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 시인은 1934년 12월 24일 <초 한 대>, <삶과 죽음>, <내일은 없다> 등 3편의 시를 썼다. 윤동주 시인의 공식적인 첫 시가 되었다. 그렇다면 나의 첫 시는 무엇일까? 언뜻 떠오르는 몇 편의 시가 있다. <징검다리>, <경운기>, <시인의 월급은 얼마나 된다냐>, <우리들의 고향>...., 사실 많은 작품들은 발표 훨씬 전에 쓰인 시들이 많다. 특히, 내가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별무덤>>이란 두꺼운 시집을 복사하여 만들었는데 대부분의 시들이 그 안에 들어 있었다.
나는 사실 중학교 시절에는 시를 거의 쓰지 않았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일기는 썼지만 본격적으로 글을 쓰지는 않았다. 학교에서 하는 글짓기로 몇 번 상을 받기는 하였지만 글을 쓴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 들어가면서였다. 고향을 떠나서 서울 개포동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비로소 시를 쓰기 시작하였다. 중학교 시절에는 나의 꿈이 재벌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서울로의 유학을 떠나면서 꿈이 바뀌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나는 밤새 코피를 흘렸다. 기숙사에서 밤새 코피를 흘렸는데 그때 나를 밤새 간호해 준 3학년 선배가 있었다. 학교 의무실에서 봉사활동하는 선배였는데 밤새 내 곁에서 간호를 해 주셨다. 의무실에 간호사가 있었지만 낮에만 근무를 하고 밤에는 퇴근했기 때문에 밤에는 봉사활동 하는 학생들이 의무실을 지켰다.
그 일을 계기로 나는 그 선배와 친해졌다. 그런데 여름방학이 끝나고 개학을 했는데 그 선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알고 보니 여름방학 때 출혈열로 하늘나라로 떠나고 말았다. 그 당시에는 주로 잔디밭에 앉았다가 쥐똥이 있는 곳에서 그런 병에 감염되는 경우가 많았었다. 그 사건을 계기로 삶과 죽음에 대하여 좀 더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본격적으로 책도 읽기 시작했다. 고향을 떠나서 삶의 의미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면서 시인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나는 친구들을 모아서 함께 시를 쓰기 시작했다. 내가 주도적으로 <어긋니>라는 동인을 만들어 시를 쓰기 시작했다. 우리들의 모토는 하나였다. "공돌이도 시를 쓸 수 있다"였다. 가정 형편 때문에 특수목적고등학교에 들어가서 비로소 시인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한국전력공사에서 전적으로 지원해 주는 특수학교였다. 기숙사비를 포함하여 교복과 구두까지 모두 무료였다. 그렇게 나는 고향을 떠나서 개도 포기했다는 개포동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시를 쓰기 시작하였다.
https://youtu.be/faf_-V6oRgM?si=Nrcs-qJkq3bT5Mnd
https://youtu.be/3JgXSPIZzTQ?si=KytMk1BpkpamEhJK
https://youtu.be/-568M9djkJo?si=FvUP0x1-2n4qhMP_
https://youtu.be/-PZ-UUIa3xY?si=CWm4ZsjXr2pfy8z6
https://youtu.be/hxZ-hBeWrb0?si=uYvntDMFRfbHHYVA
https://terms.naver.com/entry.naver?cid=40942&docId=1092428&categoryId=31872
https://youtu.be/MUOfYd0WdRA?si=gB8zDKuMSFiIikLp
https://youtu.be/9dfM8AFnW0o?si=3J6qN9wGaCeT7Fkz
https://youtu.be/gkPlTdBfPV4?si=NDjpgNODhR53vLgR
https://youtu.be/Z3nYY9_o4zE?si=F0IapGUlrI_wMJGK
나는 잠시 나를 뒤돌아본다. 나는 너무 오래도록 교대근무를 하였다. 교대근무를 너무 오래 하면 한 십 년 정도의 생명이 짧아질 수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나는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는 30년도 넘게 교대근무를 하였다. 그러는 동안 나는 이어도에서 살았다. 바다만 바라보면서 스스로 이어도에 갇혀서 이어도공화국을 만들며 이어도 시인으로 살았다.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와서 지난주에는 부산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이번주에는 3일째 출근하여 나의 새로운 자리에 적응하고 있다. 나는 이제 뒷방으로 물러났다. 밤낮없이 전기를 만들던 현장에서 물러났다. 나는 이제 별빛을 만들지 않는다. 선임전문위원이 되었다. 현장 업무에서 한 걸음 물러서서 바라보니 발전소가 더 잘 보인다. 발전소와 발전소 사람들에 대한 글도 이제는 부담 없이 쓸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이제 윤동주 시인과 함께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다.
얼마 전에 나왔던 모던포엠을 다시 본다. 모던포엠 초대석에 나왔던 배진성 시인의 글을 읽는다. 등단하고 썼던 <시인의 월급은 얼마나 된다냐>를 다시 읽는다. 시인은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직업이다. 윤동주 시인도 시를 써서 돈 한 푼 벌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누구나 좋아하는 시인이 되었다. 윤동주 시인의 어떤 면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좋아하는 것일까? 시와 삶이 하나로 연결되었기 때문에 좋아할 것이다. 시는 그 시를 쓴 시인의 삶과 한 몸이 되지 않으면 좋은 시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시와 삶이 완벽하게 하나가 될 수 있을 때, 그 시와 그 시인은 비로소 아름답고 의미 있는 시와 삶으로 완성될 수 있으리라.
나는 오늘도 월대천 징검다리를 건너며,
물의 고을, 여수를 지나 고향으로 간다
거문도를 지나 오동도를 지나 망덕포구
섬진강을 거슬러 올라가 곡성으로 간다
징검다리 사이에서 노니는 은어를 따라
내도 앞바다로 간다 내도 알작지 앞에서
파도소리와 놀다가 이어도에서 올라오는
연어를 따라 가끔 남해 바다를 건너간다
추자도와 여서도와 거문도로 가는 연어,
여수에서 멀리 마중 나온 거문도로 간다
여수의 아기 나비처럼 날개를 펄럭인다
내 고향보다 더 고향 같은 여수가 참 좋다
여수시(麗水詩)에는 아직도 첫사랑이 산다
여수시(旅愁詩)에는 늘 마지막 사랑이 산다
오동도 앞에서 동백꽃으로 떨어져 버린 꽃과
향일암 앞으로 붉게 떠오를 태양을 위하여,
나는 오늘도 월대천 징검다리를 건넌다
다음 생에는 꼭 당신과 함께 살고 싶어서
여수만을 생각하며 한라산에서 내려온다
한라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따라서 간다
연어의 종착역으로 돌아가는 길에 꼭
전생에 헤어졌던 당신을 만나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나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붉은 알을 함께 낳아야만 한다
1. 징검다리
2. 시인의 월급은 얼마나 된다냐
3. 길이 있는 풍경
4. 사과꽃망울
5. 나무 발전소 1
6. 세한도
7. 덜컥
8. 시집과 갈치의 가격
9. 고구마 꽃
10. 다랑쉬(큐알코드 영상시)
<나의 시론>
눈물의 양에 따라 달라지는 시와 시론
하나
길이었다 덜 자란 몸으로 건너가는 징검다리
어머니는 방물을 파셨고 새벽 샛강의
입김 자욱한 안갯속으로 떠나시곤 했다
나는 담장 밑에 펼쳐놓은 꼬막껍데기에
쑥국 끓이기 놀이를 하며 자랐다
노을만 어렵게, 어렵게 감아 들이던
바람개비가 스스로의 바람결을 가늠할 수 있을 때
물오리를 기르기 시작했다 파랑 간짓대 들고
오리 떼를 몰아내던 골목이 심하게 흔들렸다
어머니 뒷모습을 지우던 안갯속으로
하얀 꽁무니가 사라지고
나도 그 속으로 따라 날아가고 싶었다
둘
할아버지 산소가 보이는 징검다리 사이로 햇살이
주검처럼 부서지며 흘러갔다 하류에서
한 몸으로 몸을 섞기 위해, 취로사업 나가신
아버지가 무너진 둑에 묻히고 작업복이 천수답
허수아비에 내걸리던 날도 나는 그 저수지 둑에서
삐비 꽃을 뽑아먹고 돌아오는 길
가로수 구멍 속에 몇 개의 돌을 더 던져 넣었다
어머니가 가슴을 움켜쥐고 쓰러지는 줄도 몰랐다
그 해 여름 장마는 담장의 발목을 적셨고
두꺼비 같은 우리 식구들은
한밤중에 회관으로 기어 올라갔었다
셋
학교 앞 코스모스로 기다리기를 즐겼다
하학종소리 사이로 보이는 형의 검정고무신 앞은
발가락이 먼저 나와 있었고 생활보호대상자
