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랭 드 보통의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The Course of Love)
지은이 알랭 드 보통
옮긴이 김한영
출판 은행나무
함께 책을 읽는 모임이 있다. 한 달에 한 권씩 읽고 서평을 쓰고 온라인으로 토론을 하는 모임이다. 30대 여성 5명이 모이다 보니 한 시간 반의 토론이 짧게 느껴진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도 있지만 어색함은 전혀 없는.
모임에서 책이 선정되자마자 그 이튿날 책을 구입했다. 이번에는 반드시 마감기한에 쫓기지 않고 여유 있게 책을 읽고 서평을 쓰리라 맘을 먹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초반에 잘 넘어가지 않는 책장을 힘겹게 넘기느라 고생 아닌 고생을 해서 그래서였는지 책을 열심히 가지고는 다녔지만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았고 결국 마감일이 다 되어서야 몰아서 읽게 되었다.
읽는 내내 어쩐지 이 책은 나와는 잘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계속했다. 아마도 번역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던 것 같다. 자연히 서평을 쓰기도 힘들지 않을까, 인상 깊은 구절을 찾기도 힘들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게다가 평소에도 나는 이 작가의 말투, 그러니까 '나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식의 말투가 어쩐지 어쩐지 맘에 들어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하지만 서평을 쓰기 전 책에 줄을 그어놓은 구절을 옮겨 적는데, 걱정보다는 훨씬 파란색으로 그어놓은 밑줄이 많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고 책 속의 문장들을 적다 보니 쓸 말이 새록새록 떠오르기도 했다. 그러니, 책 속에서 공감한 부분들을 위주로 생각을 나누어볼까 한다.
사랑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심산할 만큼 감동적인 최초의 순간들에 잠식당하고 기만당해왔다. 우리는 러브스토리들에 너무 이른 결말을 허용해왔다. 우리는 사람이 어떻게 시작하는지에 대해서는 과하게 많이 알고, 사랑이 어떻게 계속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무모하리만치 아는 게 없는 듯하다.
p.27
며칠 전 남편의 친구들이 집에 놀러와 하루를 묵고 갔다. 집에 방이 두 개다 보니 남녀가 따로 잠을 자게 되었고 나는 남편 친구의 아내 A와 단 둘이 서재에서 한 이불을 깔고 잠을 잤다. 자정이 넘은 시간에 누웠지만 나와 A는 두 시간을 넘게 수다를 떨다가 겨우 잠을 청했다. 대화의 주제는 누가 정해주지도 않았는데 끝도 없이 펼쳐졌고 그중 서로의 연애 이야기 그리고 결혼까지의 과정들이 드라마처럼 펼쳐졌다. 하지만 결혼 이후의 삶이 어떠한지, 여전한 것과 변한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약속이나 한 듯이 생략하고 다음 주제로 넘어가는 것이었다. 물론 연애 이야기는 비교적 한참 지난 일이니 얼마든지 미화할 수도, 편하게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결혼생활은 현재 진행형이라 섣불리 나누게 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누구와 대화를 할 때도 결혼 이전의 러브스토리에 대해서는 편하게 이야기하고 질문을 받기도 하지만 결혼 이후의 러브스토리에 대해서는 먼저 묻지도 이야기하지도 않는 편인 것은 사실이다. 드라마같이 펼쳐진 연애 스토리와 결혼 준비과정 이후의 훨씬 더 길고 어쩌면 더 중요한 결혼 이후의 스토리에 대해 알랭이 말하는 것처럼 ‘무모하리만치’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이 사실인 것 같다.
낭만적 모험은 이제 지나갔다. 지금부터의 삶은 안정적이고 반복되는 리듬을 탈 테고, 한 해 한 해가 외형상 너무 비슷하여 그들은 종종 구체적인 사건이 일어난 시기를 기억하는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이야기가 끝나려면 멀었다. 이제부터는 이 흐름 속에 더 오래 견디면서 촘촘한 체로 흥미로운 알갱이들을 잡아내야 하는 문제가 되었을 뿐이다.
p.71
어쩌면 그 이유, 결혼 후의 스토리를 궁금해하지 않는 이유는 그 이후의 일이 낭만적 모험이 아닌 반복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촘촘한 체로 흥미로운 알갱이들을 잡아내야’ 그나마 이야깃거리를 만들 수 있는 비슷한 일들의 반복이기 때문에. 하지만 생각해보면 반드시 그런 것도 아니다. 반복되는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배우고 나아지거나 혹은 퇴보하면서 조금씩은 다른 변주를 만들어낸다. 완전히 반복적인 것은 아니다. 다만 그 변화가 너무 미세하여서 멀리서 보면, 혹은 너무 가까이에서 보면 잘 감지할 수 없을 뿐이다.
