쳐두고, 서울에 뿌리를 내리는 것에 많은 에너지를 쏟아냈다.
그런 나에게 서울에 터전을 둔 어른들은 이렇게 말했다.
“기숙사 건축, 반대”
대학가 앞에서 기숙사 건축을 반대하는 입김은 참 선명했다.
그 선명한 기운으로 이제 막 서울의 땅에 파고드는 나의 뿌리가 유약하게도 쉽게 쓰러졌다.
비싼 월세 때문에 어떻게든 졸업하기 전에 취직을 했어야 했다.
간신히 취직을 하고 나서도, 미약한 월급으로 월세와 살림살이에 보태면 도저히 돈을 모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서울에 살고 있었지만, 종착지를 잃어버린 여행자처럼 막막했다.
어딘가 늘 막연했던 서울살이였지만, 나는 기어코 뿌리를 엮어 서울 사람과 결혼을 했다.
서울 한복판에 첫 신혼살림을 차렸다. 나의 주민등록증과 운전면허증에 서울특별시가 찍혔다. 특별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하지만 나의 본질을 잊은 지 오래다.
어려서는 서울로 대학을 가기 위해, 서울에 와서는 서울에서 살아남기 위해 내가 어떤 꿈의 동사를 안고 서울에 왔는지 잊어버렸다.
어떤 모습으로 살고 싶었는지 잊은 채 난 그저 서울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2년 후, 나는 서울사람인 남편과 함께 전라남도 여수시로 오게 되었다.
서울에 살고 싶지 않아서라서기보다, 만만치 않아 휩쓸려 내려왔었다.
지금은 아이와 강아지를 양육하며 이곳에서 충만하고, 개성 있게 살아가고 있다.
내 모습 그대로 살 수 있는 이곳에서 오래도록 머물고 싶다.
어디에 사는지는 여전히 중요하다.
그러나 그전에 내가 어떤 사람인지 반드시 알았어야 했다.
나는 브런치를 통해, 지방에서 아이를 양육하고, 나의 본질을 찾으며 성장하고, 이웃을 바라본 이야기를 하고 싶다.
그리고 부디 지방에서 사는 것이 이 글을 읽는 사람에게 매력적이길 바라며,
당신의 시선이 어디에 사는지에 두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하는 곳에 머물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