가족 앞으로 달려오는 옥수수빵과 건빵
나는 그것이 좋았다 우리는 뿔 필통 속 몽당연필로
흔, 들, 리, 며, 징, 검, 다, 리, 건, 넜, 다,
끈이 풀리는 소리로 흘러가는 여울물 소리는
우리를 다시 묶어주었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징검다리를 잘도 건너 다녔다
넷
수수깡으로 안경을 만들어 끼고 기차놀이하던
우리들은 그 새끼줄 속에서 자유로웠다
우리들의 기차는 징검다리를 비로소 건너 다녔고
오후의 서툰 기적소리 울리며
동구 밖까지 나가 놀던 소아마비 동생은
밤이 늦도록 돌아오지 못했다 찾다가 찾아보다가
어린 집배원이 된 큰 형도
동생의 소식은 가져오지 못하고 한 떼
건너가는 동네 아이들만 오래도록 바라보곤 했다
다섯
여울물 소리는 끈이 풀리는 소리였고
또다시 묶이는 소리였다 방직공장에 취직했던
누이가 파란 눈의 아이를 보듬고 돌아와
빨래터에는 방망이질 소리가 잠들지 않았고
헛발 짚은 어머니는 물속에 더욱 자주 빠지셨다
……………… 배고픔과 어머니 ………………
들판에 흐드러진 달맞이꽃 사이로 그렇게 어머니는
젖은 보름달을 이고 늦게 돌아오시곤 했다
― 어머니, 시인은 월급이 없어요
참으로 오랜만에 들길을 간다
두엄자리 곁에 세워진 아버지의
낡은 지게를 지고 저물녘을 간다
참깨 베러 가신 어머니의 산밭으로
늦은 마중을 간다 오랜만에
바람을 비껴 여름 한쪽 끝으로
산길을 오른다
노을이 차마 곱게 익는다
일찍부터 외항선을 탄 만수
뱃사람이 된 만수네가 새로 장만한
논을 바라보며 들길을 간다
일곱 번씩이나 떨어지고도 다시
행정고시공부를 시작했다는 현길이,
이미 기울어 버린 그 집에서
마지막으로 팔아넘긴 논배미를 지나
쓸쓸하게 걸어간다 새를 쫓는 깡통소리와
반짝이는 반짝이의 마음들이 노을 속으로
새를 날려 보내며 또 내일을 염려하는 가슴을
가다듬고 있었다 바람이 불어도 허수아비는
쓰러지지 않고 동그랗게 질린 비닐 얼굴들이
하늘까지 닿으려는 마음으로 솟아오르곤 했다
콩밭으로 바람이 기어들어가고 밤은
들쥐처럼 숨어들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어머니와 산길을 내려온다 가끔
고개 치켜드는 벼 포기 사이로 추억들이
발소리를 숨죽이며 기어 나왔다 나는 참깨를 지고
어머니는 토란대를 이고 오셨다 가슴조인
달빛이 풀어지고 우리는 하염없이 걸어 내려온다
― 어머니, 저 이제 시인이 되었어요
― 그래, 시인이 뭣 허는 것이다냐
― 예, 지금까지 제가 되고 싶었던 것이에요
밤낮을 밤으로만 지내면서 말이에요
― 그러냐, 그럼 이제 취직이 됐단 말이냐
― 아니에요 어머니 그런 것이 아니에요
― 그럼, 시인이 뭣 하는 것인디 그러냐
오랜만에 니가 웃기까지 하고 말이여
― 예, 앞으로
우리들의 고향을 노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 노래? 그럼 인쟈 테레비에도 나온다냐
― 아니에요 어머니, 그런 게 아니에요
― 그라믄, 시인 한 달 월급이 얼마나 된다냐
먹고 살만한 직업이다냐
요즘 시상에는 돈이 최고드라
봐라, 만수는 돈 있승께 다들 걱정허는
장개도 쉽게 간다더라
돈 많은 이쁜 색시가 낼모레 온다더라
― 어머니, 하지만 저는 그렇지를 못해요
앞으로 어머니를 팔지도 몰라요
앞으로 고향을 팔아먹을지도 몰라요
시인은 가난한 직업이거든요
하지만 우리는 우리를 사랑할 수밖에 없잖아요
마음을 갈고닦아 영혼을 맑게 하는 일이에요
그래서 저는 더욱 시인이 되고 싶었어요
우리들의 이야기가 들판 가득 출렁일 때 달빛은 우리가 걸어온 들길을 따라오고 있었다 어머니, 저는 시가 무엇인지 모르는 어머니와 고향을 위하여 우리들의 생활을 팔아먹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는 땅의 눈물 같은 시 한 편으로 살고 싶습니다
나는 밭 가운데 너뷔바위에 앉아 있었다
아침 시선은
고춧대 하나에 꽂혀 있었다
외톨이처럼
뽕나무 가지 버팀목이 없었다
참새
한 마리가 날아와 앉았다
고춧대가 휘청거렸다
또 한 마리가 날아왔다
고춧대가 드디어 꼬꾸라졌다
새는 약속처럼
한꺼번에 떠났다
고추나무는
끝끝내 일어서지 못했다
그러한 밭에서 걸어 나온 길로
살벌한 평화처럼
젖은 여자가 걸어가고 있었다
득음을 위한 독공이 한창이다
사과나무속에서
고려청자 굽는 소리 들린다
조선백자 깨뜨리는 소리 들린다
수없이 많은 사금파리들이 쌓인다
사과나무속에서
사과를 미리 빚어보고 구워보고 깎아본다
산수유, 개나리, 진달래, 벚꽃
성질 급한 봄꽃들이 속옷 바람으로 뛰쳐나와도
사과나무는
진득하니 사과나무속에서 사과만을 만들고 있다
울컥, 울혈을 토해내고 있다
세상에는 돌아가는 것들 투성이다
스스로 모래시계 되는 겨울나무를 본다
하늘과 땅의 영혼이 뒤집힌다
발전소, 발전기와 터빈이 한 몸으로 돌아가고 거대한 보일러 속에서 파이어 볼이 돌아간다 그 속에서 사랑과 이별을 껴안은 계절이 돌아가고 물과 불이 돌아가고 해와 달이 돌아가고 삶과 죽음이 돌아가고 나와 하느님이 함께 돌아간다
온갖 것들이 돌아가는 발전소에서 나는
나무 조상들을 태워 별빛을 만든다
번쩍, 번개가 하늘의 소식을 전한다
하느님은 오늘도 야간근무 하고 계신다
땅속 오래 묻혀 있던 나무들
부관참시 지켜보던 별이 눈을 찔끔 감는다
나무의 뿌리에도 발전소가 있어
물관부를 타고 오르내리는 것들
나무 발전소가 세상을 돌리고 있다
심장내과 복도에는 어둠이 쌓여있다
나의 하느님이신 원장님께서 문을 열고 불을 켠다
잠시 후에 천사들이 들어오며 출근 체크를 한다
피를 뽑아 검사를 하는 동안 나는 세한도를 본다
늙은 한 그루는 소나무가 분명한데
젊은 세 그루는 소나무일까 잣나무일까
나무들보다 둥그런 문이 더 궁금하다
보름달 안에서 반달이 보인다
초승달과 그믐달도 보인다
그 문에서 나의 반월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대동맥판막 반월문에서 시계소리가 들린다
반월산에 나란히 누워계신 반달 두 개도 보인다
엎어놓은 반달의 잔디 위에도 눈이 쌓여 있으리라
아직은 나의 반달문이 잘 열리고 잘 닫히고 있으리라
금속으로 만든 반월 문짝이 빠지는 일도 있으리라
문짝이 칼이 되어 대동맥을 갈라버릴 수도 있으리라
문을 지나가는 피가 떡이 되어 핏줄을 막아버릴 수도 있으리라
혈전이 뇌로 가서 뇌졸중을 일으킬 수도 있으리라
비트코인처럼 빛나던 문이 악귀의 입처럼 변할 수도 있으리라
아, 나는 이제 심장에서 나가는 문이 가장 무섭다
아, 나는 이제 세상으로 나가는 달이 가장 무섭다
나는 나의 하느님에게 십계명을 받아 들고 나온다
세한도 밖으로 폭설은 멈출 줄 모르는데
늙은 소나무 한 그루 아직은 잘 살아가고 있다
장무상망(長毋相忘), 나의 묽은 피로 붉은 낙관을 찍는다
<몸>이라는 글씨를 써 놓고 들여다본다
두 개의 입 같기도 하고 창문 같기도 하다
좀 더 자세히 보니 두 장의 벽돌 같기도 하다
몸 안이 훤히 들여다보일 것 같은데
나는 도대체 내 몸 안을 볼 수 없다
콘크리트 같은 내 몸 안에서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내 몸 안에서
암 덩어리라도 살림을 차린 것일까
이러다가 덜컥 내가 죽는다면 어떻게 될까
처음부터 아픈 몸으로 태어나
지금껏 잘도 버텨왔는데
이러다가 덜컥 가야만 하는 것은 아닐까
이렇게 덜컥 가게 된다면
가장 아쉬운 것이 무엇일까
이렇게 덜컥 떠나야 한다면
가장 슬픈 것이 무엇일까
구속과 단식을 반복하고 계시는
양윤모 선생님 영상을 보며
강정과 해군기지와 사삼과 평화와
그리고 삼월과 사월과 오월을 넘어
시와 시인의 길에 대하여 다시 생각한다
나는 지금껏 건강을 핑계로 몸만 따라다녔다
내 마음이 주인이 되지 못했다
어느 날 갑자기 덜컥 죽기 전에
나도 한 번쯤
몸이 마음을 따라가는 날이 오면 좋겠다
벽돌 한 장 내려놓으니
몸이 마음이 된다
창문 한 번 열어보니
몸이 마음으로 열린다
<몸> 글자를 지우고 <마음>이라는 글자를 덜컥 쓴다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이 덜컥 보이기 시작한다
윤동주 시인의 시집과 전집과 관련 책들을 읽다 보니 사진판 윤동주 자필 시고전집을 사야만 했다 제주도 도서관에는 한 권도 없다 3년이 더 지났으니 희망도서로 신청할 수도 없다
1999년에 발행한 시집이
5만 원이면
좀 비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터넷으로 책을 주문하고
오후에 산책을 나간다
윤동주 시인은 습작노트 2권과 자선 시고집 1권을 남겼다 윤동주는 송몽규가 신춘문예에 당선된 무렵부터 날짜를 명기해 가며 습작품을 보관했다
『나의 습작기의 시 아닌 시』
『창(窓)』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월대천 징검다리에서 왜가리 한 마리
여울물을 바라보며 추위에 떨고 있다
왜가리의 식생활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징검다리 건너지 않고 외도포구로 간다
외도교 아래를 지나 대원암 쪽으로 간다
눈이 내리는 바다에는 바람까지 거세다
바다에 누워계신 관세음보살을 씻는 파도가
해안까지 멀리 날아와서 나를 적신다
안경과 입술에도 소금 맛이 스며든다
파도가 날아오르는 연대포구에서
청해수산 홍보영상을 촬영 중이다
통통한 갈치가 싱싱하게 빛나고 있다
파도처럼 바다로 뛰어들 것 같은 갈치가
한 마리에 5만 원씩이라고 한다
아, 갈치도 참으로 비싸구나,
속으로 생각하며 돌아서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한 생명이 겨우 5만 원 이라니!
한 시인의 삶이 겨우 5만 원 이라니!