우리는 삶의 중요한 영역들(국제무역, 이민, 종양학 등)에서는 복잡성을 감안하고, 이견을 수용하고 참을성 있게 해결해나간다. 그러나 가정생활에서만큼은 치명적일 정도로 안이한 가정을 세우곤 하며, 이 때문에 협상이 오래 걸리는 데 대해 날카로운 반감이 생긴다. 욕실 관리를 두고 꼬박 이틀간 정상회담을 하는 건 너무 유별나고, 저녁 식사를 위해 집에서 정확히 몇 시에 출발해야 하는지를 정하기 위해 전문 중재인을 고용하는 건 분명 터무니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p.76
남편과 싸우고 난 후에 느끼는 자괴감은 주로 여기에서 기인한다. 대체 이게 뭐라고 이렇게까지 마음이 상할 일인가 하는 생각에서 말이다. 부부 사이에서의 협상과 다툼은 주로 아주 사소한 것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 시작이 무엇이었는지조차 잘 생각나지 않고 혹은 생각난다고 해도 부끄러운 마음에 다시 언급하지 않게 될 뿐이다. 하지만 이것이 어느 시기에는 너무 자주 일어난다는 문제가 있다. 국제무역과 이민, 종양학 등의 문제들을 가지고 정상회담을 하는 경우는 그리 흔하게 벌어지는 일은 아니지만, 욕실 관리와 같은 일로 협상을 벌여야 하는 일은 생각보다 너무 자주 벌어진다는 것이다. 어쩌면 처음에 언급한 자괴감은 이것과도 연관이 있는지 모른다. 어제 욕실관리 때문에 협상을 벌이고 마음이 그렇게 상했건만 오늘 또 세차 문제로 비슷한 협상을 해야 한다는 피로감 말이다.
토라진 사람은 상대방의 이해를 강하게 원하면서도 그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연애에서 달변가조차 파트너가 자신을 정확히 읽어내지 못할라치면 본능에 따라 함구하는 쪽으로 기운다. 무언의 정확한 독심술이 파트너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진실한 징표로 느껴진다. 말로 설명할 필요가 없을 때만이 우리는 자신이 진정으로 이해받고 있다고 확신하는 것이다.
p.87, 89
나는 결혼 전 연애시절, 흔히 말하는 밀당이나 이유를 말해주지 않으면서 혼자 토라지는 일을 하지 않는 스타일이라고 스스로 자부해왔다. 그러니 나와 관계를 맺는 남자들은 내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되니 이 부분에서 피곤 할리는 없다고 말이다. 실제로 결혼 전에 어느 정도는 그랬을지 모르겠지만-그나마도 스스로 판단하기에- 결혼 후 남편과의 관계만 놓고 본다면 상대의 이해를 강하게 원하면서 그의 이해를 돕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랑한다는 말을 잘 하지 않는 남편의 성향에 불만을 가지면서 ‘그걸 꼭 말을 해야 아냐?’라는 그의 질문에 ‘말을 해야 알지, 안 하면 어떻게 아느냐!’고 대답하면서도 정작 내가 토라지는 일에 대해서는 좀처럼 ‘꼭 말로 해야 아냐?’라는 생각을 굳게 가지는 것이다. 이런 이중성은 사건이 지나가고 나면 종종 깨달으면서도 다시 비슷한 상황이 돌아오면 그 깨달음은 온데간데없고 다시 상대가 당연히 독심술의 달인이어야 한다는 비이성적인 태도를 가진다. 참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이성적일 필요는 없다. 우리가 익혀두어야 할 것은 우리가 한두 가지 면에서 다소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쾌히 인정할 줄 아는 간헐적인 능력이다.
p.116
이것이 바로 부부관계의 핵심을 찌르는 말이 아닌가 싶다. 상대가 완벽한 사람이 아니며 다소 제정신이 아닌 한두 가지 면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데서 안정적인 관계의 실마리가 풀린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도 적용되어야 할 일이다. 나는 완벽한데 상대만 제정신이 아니라고 여긴다면 그보다 심각한 상황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정말로 책임이 있는 권력자에게 소리를 내지를 수가 없기에 우리가 비난을 해도 가장 너그럽게 보아주리라 확신하는 사람에게 화를 낸다. 주변에 있는 가장 다정하고, 가장 동정 어리고, 가장 충성스러운 사람, 즉 우리를 해칠 가능성이 가장 적으면서도 우리가 마구 소리를 치는 동안에도 우리 곁에 머물 가능성이 가장 큰 사람에게 불만을 쏟아놓는 것이다.
p.123
하지만 이런 생각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는 소리를 내지르는 당사자도 잘 알고 있는 일이기는 하다. 가장 너그럽게 보아주리라 확신하는 사람에게 화를 내는 일은 내 편에 서 있는 아군에게 반복적으로 부상을 입히는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번의 치명상은 아닐지라도 반복되는 부상은 관계를 쇠약하게 만들기 마련이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예의를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특히 누군가에게 소리를 내지르고 싶을 때 꼭 명심해야 할 것이다.
