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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서영 Sep 03. 2022

시시하다. 나를 분노하게 하는 것들이

오래 살아 미안한 마음을 헤아려본다.

땀냄새로도 충분히 속이 메스꺼운 여름이었다. 이제 갓 뽑은 강아지 똥이 아기매트에 똬리를 틀었다.

그 똥냄새가 짠기가 꽉 찬 바닷바람을 만났다. 짠기가 가득한 강아지 똥냄새는 유난히도 내 마음을 들쑤셨다.

이윽고 얼굴이 벌게졌고, 이미 짜디짠 눈물을 뽑아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눈물이 고여 앞이 아른거렸다. 아찔한 정신으로 눈물 한 방울 간신히 훔쳤다.

따가운 목구멍으로 마른침을 삼키며 강아지 똥을 주우려는데, 아이가 멀찍이서 강아지 똥을 탐하고 있었다.


화장지를 움켜쥐고 늘어난 뱃살이 출렁거리도록 그 짧은 거리를 대차게 뛰었다.

그러나  똥을 탐한 호기심 가득한 생명은 이미 강아지똥을 만지거리며 맛보고 즐기는 촉감놀이를 시작했다.

아기의 손에서 묻어나는 강아지 똥은 집안 이곳저곳에 순식간에 자리했다. 온 집안을 감싸는 짠기가 가득 찬 강아지 똥냄새.

코끝이 매워지는 어딘가 매콤한 향이 내 코를 쥐었다. 그 매서운 냄새는 기어이 숨통을 조였다.

나는 더 이상 숨을 쉴 수 없었다. 곧 죽음을 맞이할 짐승처럼 울었다.


아이와 강아지를 함께 기르니 마음의 온도가 냉탕과 온탕을 오간다. 그 휴식 없는 담금질 때문에 마음이 벌게져 얼얼하다.

저녁에도 벌게진 마음을 추스르려 해도 낮에 있었던 일을 곱씹어 생각하며 홀로 반성하며 분노하다 잠을 설친다.

미처 치우지 못한 주방의 그릇들이.

제자리를 잃어 아무 곳에 있는 부품을 잃은 장난감들이.

강아지의 똥오줌과, 아이의 이유식과 주스가 떨어져 찐득한 방바닥이.

시시하다. 나를 분노하게 하는 것들이.

그렇게 여전히 얼얼한 마음이 가라앉지 않는 어느 날, 90이 넘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얼얼한 소식을 들었다.


낯설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생전에 사셨던 오래된 집은 주인이 사라지고 나서야 새 옷을 입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침을 튀기며 싸우던 시끄러운 소리와

돌절구에 찰떡을 쾅쾅 내리치며 인절미를 만들었던 고소한 냄새와

금방이라도 벌레와 쏟아져버릴 것 같은 빛바랜 물건들이

모두

순식간에 사라졌다.


새로 태어난 나의 아이가 그 집에서 까르르 웃는다.

하지만 할아버지, 할머니가 깃들여있는 이곳이 너무나 익숙해서,

아이의 웃음소리가 낯설어 가슴이 서늘해진다.


친정부모님도 텅 빈 집을 보면 정말 고아가 될까 봐

사람들을 불러 이따금 주인 없는 집에서 사람 냄새가 나도록 노력하지만

90년이 넘는 세월의 주인을 잃은 집은 금세 쓸쓸해져 버렸다.

아무리 노력해도 새로 도배된 깔끔한 벽이, 커져버린 공간이, 향기로운 냄새가, 교양 있는 목소리가

너무나 낯설다.


 설음에서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오래 살아, 미안하다”라는 말을 헤아려본다.


이곳 지방에 살다 보면, 삼삼오오 모이던 어르신들이 어느 날부터 영영 보이지 않는 날들이 있다.

특히, 코로나 19가 뚜렷해지면서 명절이 가까워지는데도 아파트 단지에 어르신들이 보이지 않는다.

생선을 다듬는 찌릿한 냄새와 작은 수레에 미어질  농수산물을 쌓아 위태롭게 걸으시던 어르신들의 모습들이 모두

사라졌다. 명절이 바투로 가까워지면 정신없던 주차장과 전 지지는 냄새가 온 아파트단지에서 한동안 진동을 했다.