고구마 꽃이 피었다
고구마 꽃이 젖을 물리고 있다
꼬리박각시나방이 젖을 빨고 있다
고구마가 땅 속에서 젖을 준다
땅 속에서 어머니는
아직도 나에게 젖을 물리고 있다
다랑쉬에는 다랑쉬마을이 들어있다
오름은 움푹해진 백록담도 품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평생 달과 함께 살았다
집들이 모두 불타고 굴속으로 들어갈 때에도
달과 함께 가재쑥부쟁이와 시호꽃을 피웠다
사람들이 다랑쉬굴 안에서 연기가 된 뒤에도
달은 잊지 않고 찾아와 섬잔대와 송장꽃을 피웠다
무쇠솥과 항아리와 놋수저와 신발만 남기고
열한 명이 들려 나와 바다로 떠난 이후에는
더 이상 아무도 들어갈 수 없다
어둠 속에는 아홉 살 아이가 울고 있는데
벗겨진 신발 찾으러 들어가 나오지 못하고 있는데
잠겨버린 어둠은 열리지 않는다
달이 찾아와 소리쳐 불러도 문이 열리지 않는다
곁에 있는 용눈이오름 아끈다랑쉬오름 높은 오름
돛오름 둔지오름이 힘을 합쳐도 문을 열 수가 없다
남아있는 늙은 팽나무가 그저 바라볼 뿐
무너진 돌담도 집터도 우물터도 안으로 눈물 흘릴 뿐
달을 따라서 달의 고향으로 온 나도 그저
서로의 얼굴만 바라다볼 뿐
나는 요즘 윤동주 시인을 다시 만나고 있다. 윤동주 시인은 시와 삶을 완벽하게 일치시킨 시인이다. 끊임없는 자기 성찰을 통하여 삶과 시를 함께 성장시킨 시인이다. 윤동주 시인과 깊이 대화하며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다. 나의 시와 나의 삶을 함께 성장시키고 싶다. 윤동주 시인은 아직도 우물 속을 들여다보고 있다. 나는 그 우물 속에서 막힌 물길을 다시 뚫고 있다. 나는 어릴 적에 아프신 아버지 대신 나가서 울력을 하곤 했다. 장마에 떠내려간 징검돌을 제자리로 옮겨서 징검다리를 다시 놓기도 하고 마을의 공동우물 청소도 정기적으로 울력으로 했다.
상수도 시설이 없었던 시절에는 공동우물이 참으로 소중했다. 지붕도 튼튼하게 잘 만들어 주었다. 우리 동네에서는 해마다 깊은 우물 속 청소를 하였다. 울력 나온 사람들 중에서 언제나 내가 가장 어렸다. 그래서 내가 우물 속으로 내려갔다. 평소에 우물물을 두레박으로 뜰 때에는 그냥 맨손으로 두레박줄을 끌어올렸다. 하지만 공동우물 대청소를 할 때에는 우물집 대들보에 도르래를 설치하고 큰 양동이를 매달아서 빠른 속도로 물을 퍼냈다. 우물 바닥이 보이면 가장 어린 내가 그 양동이를 타고 내려갔다. 혹시 막혀있는 물길이 있으면 다시 뚫어주고 이끼까지 깨끗하게 청소를 했다. 낙엽 등의 이물질을 제거하고 쌓인 뻘들도 걷어내고 나는 다시 양동이를 타고 올라왔다. 양동이를 탄다고 썼지만 사실은 양동이를 매단 밧줄을 붙잡고 올라왔다.
검불 같은 시가 많아지고 따개비 같은 시들이 많아지는 시대에 좀 더 의미 있는 시를 쓰기 위하여, 좀 더 치열하고 좀 더 생명력 있는 시를 쓰기 위하여 고민하는 요즘이다. 나의 꿈과 나의 삶과 나의 글이 하나로 만날 수 있기를 희망한다. 나의 시와 나의 글에 <꿈삶글>이란 이름도 붙였다. 그리하여 나는 의미 있는 시인들을 처음부터 다시 깊이 만나고 있다. 올드포엠, 윤동주 시인부터 만나고 있는데 모던포엠에서 생각지도 못한 초대장이 왔다. 올드와 모던의 만남이다. 나는 아직 월간 모던포엠을 잘 모른다. 나는 아직 월간 모던포엠 발행인 전형철 선생님을 잘 모른다. 자신을 시 비렁뱅이로 자청하며 돈수백배 하시는 공손함을 나는 배운다.
나는 윤동주 시인에게 처음부터 다시 먼저 배운다. 끊임없는 자기 성찰을 통하여 자신의 개인적 체험을 역사적 국면의 경험으로 확장시키는 방법을 배운다. 자신이 감당해야 할 한 시대의 삶과 의식을 노래하는 능력을 배운다. 특정한 사회와 문화적 상황 속에서의 체험을 인간의 항구적 문제들에 연결함으로써 보편적인 공감에 도달할 수 있는 정체성을 배운다. 개인적 체험을 넘어, 깊은 통찰력으로 그것을 변용하고 조직할 수 있는 능력까지 배운다. 그리하여 시대의 아픔을 자기화하고 인간의 근본적인 고뇌를 형상화하여 지고지순한 인간이 되기 위하여 끝없이 성장하는 인간성을 배운다. 지금 우리 민족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는 무엇일까? 지금 우리 인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무엇일까? 그리하여 나는 근본부터 다시 생각한다. 뿌리부터 다시 살핀다. 하나회보다 더 무서운 검찰조직이 무성하다. 통일조국을 이루지 못한 해방정국부터 다시 살핀다. 정방폭포가 나를 부른다. 정방폭포에서 사삼과 평화에 관한 서사시를 쓴다.
나는 최인훈 선생님과 오규원 선생님께 문학을 배웠다. 최인훈 선생님께 “개체발생은 계통발생을 되풀이한다.”를 배웠고 오규원 선생님께 “진정성”을 배웠다. “장식을 걷어내고 진정성으로 승부하라” 그리하여 나의 평생 화두는 “진정성”이 되었고 최인훈 선생님의 가르침은 내 문학의 방법론이 되었다. 시 한 편을 쓸 때마다 시론이 하나씩 추가되는 셈이다. 자기 복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도 끊임없이 거듭나야만 한다. 자기만의 독특한 시론을 개발하여 자신이 쓰는 시에 끊임없이 새롭게 적용시켜야만 한다. 시론은 어느 하나에 고정되어서는 안 된다. 자신이 쓰고 싶은 시의 주제와 형식에 따라서 다양한 시론을 적용할 필요가 있다. 나는 비교적 다양하고 많은 시론을 배웠고 또한 다양하게 적용하려고 한다. 주제와 양식에 따라서 다양하게 옷을 입힐 필요가 있다. 요즘 활발하게 발표되는 디카시에도 관심이 많고 모덤포엠에서 적극적으로 발표하고 있는 큐알코드 영상시에도 관심이 많다. 시대가 변하면 시와 시론도 함께 변해야만 한다. 멀티 디지털 시대이므로 멀티포엠으로 가는 길은 더욱 자명할 것이다. 하지만 유의할 점이 있다. 아무리 시대에 맞게 옷을 갈아입혀도 근본이 변해서는 안 된다. 먼저 탄탄한 시가 된 다음에 다양한 옷을 입혀야만 한다. 미숙하거나 함량미달을 감추기 위하여 위장해서는 절대로 안 될 일이다.
나의 시론을 쓰려고 하니 김준오 선생님의 <시론>이 먼저 떠오른다. 나는 오규원 교수님께 시를 배웠는데, 시 창작은 우리들이 써서 제출한 시를 책으로 만들어서 합평을 하면서 배웠고 이론은 김준오 선생님의 <시론>을 기본 교재로 활용하고 다른 많은 시론들을 곁들여서 다양하게 배웠다. 시의 생명은 비유와 은유와 상징에 있으며 압축과 진정성만이 좋은 시를 완성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그런 시론을 쓰기에는 지면이 너무 부족하다. 그래서 나는 시 창작자의 입장에서 어떤 생각으로 시를 쓰고 있으며 또한 어떤 시가 좋은 시인가를 간단하게 말하려고 한다. 나의 체질에 맞는 시는 어떤 시이며 내가 쓰고 싶은 시는 어떤 시인지 말하려고 한다. 무엇보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시는 무엇인가에 대하여 말하려고 한다. 시론은 시인들마다 다를 수밖에 없고 달라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새로운 시를 쓸 때마다 자신의 시론 또한 그에 걸맞게 성장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언제나 시를 생각한다. 시인에게 시는 삶이다. 시인에게 시는 꿈인 동시에 삶이다. 나는 언제나 시인이 되기 위하여 시를 찾고 있다. 나는 언제나 시인으로 살기 위하여 시를 살고 있다. 나는 언제나 ‘詩’라는 글자를 생각한다. ‘詩’라는 글자는 재미가 있다. ‘詩’라는 글자 속에는 입과 발과 손이 모두 들어있다. 나는 발로 쓰는 시가 좋은 시라고 생각한다. 삶으로 쓰는 시가 좋은 시라고 생각한다. 가슴으로 쓰는 시가 좋은 시라고 생각한다. 피로 쓰는 시가 좋은 시라고 생각한다. 땀으로 쓰는 시가 좋은 시라고 생각한다. 눈물로 쓰는 시가 좋은 시라고 생각한다.
나도 시를 쓰기 시작한 초반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시는 산사에서 하는 말씀이라고 생각했다. 시는 산사의 종소리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나는 한 때 시를 찾아서 산사에 들어가 살기도 하였다. 절 사(寺)에 말씀 언(言)이 함께 붙어 있는 것이 시(詩)이므로 시는 산사에서 들려오는 말씀이라고 생각했다. 산사의 풍경소리가 시라고 생각했다. 산사의 범종소리가 시라고 생각했다. 산사의 운판소리가 시라고 생각했다. 산사의 법고소리가 시라고 생각했다. 산사의 목어소리가 시라고 생각했다. 산사의 목탁소리가 시라고 생각했다. 산사의 죽비소리가 시라고 생각했다. 산사의 염불소리가 시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나는 어느 순간부터, 신이 자연에 숨겨놓은 말씀이 시가 아닐까 생각했다. 하늘의 빛이 시가 아닐까 생각했다. 하늘의 별이 시가 아닐까 생각했다. 하늘의 달이 시가 아닐까 생각했다. 바람이 시가 아닐까, 바다가 시가 아닐까, 강이 시가 아닐까, 여울물 소리가 시가 아닐까, 나무가, 풀이, 꽃이, 가시가, 개구리가, 개구리밥이, 여치가, 버들치가, 은어가 …… 세상의 모든 것들이 시가 아닐까 생각했다. 조금만 눈을 떠봐도 세상에는 보석 같은 신의 말씀들이 별빛처럼 빛나고 있었다. 조금만 귀를 기울여 봐도 세상에는 여울물소리처럼 아름다운 노래가 흐르고 있었다. 조금만 눈을 뜨고 다시 보면 세상에는 온통 시 투성이었다.