좋은 부모의 역할에는 중요하면서도 부척 까다로운 요건이 딸려 있다. 대단히 유감스러운 소식을 끊임없이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p.167
아직 부모가 되어본 적은 없지만 격하게 공감했던 문장이다. 대단히 유감스러운 소식, 그러니까 이제 그만 놀고 자야 한다거나 파를 골라내지 말고 다 먹어야 한다거나 하는 소식을 전하는 것이 좋은 부모의 역할이라는 것은 틀림없지만 과연 내가 그 역할을 잘 수행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아직 의문점이 많이 남아있다.
우리가 장미의 줄기나 블루벨 꽃잎에 감탄할 수 있으려면 그전에 무엇인가 영구적으로 망가져봐야 한다. 일단 더 큰 꿈들이 언제나 어떤 식으로든 타협되고 만다는 것을 깨달으면, 고요한 완벽과 즐거움을 간직한 이 자그마한 섬들을 감사한 마음으로 돌아보게 된다.
p.274
얼마 전 엄마가 나무시장에 가서 마당에 심을 나무를 잔뜩 사 오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안 그래도 나도 나무시장에 가서 라일락 꽃나무를 사 오려고 한다고 했더니 엄마가 크게 웃으시면서 ‘너도 나이를 먹었구나.’ 하시는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선물 받은 화분에 심긴 화초를 말려 죽인 것이 한두 번이 아니어서 화초 전문 킬러라며 동생이 놀리기도 했고, 내 돈을 주고 화초를 사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정말 신기하게도 나이가 어느 정도 있으신 어르신들 중에 꽃을 좋아하지 않는 분을 아직 만나보지 못했다. 장미의 줄기나 블루벨 꽃잎에 감탄하는 것도 어느 정도의 인생의 내공이, 그것도 상실과 망가짐에서 비롯되는 내공이 필요한 일인가 보다. 크게 망가져보면 그 작은 꽃잎의 섬세함이 눈에 들어오는 모양이다.
우리는 언젠가 그 한계에 부딪힌다 하더라도 직무유기라 비난하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애석하도록 무능했던 것이 아니다. 그들은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를 충분히 헤아릴 수 없으며, 우리도 마찬가지다. 그게 정상이다. 어떤 사람도 다른 누군가를 정확히 이해하고 충분히 공감하지 못한다.
p. 280
누군가에게 이해받고자 하는 욕구는 죽을 때까지 지속될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죽을 때까지도 완전하게 성취되지 않을 것이다. 어렸을 때는 너무 쉽게 평생 함께 할 사람의 조건으로 ‘나를 이해하는 사람’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얼마나 허황된 꿈인지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나를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정도는 자랐다. 심지어 나조차도 나를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은데 타인이 나를 이해하기를 바라는 것은 너무 큰 욕심이다. 그리고 그게 정상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할 때 관계는 계속 비극으로 흐르고 언제나 나를 이해할 다른 누군가를 찾아 나설 수밖에 없게 된다.
낭만주의 결혼관은 ‘알맞은’ 사람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이는 우리의 허다한 관심사와 가치관에 공감하는 사람을 찾는 것으로 인식된다. 장기적으로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우리는 어느 다양하고 특이하다. 영구적인 조화는 불가능하다.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파트너는 우연히 기적처럼 모든 취향이 같은 사람이 아니라, 지혜롭고 흔쾌하게 취향의 차이를 놓고 협의할 수 있는 사람이다.
p.283
다행스럽게도 결혼 전 나는 이 사실을 깨달았다. 나에게 알맞은 사람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나의 허다하고 끊임없이 바뀌는 관심사를 공유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나는 나와 함께 미술관에 갈 남자를 찾는 대신, 내가 미술관에 가는 것을 말리지 않을 사람을 찾기로 마음을 먹었던 것이다. 흔쾌히 협의할 수 있는 마음가짐만 있다면 이루지 못할 협상은 없다고 생각한다. 거기에 더해 혹시 끝내 협의를 이루지 못하는 것이 있다 하더라도 비난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준비까지 되어 있다면 금상첨화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나도 그런 준비는 완벽하게 되어 있지 않다. 그러니 살면서 계속 부대끼고 토라지고 결국은 협상을 하기도 혹은 결국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하기도 하면서 결국 조금씩 맞추어 가게 될 것이다. 다만 처음부터 나에게 ‘알맞은’ 사람을 찾았다는 생각으로 결혼을 했다면 아마 벌써 여러 번 ‘이 사람은 아닌가 보다.’하는 결론에 이르렀을 것이다.
처음 생각과는 달리 지금은 이 책을 읽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서평을 쓰기로 한 것이(강제적으로라도)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기까지 쓰고 보니 작가와 한두 시간 대화를 한 것 같은 느낌이다. 물론 비판적인 대화라기보다는 공감되는 부분에 초점을 맞춘 대화이니 부족함이 느껴지기는 하지만 말이다. 내공을 좀 더 쌓아서, 공감하지 못한 부분에 빨간 밑줄을 긋고 그에 대한 신랄한 대화도 한번 나누어 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