그러나 어느새 한산한 주차장과 엘리베이터의 락스 냄새가 기다리는 이들의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린다.

유난히 어르신들이 많이 사는 이곳 지방이 순식간에 쓸쓸해져 버렸다.

  내내 아파트 계단에서 뙤약볕을 맞으며 무엇인가를  말리시는 할머니가 있었다. 햇볕을 정통을 맞고 매일같이 말리시니,

어디에 계시나  검게 그을린 얼굴이  눈에 띄셨다. 하루는 아이의 하원 차량을 기다리면서, 할머니의 커다란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뭐덜라 온다냐. 절대 오지 마라, 느그들 오믄 나 콜레라(코로나) 걸려 죽어쁠면 어찔끄냐. 요새 누가 추석 때 모인다냐. 니들도 추석 생각 말고, 몸 건강한 것이

치고다 치고. 나는 여서 맨날 함쎄들이랑 (할머니들이랑) 노는디 뭐시 심심하데. 텔레비도 있고, 만사 밥할 일도 없고 핀타 핀 해. 주소나 말해봐라. 이거 뭔 함쎄가(할머니가) 째깐히 (조금) 준 거 나 혼자 못묵응께(못 먹으니까) 느그들한테 보낼란다.”


할머니는 있는 힘껏 전화를 끊었다.

그러고는 계단에 그대로 주저앉은 채로, 말리시던 생선을 물끄러미 바라보셨다.

이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어깨를 들썩였다.

할머니가 계단에 앉아 보냈던 그을린 시간들이, 반질반질하게 잘 말려진 엄청난 생선들이 어쩐지 할머니를 더 초라하게 만들까 걱정이 되었다.

코로나19로 더 쓸쓸해져 버린 어르신들을 보며 살아있음을 미안해하는 것이 어떤 마음인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자식들을 그리워하는 마음도

여기저기 아픈 몸으로도 살고 싶은 마음도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옷을 입어 즐거운 마음도

새로운 꿈을 꾸는 것도

죽기 전에 남사스러운 사랑을 느끼는 것도

죄스러워하는 마음에


어르신들을 살고 싶고, 보고 싶고, 외로운 마음을

“오래 살아 미안하다”라고 말하시는 것이 아닐까.


살아온 인생이 아직은 짧아서, 오래 살아 미안한 마음을 다 헤아릴 수 없다.

나도 나이가 들면, 매일 중년이 된 아이를 기다리며

외로움으로 빼곡히 하루를 채우고

, 죽음을 준비하는 노인이 될까하는

오버스러운 생각에 아이가 퍽 보고 싶다.

괜히 하원 차량에서 내리는 아이에게 꽉 안겨본다.


이제 서서히 어르신들이 어설프게 마스크를 쓰며 나오신다.

다행스러운 마음에 “잘 계셨어요?”라고 물으면

언제나 대답은 “아이고, 죽어야지 오래 살아 뭐한데”

나는 여전히 어르신들의 죽겠다는 말의 진심을 헤아릴 수 없다.


다만, 아이와 함께 보내는 찐득한 방바닥과 장난감에 차여 부어오르는 발가락이,

육아와 살림으로 남편과의 잦은 말다툼과 

미뤄둔 빨랫감에서 나는 매쾌한 냄새가

모두 함께 살아가는 즐거움이라는 것을 새삼스레 느낀다.

미처 닦지 못한 방바닥에 이불을 깔고 누워 아이의 발길질에 눈탱이를 맞고,

정리하지 못한 그림책과 부품을 잃은 장난감을 밀어내며 잠든 아이를 바라본다.

시끄럽고, 더러운 집에서 함께 살아있다는 보람을 느낀다.


ps. 할아버지. 나는 왜 꿉꿉한 냄새가 나던 할아버지를 한 번 안아볼 용기가 없었을까요.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알면서 왜 사랑하고, 감사했다는 말에 용기가 필요했던 걸까요. 설마 그리울까 했는데, 생각보다 많이 그립고 후회스러워요. 아마도 그곳에도 할아버지는 자식들을 그리워하며 서운해하며 빼곡히 하루하루를 보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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