그러다가 나는 드디어 반짝이는 아이들의 눈빛을 찾았고 꿈결 같은 아이들의 숨소리를 들었다. 그리하여 나는 드디어 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시는 아이들의 반짝이는 눈빛이며, 시는 아이들의 고요한 숨결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시가 생명이라는 사실을 알았고, 시는 결국 그 생명을 낳게 만들어주는 사랑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나에게 이제 시는 생명이다. 나에게 이제 시는 사랑이다. 그리하여 나에게 있어서 가장 아름다운 시인은 어머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생명을 낳아 길러주신 이 땅의 모든 어머니들은 세상에서 가장 의미 있고 세상에서 가장 생명력이 강한 시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비록 어머니는 될 수 없지만, 어머니가 될 수 있는 사랑을 도와서 고귀한 생명을 함께 낳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있다. 그리하여 나에게도 나의 대표작이 있다. 전생에 낳은 두 아들이 나에게는 가장 소중하고 가장 생명력이 강한 나의 대표작이다. 나는 어떤 시인들보다도 이 땅의 모든 어머니들을 존경하며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생명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나는 비록 내가 직접 어머니는 될 수 없지만 어머니의 마음을 가질 수 있어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시인으로 살고 있다.
하지만 또한 나에게는 세상에서 나를 가장 슬프게 하는 글이 있다. 짧은 글이지만 언제나 나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글이 있다. 어머니의 마지막 글이 있다. 어머니의 마지막 편지가 있다. 아마도, 광주에 있는 병원을 몰래 빠져나오셔서 고향집에서 농약을 마시고 쓰신 것 같다. 그 농약이 온몸으로 퍼지는 순간에 쓰셨을 것만 같다. 신음소리가 새어 나갈까 봐 수건을 입에 물고, 치아가 다 으스러지도록, 입을 앙다물고 쓰신 듯하다. 자식인 나는 평생 용서를 받지 못할 것 같다. 내가 부모님께 유일하게 받은 유산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오래도록 눈물의 왕으로 살았다. 이어도에서 이어도공화국을 만들며 이어도로 살았다. 이어도에 살면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은 나무였다. 나 또한 나무처럼 한 곳에 뿌리를 내리고 오래도록 하늘을 보고 바다를 보고 땅을 보며 나무가 되어 나무로 살았다. 나무는 시와 산문으로 존재한다. 산문이 나무라면 시는 나무의 나이테일 것이다. 산문은 나무 전체를 설명하지만 시는 나무를 톱으로 켜서 나이테만 척 보여주는 형식이다. 그래서 시가 어렵다고들 한다. 하지만 나이테만 보고 나무와 만났을 바람이며 햇빛이며 별빛을 상상하는 행위는 우리들을 더욱 깊고 넓은 세상으로 인도할 것이다.
나는 사실, 서른 살까지 사는 것이 꿈이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왼쪽 가슴이 아팠다. 남몰래 가슴을 안고 쓰러지는 들풀이었다. 내려다보는 별들의 눈빛도 함께 붉어졌다. 어머니는 보름달을 이고 징검다리 건너오셨고, 아버지는 평생 구들장만 짊어지셨다. 달맞이꽃을 따라 가출을 하였다. 선천성 심장병은 나를 시인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아무도 몰랐다. 나의 비밀은 첫 시집이 나오고서야 들통이 났다. 사랑하면 죽는다는 비후성 심근증, 심장병과 25년 만에 첫 이별을 하였다. 그러나 더 깊은 수렁에 빠지고 말았다. 바다는 나를 이어도까지 실어다 주었다. 30년 넘게 섬에서 이어도가 되어 홀로 깊이 살았다. 나는 이제 겨우 다시 돌아왔다. 섬에서 꿈꾼 것들을 풀어놓는다. 꿈속의 삶을 이 지상으로 옮겨놓는다. 나에게는 꿈도 삶이고 삶도 꿈이다. <꿈삶글>은 하나다. 윤동주 시인을 다시 만나서 함께 길을 찾아 나선다. 나의 <세상 읽기와 아름다운 세상 만들기>는 이렇게 모던포엠 가족들과 구독자님들께 먼저 인사를 올리고 함께 새롭게 출발할 수 있어서 영광이다.
대량생산과 대량 복제품들의 시대에 수공업자로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 오직 하나만 존재하는 자신만의 특별한 시 한 편 쓸 수 있는 일은 그 무엇보다도 행복한 일이 될 것이다. 가난한 수공업자인 모든 시인들의 문운을 빈다.
추석(秋夕), 가을 저녁이 참 좋다
가을 저녁이란 말이 참 좋다
내가 아마
가을 저녁쯤 되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가을의 한가운데란 말보다
8월의 한가운데란 말보다
나는 왜 가을 저녁을 더 좋아하는 것일까
나는 어쩌면
가위를 무서워하기 때문일 것이다
가위라는 말을 무서워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무들의 머리를 자르는 전단가위
우리들의 머리카락 자르는 이발가위
애끓는 마음까지 잘라버린 인연가위
배 속에 넣은 채로 봉합해 버린 수술가위
천의 피부를 싹둑, 싹둑 자르고
인연의 실을 뚝, 뚝 끊어버리는 바느질가위
붉은 피 똑똑똑 흘리며 사지를 절단하는 부엌가위
마늘 모가지 따는 농업가위, 공업가위, 어업가위
아, 담벼락에서 거시기를 노리던 그 큰 거시기 가위
사마천의 거시기까지 잘라버린 그 크고 무서운 가위
그리하여 나는 아직도 한가위보다 추석이란 말이 좋다
가을밤 보름달 속에서 큰 가위 하나 보인다
가을 저녁을 가위질하며 큰 보름달 하나 하늘을 가른다
소나무를 타고 올라가는 칡과 등나무가
서로를 미워하며 키만 키우고 있었다
소나무는 목숨에 대하여 말해 주었으나
가슴속으로 흐르는 물길 소리를 듣지 못했다
소나무는 길을 알려주려고 숲과 숲을 이어주는
외나무다리가 되었다
뒤늦게 칡과 등나무는 서로의 강을 보았고
소나무가 말해주는 아름다운 길을 보았다
다투어 하늘로만 향하는 길을 틀어 강을 건넌다는 것은, 낭떠러지의 아득함과 절벽의 막막함으로 가는 길, 그래도 가야만 하는 우리들의 길
칡과 등나무는 외나무다리를 부여잡고 돌고 돌아
으르렁거리는 물살 위에서 겨우 손을 잡을 수 있었다
서로에게 가는 길은 멀고도 험난했으나
칡과 등나무는 서로를 안으면서 길이 되었다
먼 훗날 소나무 다리가 먼 길 떠난 뒤에도
칡과 등나무는 든든한 서로의 다리가 되리라
갈등(葛藤)의 다리가 강을 건너고 있다
https://youtu.be/QQOgjqc0-W8?si=arv2SDc9Nz6OKmbc
https://youtu.be/kbTifW3lIs0?si=kR018CWgwQarz5p9
저는 언제나 시를 생각합니다. 저는 언제나 시인이 되기 위하여 시를 찾고 있습니다. 저는 언제나 시인으로 살기 위하여 시를 살고 있습니다. 저는 언제나 ‘詩’라는 글자를 생각합니다. ‘詩’라는 글자는 재미가 있습니다. ‘詩’라는 글자 속에는 입과 발과 손이 모두 들어있습니다. 그러니까 시는 입으로도 쓰고 발로도 쓰고 손으로도 쓸 수 있습니다. 저는 그중에서 발로 쓰는 시가 가장 좋은 시라고 생각합니다.
詩자는 ‘시’나 ‘시경’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입니다. 詩자는 言(말씀 언) 자와 寺(절 사) 자가 결합한 모습입니다. 寺자는 ‘절’이나 ‘사찰’을 뜻하는 글자입니다. ‘시’는 글로 남기지만 말로 읊조리기도 했으니 言자가 의미 요소로 쓰였습니다. 사찰에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얻기 위해 불경을 읽곤 합니다. 이때는 운율에 맞춰 불경을 읽는데, 詩자에 쓰인 寺자는 그러한 의미를 담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까 詩자는 사찰(寺)에서 불경을 읊는 소리(言)를 ‘시’에 비유해 만들어진 글자로 해석됩니다.
그래서 저도 옛날에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시는 산사에서 하는 말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시는 산사의 종소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한 때 시를 찾아서 산사에 들어가 살기도 하였습니다. 절 사(寺)에 말씀 언(言)이 함께 붙어 있는 것이 시(詩)이므로 시는 산사에서 들려오는 말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산사의 풍경소리가 시라고 생각했습디다
산사의 범종소리가 시라고 생각했습니다
산사의 운판소리가 시라고 생각했습니다
산사의 법고소리가 시라고 생각했습니다
산사의 목어소리가 시라고 생각했습니다
산사의 목탁소리가 시라고 생각했습니다
산사의 죽비소리가 시라고 생각했습니다
산사의 염불소리가 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저는 어느 순간부터, 신이 자연에 숨겨놓은 말씀이 시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하늘의 빛이 시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하늘의 별이 시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하늘의 달이 시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바람이 시가 아닐까, 바다가 시가 아닐까, 강이 시가 아닐까, 여울물 소리가 시가 아닐까, 나무가, 풀이, 꽃이, 가시가, 개구리가, 개구리밥이, 여치가, 버들치가, 은어가 ……
세상의 모든 것들이 시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조금만 눈을 떠봐도 세상에는 보석 같은 신의 말씀들이 별빛처럼 빛나고 있었습니다. 조금만 귀를 기울여 봐도 세상에는 여울물소리처럼 아름다운 노래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저는 드디어 반짝이는 아이들의 눈빛을 찾았고 꿈결 같은 아이들의 숨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드디어 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시는 아이들의 반짝이는 눈빛이며, 시는 아이들의 고요한 숨결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시가 생명이라는 사실을 알았고, 시는 결국 그 생명을 낳게 만들어주는 사랑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에게 이제 시는 생명입니다. 저에게 이제 시는 사랑입니다. 그리하여 저에게 있어서 가장 아름다운 시인은 어머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생명을 낳아 길러주신 이 땅의 모든 어머니들은 세상에서 가장 의미 있고 세상에서 가장 생명력이 강한 시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비록 어머니는 될 수 없지만, 어머니가 될 수 있는 사랑을 도와서 고귀한 생명을 함께 낳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저에게도 저의 대표작이 있습니다. 전생에 낳은 두 아들이 저에게는 가장 소중하고 가장 생명력이 강한 저의 대표작입니다. 저는 어떤 시인들보다도 이 땅의 모든 어머니들을 존경하며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생명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세상에서 저를 가장 슬프게 하는 글이 있습니다. 짧은 글이지만 언제나 저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글이 있습니다. 어머니의 마지막 글이 있습니다. 아마도, 광주에 있는 병원을 몰래 빠져나오셔서 고향집에서 농약을 마시고 쓰신 것 같습니다. 그 농약이 온몸으로 퍼지는 순간에 쓰셨을 것만 같습니다. 신음소리가 새어 나갈까 봐 수건을 입에 물고, 치아가 다 으스러지도록, 입을 앙다물고 쓰신 듯합니다. 자식인 저는 평생 용서를 받지 못할 것 같습니다. 제가 유일하게 받은 유산이 바로 이 유서입니다.
득음을 위한 독공이 한창이다
사과나무속에서
고려청자 굽는 소리 들린다
조선백자 깨뜨리는 소리 들린다
수없이 많은 사금파리들이 쌓인다
사과나무속에서
사과를 미리 빚어보고 구워보고 깎아본다
벚꽃 개나리 진달래 산수유
성질 급한 봄꽃들이 속옷 바람으로 뛰쳐나와도
사과나무는
진득하니 사과나무속에서 사과만을 만들고 있다
울컥, 울혈을 토해내고 있다
세한도만 그렸다
유배지에서
오직 세한도만 그렸다
말도 잃었다
울음도 잃었다
나는 어느새 소나무가 되었다
사람 밖에 있던 나는 사람 안으로
길 밖에 있던 나는 길 안으로
이제 돌아가련다
서툴게라도 말하고
서툴게라도 통곡하련다
세한도 밖으로
솔가지 하나 빠져나온다
눈이 내린다
하늘에서 말씀이 내려오신다
하느님 말씀이 하늘에서 내려와 쌓인다
눈이 내린다
눈의 발뒤꿈치가 조심스럽다
노랗게 익은 귤이 병아리처럼 파고든다
감귤나무 위에도 사뿐히 눈이 내려 쌓인다
감귤나무 아래 허름한 개집을 눈이 기웃거린다
개집 안이 은총으로 가득하다
마리아의 자궁처럼 어미개의 문이 열리고 있다
문밖으로 살짝 내미는 발가락
멈칫, 하다가 슬며시 첫발을 내딛는다
미끄러운 세상의 길을 핥아주는
어미개의 혀,
고요히 눈이 쌓인다
가슴을 열고 심장에 칼을 대어본 사람은 안다
피 속에는 혈장과 혈소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주체하지 못하는 엽록소가 가득하다는 것도 안다
큰 수술을 받고
링거와 영양제와 혈액주머니를 주렁주렁 매달고
인공호흡기와 함께 회복실에서 깨어난 사람은 안다
피, 엽록소 속에는 이미 단풍으로 가득함을 안다
피는 처음부터 붉고 노랗고 푸른 단풍잎임을 안다
링거와 영양제와 혈액주머니 같은 단풍도 다 지고
뼈만 남은 나무는
겨울에 땅 속보다 하늘이 더 춥다는 것을 알고 있다
겨울나무는 하늘에 사는 식구들을 위하여
스스로 하늘에 주삿바늘을 꽂고 하늘에 수혈을 한다
땅 속의 따뜻한 혈액을 수혈받은 별들이 눈을 뜬다
며칠 후면 고드름도 땅에 주삿바늘을 꽂고
하늘의 영혼을 지상에 사는 식구들에게 수혈할 것이다
그렇게 땅과 하늘은 피를 나눈 형제로 함께 살 것이다
당신은 나에게 등을 보이고 떠나버린 등나무였다
등만 보이던 그 등나무가 오늘은 등꽃을 켜고 있다
섬들이 징검다리처럼 있다
섬들이 징검다리처럼 물속에 발을 담그고 있다
섬들이 징검다리가 되어 나를 밟고 지나간다
내 안에 섬들의 발이 있다
내 가슴속에 섬들의 발자국이 있다
내 가슴속에 이어도가 있다
내 가슴속에 이어주는 섬이 있다
나는 징검다리 같은 이어도가 된다
이어도 오두막 앞에
감나무 한 그루 서 있다
까치 두 마리 날아와
감 하나를 함께 쪼아 먹는다
이 요망한 것들이
감이나 쪼아 먹고 갈 일이지
혼자 사는 내 앞에서
기어이 뽀뽀를 하고 난리다
감보다 먼저 몸이 더 달아오른다
에이, 이 몹쓸 것들 같으니라고
지나가던 바람이
키득거리는 소리에 감이 떨어진다
나는 새들이 먹던 감을 주워 먹는다
아, 참 달다
새 입술이 참으로 달고 맛있다
산책은
씻김굿이다
발로 하는 세수다
발로 씻는 씻김굿이다
발로 눈을 씻는 씻김굿이다
내 발로 내 눈을 씻는 씻김굿이다
나는 날마다 내 발로 내 눈을 씻는다
나는 날마다 내 발로 내 눈을 씻는 씻김굿을 한다
산토끼 한 마리 가만 앉아서
발로 세수를 한다
산토끼 한 마리 산책을 하고 있다
산 새 한 마리 가만 앉아서
깃을 다듬던 부리를 발로 씻는다
산 새 한 마리 산책을 하고 있다
물소리가 내 귀를 씻어준다
바람소리가 내 몸을 씻어준다
쑥 향기가 내 코를 씻어준다
하늘을 쓸고 있는 나무들이 내 눈을 씻어준다
꽃들이 내 영혼을 씻어준다
하늘이 하늘까지 내 길을 닦는다
나의 산책은 바리데기를 만나
길을 닦는 씻김굿이다
바람소리가 나를 씻어준다
물소리가 내 귀를 씻어준다
내 발이 나를 씻어준다
만나는 그대가 내 눈을 씻어준다
만나는 그대가 내 길을 닦아준다
나를 스스로 씻겨주는 씻김굿 춤이다
나의 산책은 스스로 씻는 씻음 굿 춤이다
모래밭이 온통 파도무늬로 가득하다
파도 속으로 떠나간
모래알 하나 때문에
모래알 하나가 평생
파도 속을 뒤지고 다닌다
모래알 하나가
모래알 하나를 찾아다닌다
평생 찾아서 헤맨다
그리하여 모래밭은 온통
그를 찾아다닌 길로 가득하다
가슴속 모래밭까지 온통 파도무늬로 가득하다
나뭇잎은 손일까 발일까 나뭇잎은 손 같기도 하고 발 같기도 하다 새들이 벗어놓은 신발 같기도 하고 장갑 같기도 하다 나뭇잎은 또한 입 같기도 하고 귀 같기도 하고 코 같기도 하다 태어날 때 눈이었던 나뭇잎이 자꾸만 코가 되고 입이 되고 귀가 된다
나뭇가지는 팔일까 다리일까 나뭇가지는 팔 같기도 하고 다리 같기도 하다 새와 새집을 끌어안고 포옹하는 것을 보면 팔 같은데, 나뭇가지 사이에 돌멩이를 끼워 시집을 보내거나, 접을 붙이거나, 열매를 낳아 기르는 것을 보면 다리 같기도 하다
나무 기둥은 몸통이 맞는 것일까 그 가슴속에 심장은 있는 것일까
나무뿌리는 발일까 손일까 가장 낮은 곳에서 떠받들고 살아가니 발 같은데, 평생 흙만 파먹고 살아가니 시골 어머니 손 같기도 하다
다시 나무를 본다 한 번 더 생각하고 보니 나무가 나무로 보인다 그동안 나는 나무를 자꾸만 사람으로 보려고 해서 나무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나무는 그 무엇도 아닌 오직 하나뿐인 나무인 것이다
가랑비에 젖고 있는 가랑잎 한 잎
젖은 몸으로 겨우 묵언 수행 중이다
바다에 던져졌던 빈 항아리 하나
20년째 묵언 수행 중이다
뚜껑은 아직도 찾지 못하고
그나마
허술한 밑까지 통째로 빠져버렸다
처음 10년 동안은
도저히 말을 할 수 없었다
다시 10년 동안은
수없이 많은 말을 하여도
입 밖으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바다에 빠진 빈 항아리 하나
20년째 몸과 마음을 비우고 있다
뻥 뚫린 가슴속으로
물고기들이 헤엄쳐 지나가고
푸른 바닷물이 수시로 넘나들었다
하늘바다에 머릿속까지 감고 서 있는
겨울나무 한 그루 가까스로 묵언 수행 중이다
오지 않을 사람을 밤새도록 기다리는 때가 있다
오지 못할 사람을 대책 없이 기다리는 때가 있다
기다리는 사람은 오지 않고 새벽이 액자처럼 걸려있다
방 안에 액자 하나 걸려있다
사연이 참 많은 액자 하나 걸려있다
나무틀 액자 하나 아침처럼 걸려있다
내 왼쪽 가슴속 깊이 박혀있는 못 하나에
액자 하나 지금까지도 걸려있다
그 액자 속에 있던 사람 대신
지금은 내가 들어가 갇혀있다
1986년이었던가 1987년이었던가
제주도로 수학여행 왔던 내가 들어있다
한라산이었던가 어느 오름이었던가
안경 쓴 내 뒤로 소들이 걸어가고 있다
시여, 내가 낳은 시들이여!
황소의 쟁기질처럼 끊임없이 땅을 갈아엎으며 건강히 자라는 일꾼이길 바란다
이런 글자들도 함께 갇혀서 기침을 하고 있다
벽에 걸려있던 액자를 내린다
내 가슴속에 갇혀있던 액자를 꺼낸다
그 액자 안에 갇혀있던
나와 나의 글자들을 꺼내어 해방시킨다
그리고 다시 비어있는 액자 틀만 벽에 건다
그 빈 액자에 느닷없이 새로운 아침이 들어앉는다
나는 이제 오지 않을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
나는 이제 오지 못할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
나는 이제 내가 스스로 아침 같은 사람에게로 간다
아침 시에게로 간다
― 꿈과 이어도 공화국
*
나에게는 작은 꿈이 하나 있다
나는 아름다운 숲을 하나 가꾸고 싶다
그 숲에 나무를 심고 나무를 가꾸며
나무처럼 살고 싶다
그 숲 속에 조촐한 집을 하나 짓고 싶다
삶에 지친 영혼들을 위한
쉼터를 하나 만들고 싶다
아무런 부담 없이
누구라도
언제든지
찾아올 수 있으면 좋겠다
나는 그들과 함께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나는 그들과 함께
그들의 나무를 심어주고 싶다
숲에 나무를 함께 심으면서
또 다른 희망의 나무를 심고
사랑의 씨앗을 뿌려주고 싶다
다시 세상 속으로 돌아간 다음에도
나는
그들과 내가 함께 심었던
그들의 나무가 자라나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서
안부 편지와 함께 가끔 보내주고 싶다
세상으로 돌아간 그들은
언제라도
자신의 자라나는 나무를
보기 위하여 다시 올 수 있으면 좋겠다
직접 올 수 없더라도
늘 가슴속에서 함께 자라나는
자신의 그 나무 때문에
더욱 힘을 얻을 수 있으면 참 좋겠다
그리하여 우리가 끝끝내
함께 가야 할 길
그런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데
내가
조금이라도 도움을
줄 수 있으면 나는 정말 좋겠다
*
이어도는 이어주는 섬이다
이어도는 너와 나를 이어주는 섬이다
이어도는 우리들을 이어주는 섬이다
이어도는 꿈과 현실을 이어주는 섬이다
이어도는 현실과 미래를 이어주는 섬이다
이어도는 삶과 죽음을 이어주는 섬이다
이어도는 가장 멀리까지 이어주는 섬이다
그리하여 이어도에서는 죽어도 죽지 않는다
그런 이어도 들어가는 항구에
이어도 오두막을 먼저 짓는다
그런 이어도 들어가는 숲 문에
이어도 베이스캠프를 먼저 친다
이어도 오두막은 성과 속을 이어주는 섬 문이다
이어도 오두막은 성과 속을 이어주는 산 문이다
이어도 오두막은 성과 속을 이어주는 오솔길이다
우리들을 이어주는 이어도 공화국을 위하여
이어주는 이어도 오두막을 먼저 만들기 시작한다
[출처] 배진성 글과 시중에서| 작성자 승광이
나의 운명은 나의 심장이 결정했다. 나의 운명은 나의 가슴이 결정했다. 나의 운명은 나의 가난이 결정했다. 나의 운명은 나의 건강이 결정했다. 나의 운명은 나의 문학이 결정했다.
째깍째깍, 나의 가슴속에서 시계 소리가 들린다. 쿵쿵쿵, 나의 심장 속에서 북소리가 들린다. 쓱싹쓱싹 반월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2017년 12월 22일, 밤이 가장 길다는 동지에 나의 심장은 멈추어 대대적인 수술을 받았다. 사랑하면 죽는다는 ‘비후성심근증’이었다. 1990년 6월 8일에도 내 가슴은 열리고, 나의 심장은 멈추어 ‘대동맥판막하협착증’이란 병명으로 수술을 받았으니, 나의 심장은 이렇게 두 번 죽고 세 번 살아났다.
이 심장병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병이다. 유전자 돌연변이에 의한 병이라고 밝혀졌다. 그러니까 내가 아마 산부인과 병원에서 태어났으면 나의 병은 태어나면서 바로 알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시골에서, 그것도 지질히 도 못 사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알 수 없었다. 심장병의 경우에는 대부분 청진기만 대어 봐도 이상 유무를 알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불행하게도 이 사실을 너무 늦게 아무도 모르게 나 홀로 알았다.
나는 심장 전문가는 아니지만 50년 넘게 심장병과 함께 살다 보니 심장에 대한 각별한 지식들을 직접 몸으로 체험하고 있다. 아마도, 우리나라 의학계에서는 나와 같은 증상을 보이는 심장질환에 대한 정의를 최근에 내린 듯하다. 내가 1차 수술을 받을 당시에는 ‘비후성심근증’ 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냥 ‘대동맥판막하협착증’이라고 하였다. “대동맥 판막 아래쪽에 선천적으로 혹이 있어서, 좌심실에서 대동맥으로 나가는 출구가 좁아져 있다. 그래서 온몸으로 나가는 피의 양이 적어서, 여러 가지 심각한 문제들을 유발하고 있으므로 그 혹을 떼어내면 된다.”라고 말씀하셨다. 물론, 거기까지 알아내는 데에도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내가 심장수술을 받은 서울대학교병원에서는 ‘비후성심근증’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그 원인과 증상 등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젊은 사람들의 심장 돌연사의 대부분은 바로 이 ‘비후성심근증’ 때문이라고 한다. 어느 드라마의 주인공이 바로 이 ‘비후성심근증’으로 돌연사하는 장면 때문에 일반인들에게도 많이 알려졌다고 한다. 특히, 사랑하면 죽는 병으로 알려지게 되어서 각별한 관심을 받기도 하였다고 한다. 남녀가 함께 사랑을 하게 되면 우리들의 몸이 피를 많이 필요로 하는데, 온몸으로 나가는 출구는 좁아져있고 심장은 더욱 힘차고 부지런히 뛰어야만 하는데, 병든 심장이 이를 감당하지 못하고 급사하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비후성심근증’ 환자들은 언제라도 돌연사를 당할 수 있고 갑자기 복상사를 당할 수 있으므로 과로뿐만 아니라 과도한 사랑 또한 자제해야만 한다. 이 병을 가진 사람은 어떤 일이라도 무리하지 않고 늘 조심해야만 한다. 그야말로 사랑을 하려면 목숨을 걸고 해야만 하는 위험천만한 병이라고 한다.
* 비후성심근증
정의 ― 좌심실 비후를 유발할만한 대동맥판막 협착증이나 고혈압과 같은 다른 증세 없이 좌심실 벽이 두꺼워지는 심장 질환이다. ……,
원인 ― 비후성심근증은 상염색체 우성으로 유전된다. 11개 근절 유전자의 돌연변이가 비후성심근증의 발생과 관련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증상 ― 좌심실의 수축 기능이 유지되면서 심부전의 증상이 발생하는 것이 특징적이다. 운동 시 호흡 곤란, 피로감, 앉아서 몸을 굽히지 않으면 숨쉬기가 힘든 기좌 호흡, 발작성 야간성 호흡 곤란 등이 특징적인 증상이다. 협심증과 유사한 특징적인 흉통이 동반될 수 있는데 이는 주로 좌심실의 미세혈관 이상에 의한 허혈 때문으로 생각된다. 실신이나 어지럼증, 두근거림 등의 증상이 부정맥에 의해 나타날 수 있으며, 심장 돌연사가 발생할 수도 있다. 심부전 증상은 주로 좌심실의 이완 기능 장애에 의한 것이므로 좌심실 유출로의 폐색이 있는 환자와 없는 환자 사이에 증상의 차이는 별로 없다.
앞에서 인용한 의학정보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저 지루하고 재미없는 글일 것이다. 하지만 그 내용의 직접 당사자인 나로서는 글자 하나하나가 나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하고, 나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송곳이거나 칼끝으로 다가온다.
나는 초등학교 3학년부터 지게질을 하였다. 물론 꼴 베기와 나무하기는 그전부터 하였다. 내가 지게질을 시작하면서 짝사랑도 시작했다. 나는 남몰래 선생님을 짝사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짝사랑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 선생님께서 여름방학 때 여수 오동도 앞바다에서 돌아가셨다. 오동도 앞바다 붉은 동백꽃으로 피어나고 말았다. 그렇게 나의 첫사랑은 사랑의 행복이 아니라 이별의 아픔으로 끝장나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나는 달리기를 잘하지 못했다. 진똘이 놀이도, 나이 먹기 놀이도 잘하지 못했다. 조금만 달려도 왼쪽 가슴이 아팠다. 가슴이 아파서 잘 달릴 수 없었다. 처음에 나는 내 몸이 허약해서 그런 줄 알았다. 그래서 나는 몸을 튼튼하게 하려고 밤이면 학교 운동장에 가서 남몰래 달리기 연습을 하였다. 나는 누구에게든지 말을 잘하지 못했다. 나는 철저한 외톨이였다. 나는 내 몸이 아파도 아프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나는 참 바보 멍청이였다.
나는 체육 책에서 읽었다. 나처럼 왼쪽 가슴이 아프면 심장병일 가능성이 많다는 이야기를 체육 책에서 읽었다. 나는 그때 나의 예금통장이 따로 있었다. 누나와 형님들이 돈이 없었기 때문에 중학교도 가지 못하는 것을 보고 나는 꼭 내 힘으로 중학교를 가고 싶었다. 그래서 아주 어린 시절부터 오리를 기르고 토끼를 기르고 겨울이면 산에 가서 산토끼도 잡고 꿩도 잡아서 팔았다.
나는 나의 통장에서 돈을 찾아서 곡성 읍내 병원에 남몰래 혼자 찾아갔다. 늙은 의사 선생님께서 내 왼쪽 가슴에 청진기를 대어보시더니 바로 심장병이라고 말씀하셨다. 심장 뛰는 소리만 들어봐도 잡음이 많고 심장이 힘들어하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하셨다. 틀림없이 선천성 심장병이라고 단언하셨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광주에 있는 큰 병원으로 가서 정밀검사를 받아보라고 하셨다. 나는 내가 심장병 환자라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나는 온몸이 축 처지고 말았다.
나는 며칠 후에 또다시 남몰래 광주까지 가서 검사를 받았다. 선천성 심장 판막증이라고 말씀하셨다. 다른 치료 방법은 없다고 하셨다. 심장 판막증은 무조건 수술을 받아야 하는데 수술비가 엄청 비싸다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내가 심장병 환자라는 사실을 알고도 아무에게 말을 할 수 없었다. 우리 집 가난이 나의 입을 스스로 철저하게 틀어막았다.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방직공장에 취직한 누나가 흑백텔레비전을 사 오셨다. 그 당시에는 수사반장과 수사본부, 그리고 전우와 타잔이 인기였다. 그런데 나의 눈에는 선천성 심장병 어린이들이 너무 자주 보였다.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님께서 어린이 심장재단을 만들어 홍보하던 시절이었다. 선천성 심장병 어린이들을 외국으로 데려가서 심장수술을 시켜 건강해진 모습으로 돌아오는 화면이 많이 나오던 시절이었다. 나는 그 화면을 볼 때마다 끝까지 보지 못하고 나 홀로 먼 들판으로 뛰어나가 홀로 펑펑 울었다. 그러면 나를 내려다보던 별들도 눈가에 눈물이 함께 맺혔다. 하지만 다른 가족들은 이런 사실을 전혀 알 수 없었다.
그 당시에는 우리나라 의술이 발전하지 못해서 심장수술 성공률도 높지 않았다. 그리고 의료보험도 되지 않아서 수술비용이 엄청 비싸다고 하였다. 집안에 심장병 환자 하나 있으면 집안이 망할 정도라고 하였다. 그래서 나는 홀로 결심했다. 더 이상 망할 것도 없을 정도로 가난한 우리 집 형편으로는 도저히 수술비를 마련할 수 없을 것이다. 자식이 아파 수술을 해야 하는데 수술비가 없어서 수술을 시키지 못하는 부모님의 마음이 어떨까? 어쩌면 심장이 아픈 나보다 오히려 부모님의 마음이 더욱 아프고 안타까울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차라리 철저히 비밀로 하는 것이 더 좋겠다. 나 혼자 남몰래 아프다가 홀로 사라지면 남은 가족들은 그래도 나를 잊고 잘 살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바보 같은 결심을 하고 말았다.
그 이후로 나는 나의 심장이 아픈 것보다 오히려 나의 심장병을 가족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더욱 노력했다. 하지만 내 몸이 자라면서 내 몸은 더 많은 피를 요구했고 나의 병든 심장은 더욱 힘들어했다. 나는 계단이 점점 더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계단을 한꺼번에 오르지 못하고 계단 중간에서 쪼그려 앉아 쉬어야만 했다. 계단을 오르다가 쪼그려 앉아 쉬는 사람들은 대부분 심장병 환자들이 많다. 심장병 환자들은 앉아서 몸을 굽히지 않으면 숨쉬기가 힘든 기좌 호흡이라는 것을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나는 중학교만 졸업하고 취직해서 돈을 벌고 싶었다. 내가 직접 돈을 벌어서 수술을 받고 싶었다. 그런데 중학교 3학년 때 국어 선생님께서 꼭 고등학교는 가야만 한다고 말씀하셨다. 돈이 없어도 공부할 수 있는 학교라며 원서까지 직접 써 주셨다. 학비뿐만 아니라 기숙사비도 모두 무료이고, 옷이며 신발까지 모두 무료인 학교라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입학 한, 서울에 있는 수도전기공업고등학교는 나의 삶을 많이 바꾸어놓았다. 그 당시 한국전력공사에서 운영하는 수도 전기 공고를 비롯하여 철도공사에서 운영하는 철도 공고 그리고 구미전자공고 등이 있었다.
나의 서울 생활은 그렇게 강남에서 시작되었다. 주위가 온통 배 밭이었던 고등학교 기숙사 생활이 시작되었다. 은마아파트에서 걸어가면 중간에 일본인학교 딱 하나만 있었다. 학교 뒤에는 대모산이 있었고 앞에는 구룡 마을과 개울이 있었다. 배 밭 주위에는 작은 시골마을이 있었는데 비만 오면 우리 학교 강당으로 대피해 와서 며칠씩 지내다가 돌아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실습 위주의 공업학교 생활보다 오히려 기숙사 생활이 더 힘들었다. 완전히 군대식이었다. 연대장, 대대장, 중대장, 소대장도 무섭고 선배들이 무서웠다. 바로 위층에는 1년 선배들이 있었는데 난방용 스팀라인을 두드려 신호를 보내면 우리들은 언제라도 바로 뛰어올라가야만 했다. 선배는 그야말로 하늘이었다. 선배는 타오르는 태양이었고 후배는 꺼져가는 촛불이었다. 커다란 돌에 ‘면벽삼년’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고 우리는 3년 동안 “나 하나는 수도의 전부다”라는 구호를 입에 달고 살았다. 특히, 매일 밤마다 있었던 저녁 점호 시간이 가장 긴장되고 힘이 들었다. 모기가 물어도 움직일 수 없었고 등이 가려워도 긁을 수 없었다. 우리들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먼지 하나라도 발각될까 봐 잔뜩 겁먹은 얼굴로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저녁 점호를 무사히 받기 위해서 방 청소를 꼼꼼하게 하고 사물함 정리를 아무리 잘해도 중대장과 대대장들은 꼭 하나씩 지적을 하였다. 방문 바로 옆, 벽을 등지고 복도에 줄 서 있던 우리들은 엎드려뻗쳐를 해야만 했다. 특히 사물함의 이불뿐만 아니라 런닝과 팬티 그리고 양말까지 모두 사각으로 각이 맞지 않으면 우리들은 어김없이 지적을 당하고 기압을 받아야만 했다. 그래서 많은 친구들은 아예 사각으로 만들어 꿰매서 점호 때마다 사물함에 놓고 실제로 입거나 신는 속옷과 양말은 가방에 숨겨놓곤 하였다.
우리들은 또한 밤낮으로 자주 운동장으로 불려 나갔다. 자정에 운동장에 모여 운동장 흙바닥에서 굴러야만 했다. 우리 전교생은 새벽마다 운동장에 모여 대치동에서 오신 태권도 사범의 구령 소리에 맞추어 새벽하늘이 놀라 깨어나도록 힘차게 기합을 넣으며 태권도를 해야만 했다. 새벽 운동이 싫어서 캐비닛에 숨어 있다가 사감 선생님께 걸려 벌점과 함께 심하게 혼이 나는 일도 많았다.
거기가 바로 서울 강남의 개포동이었는데 우리들은 개도 포기한 동네라고 말하곤 했다. 그런데 갑자기 땅에 파일을 쿵쿵쿵 박기 시작하고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개포동이 개발되기 시작했다. 많은 아파트들이 들어서고 유명한 고등학교들이 이사 오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내가 졸업할 무렵에는 개들도 수표를 물고 다닌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부자 동네로 바뀌고 말았다.
나는 서울생활을 시작하면서 나의 꿈이 바뀌었다. 고향을 떠나니 고향이 더욱 그리웠다. 나라를 떠나면 모두가 애국자가 된다고 하더니 고향을 떠나니 지지리도 못 살고 도망치고 싶었던 고향을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비로소 책을 읽기 시작했다. 고향에서는 교과서 외에는 잘 읽을 수 없었던 많은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밤 점호가 끝나면 우리는 모두 소등하고 강제로 잠을 자야만 했다. 하지만 나는 몰래 방과 복도를 빠져나와 옥상으로 올라갔다. 별이 빛나는 밤마다 나는 그렇게 옥상에서 달빛으로 책을 읽었다. 나는 그렇게 점점 달빛과 별빛에 젖어 시인의 꿈을 꿈꾸기 시작했다.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조금씩 크게 떠지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나의 꿈은 재벌이 되는 것이었다. 너무나 가난해서 그런 꿈을 꾸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나의 시야가 좀 넓어지고 나 자신을 깊이 돌아보니 재벌보다는 시인이 더 어울릴 것만 같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에는 재벌이 되기 위해서는 정치와 결탁하거나 부정한 방법으로 하지 않으면 재벌이 되지 못할 것만 같아서 아예 나의 꿈을 바꾸고 말았다. 결과도 중요하지만 과정 또한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서 꿈을 바꾸었다. 그리고 또한 나의 꿈을 바꾸게 된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다.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밤새 코피를 흘린 일이 있었다. 원인은 알 수 없었다. 기숙사 한 방에 여섯 명씩 함께 살았다. 그렇게 열 개의 방에 60명의 한 반이 살았고 한 과는 두 개의 반이었다. 그리고 다섯 개 과가 있었다. 그런 기숙사에서 잠을 자는데 갑자기 초저녁부터 코피가 나오기 시작해서 밤새도록 멈추지 않았다. 베개와 이불이 다 젖도록 많은 코피를 흘렸다. 기숙사와 학교가 함께 있었는데 양호실은 도서관 옆에 있었다. 낮에는 양호실에 간호사가 있었지만 밤에는 양호실 담당 학생들만 있었다. 그 학생들은 모두 자원봉사자들이었다. 그래서 3학년 형이 밤새 나를 간호해 주셨다. 그렇게 하룻밤을 꼬박 함께 지내고 나서 나는 그 형님과 친해지게 되었다. 그런데 여름방학이 끝나고 다시 학교로 돌아갔는데 그 형님이 보이지 않았다. 그 형님은 유행성출혈열로 그만 돌아가시고 말았다. 그 죽음을 계기로 나는 삶과 죽음에 대하여 더욱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나의 삶의 방향을 바꿔 시인이 되기로 결심을 하였다.
나는 몇몇 친구들을 모아 시를 쓰기 시작했다. ‘어긋니’라는 동인을 만들었다. 우리들은 시집을 읽고 인문서적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백일장에도 나갔다. 우리들의 모토는 하나였다. “공돌이도 시를 쓸 수 있다.” 우리들은 그렇게 공돌이 시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친구들의 시를 모아 동인지도 만들었다. 동인 중에 글씨를 잘 쓰는 친구가 있어서 그 친구가 우리들의 시를 백지에 직접 쓰고 삽화를 그렸다. 그리고 나는 대학가 복사기 있는 집에 가서 책을 만들어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렇게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공고에서 공돌이가 되어 비로소 시를 쓰기 시작했다. 나의 문학 병은 그렇게 더욱 깊어졌다. 나는 나의 심장병을 잊을 정도로 깊숙이 문학이라는 병을 앓게 되었다. 심장병 대신 문학병 환자가 되었다. 그 당시 나의 별명은 ‘원로시인’이었다. 내가 좀 노티 나게 시를 쓴다고 하여 친구들이 붙여준 별명이었다. 하지만 나는 친구들에게 나의 별명을 바꿔달라고 요구했다. 나는 자연과 함께 자연인으로 살고 싶으니까 차라리 ‘원시인’이라고 바꿔줄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리하여 나는 스스로 글자 하나를 지우고 원시인이 되었다.
그 당시 나는 “시(詩)는 절(寺)에서 하는 말씀(言)”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절로 들어갔다. 해인사로 갔다. 해인사에서 참선과 절을 배웠다. 그리고 팔만대장경을 배웠다. 그러던 어느 날 해인사 위에 있는 성철스님이 계신다는 백련암 가는 길이었다. 해인사를 막 빠져나와 산을 오르는데 처음 보는 건물이 하나 있었다. 나도 모르게 그 집으로 끌려 들어갔다. 그곳은 스님은 스님이되 스님 같지 않은 스님들이 기거하는 곳이었다. 용맹정진을 포기하고 자포자기를 한 스님들 같았다. 담배도 피우고 술도 마시고 그저 죽지 못해 사는 사람들 같았다. 내 눈에는 초라한 양로원 같이 보였다. 여러 가지 이유들로 큰스님이 되지 못한 스님들이었다. 나는 나의 미래를 생각해 보았다. 나도 그 스님들처럼 먼 훗날 그곳에 있을 것만 같았다. 어쩌면 나는 이미 해인사를 뛰쳐나올 궁리를 하고 있었을 것만 같았다. 나의 병든 몸으로는 수행이 어려울 것만 같아서, 참선을 할 때에도 그렇고 108배를 할 때에도 너무 많이 숨이 차서 이미 도망갈 궁리를 하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나는 그 길로 하산하여 부천에 있는 어느 학생회에 들어갔다. 그 당시에는 그런 복지회가 많이 있었다. 학교는 가고 싶은데 돈이 없는 아이들을 모아 앵벌이를 시키는 곳이었다. 나는 주로 서울역에서 수원역까지 기차를 타고 가면서 날짜가 지나버린 주간지를 파는 일을 하였다. 그때에는 서울역에서 입장권을 팔았다. 가족이나 친척들을 배웅하는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는 입장권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입장권으로 기차에까지 올라탔다. 그리고 서울역에서 수원역까지 가는 동안 철 지난 주간지를 팔았다. 그때는 홍익회 직원들이 가장 무서웠다. 그 당시 기차에는 홍익회 직원들이 언제나 있었다. 기차 안에서 수레를 밀고 다니며 계란도 팔고 김밥도 팔고 음료수도 팔고 주간지도 파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합법적으로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었고 나는 불법적으로 몰래 장사를 하는 고학생이었다. 그들은 또한 그 주간의 정식 새 주간지를 팔았고 나는 철 지난 주간지를 팔았다. 엄밀히 말하면 나는 장사꾼이 아니라 앵벌이 꾼이었다.
그러다가 나는 홍익회 직원에게 딱 걸리고 말았다. 그렇게 홍익회 직원에게 잡혀 실컷 혼나고 수원역에 내렸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니 별들이 유난히 슬프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나는 남은 주간지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그 학생회에서 뛰쳐나왔다. 그리고 나는 인력시장으로 나가 일당벌이 생활을 했다.
그러던 어느 가을날 헌책방에서 <문예중앙>을 읽었다. 이능표 시인과 이창기 시인의 시가 실려 있었다. 신인상을 받은 작품이 실려 있었다. 시들이 참 좋았다. 나도 그 진짜 시인들처럼 진짜 시를 잘 쓰고 싶었다. 약력을 보니 두 시인 모두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 출신이었다. 나도 그 학교를 나오면 진짜 시인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직접 용기를 내어 그 학교로 찾아갔다. 문예창작과 교수실에 최인훈 교수님과 오규원 교수님이 계셨다. 나는 꼭 이 학교에 입학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학력고사 시험을 보고 들어오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꼭 좋은 시인이 되고 싶다고 말씀드렸더니, 소설은 쓰고 싶지 않느냐고 물으셨다. 그래서 나는 소설은 거짓말이라서 쓰고 싶지 않고 진실만을 말하는 시를 쓰고 싶다는 대답을 하였다. 지금 다시 한번 생각하니 참으로 어리석은 대답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1986년에 서울 남산에 있는 서울예대에 들어가게 되었다. 아마도 나의 삶에 있어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 바로 그 남산 시절이었을 것이다. 그 시절 나는 하루 24시간을 온통 시만 생각하고 시만 썼던 시절이었다. 물론 최인훈 교수님과 최창학 교수님의 소설 수업시간에도 단 하루도 빠지지 않았고 윤대성 교수님의 희곡 수업 시간 또한 단 하루도 빠지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시를, 2년 동안 4년 치의 수업을 들었고 천 편도 넘는 시를 썼다.
1학년 때에는 이근배 교수님께 시를 배웠는데, 다른 반 수업인 최하림 교수님 수업을 도강하고 2학년 수업시간에 들어가 오규원 교수님 시 수업을 들었다. 교수님께서는 내가 도강하는 줄 아시면서 너그럽게 눈감아 주셨다. 그리고 2학년 때에는 당연히 오규원 교수님 시 수업을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들었으며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1학년 교실에 들어가 또다시 시 수업을 도강하였다. 그리고 하숙집에 돌아와서도 책을 읽거나 시 쓰는 일에 게으르지 않았다. 그 결과 나는 두꺼운 개인 시집을 복사하여 만들었고 많은 상을 받았지만 특히 오규원 교수님께서 직접 뽑아주신 예장 문학상에 당선되었을 때 가장 기뻤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움도 있었다. 나는 2학년 2학기 수업을 듣지 못했다. 마무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다. 한국전력 공사로부터 최후통첩을 받고 잠시 고민하였다. 나는 고등학교를 한전 장학생으로 나왔는데 졸업 후에 한전에 입사하는 조건이었다. 하지만 나는 깊은 문학 병에 걸려 한전 입사를 포기하고 시인의 길을 가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졸업을 앞두고 고민에 빠졌다. 가을까지 한전에 입사하지 않으면 입사할 의사가 없는 것으로 간주하고 조치하겠다는 최후통첩을 받은 것이다. 그래서 나는 교수님과 의논한 결과 수업을 듣지 않아도 리포트를 제출하면 졸업시켜 줄 테니 한전에 입사하라고 말씀해 주셨다. 그동안 도강한 것들 합치면 수업일수가 넘칠 정도이니 그렇게 하라고 배려해 주셨다.
그렇게 나는 1987년 가을에 학업을 다 마치지 못하고 한전에 입사하게 되었다. 한전 연수원에서도 나는 발전소 교육보다 학교에 제출할 리포트를 쓰고 시를 쓰느라 바빴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오직 시만 썼던 시간들이 아쉬웠다. 대학생활이란 어쩌면 학교 수업도 중요하지만 같은 또래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도 중요한 일일 것이다. 그리하여 어느 한 편으로는 아쉬움이 많았다. 그렇다고 친구들과 전혀 어울리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다. 친한 친구들이 몇 명 있었는데 여름방학 때 그 친구들 집에 함께 놀러 갔던 기억이 참 오래도록 남아있다. 지금도 그 기억이 선명하다. 전라도 장수면의 면장 아들이었던 홍이표 집에 갔을 때도 좋았고, 소록도를 지나 어느 섬에 살았던 한경은 친구 집에서의 하룻밤도 참으로 좋았다. 나는 그 섬에 들어가면서 생전 처음으로 배를 타 보았다. 자동차도 함께 싣고 섬으로 들어가는 도항선을 탔는데, 그림으로만 보았던 배들 때문에 나는 처음에는 배가 거꾸로 가는 줄 알았다. 모든 배들은 언제나 앞이 뾰족한 줄로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나중에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이 된 「길이 있는 풍경」은 바로 이때 쓴 작품이었다. 홍이표네 집에서 자고 새벽에 일어나, 집 바로 곁에 있었던 고추밭에서 썼다. 그리고 그날 아침부터 덕유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때 올라가서 보았던 덕유산 풍경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동안 심장이 아파서 높은 산을 오르지 못했는데 그날은 나도 모르게 무슨 용기가 생겨서 덕유산 정상까지 올라갔다. 아래쪽에서 양 떼 같은 구름들이 산 정상을 향해 기어서 올라오는 모습들에 나는 너무나 큰 감동을 받았다.
서울 한전연수원 교육을 마치고 나는 첫 발령을 호남화력발전소로 받았다. 여수에 있는 발전소였다. 아니, 그 당시에는 여천이었고 여천공단에 있었다. 나는 커다란 트렁크 가방을 들고 전라선 종착역에 내렸다. 겨울 새벽이었다. 택시를 타고 발전소에 가자고 했는데 내리고 보니 여수화력발전소 정문이었다. 여수에 발전소가 두 개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나의 잘못인지 택시 기사의 잘못인지 기억에 없지만 하여튼 나는 첫날부터 헤매고 말았다. 나는 여수화력 정문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아침 퇴근버스를 타고 사택으로 갔다. 그 당시 발전소 사택은 여수화력과 호남화력 그리고 한전 여수지사와 지점 사람들이 함께 사용하고 있었다. 한전에서 발전소가 분리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모두가 한 식구였다.
나는 그렇게 여수에서의 생활을 서툴게 시작하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여수에는 여수화력과 호남화력 이렇게 두 개의 발전소가 있었다. 더 엄밀히 말하면 여수가 아니라 여천이었다. 그리고 사택은 쌍봉동 한 곳에서 함께 사용하고 있었다. 그때는 지금처럼 발전소가 한전에서 따로 분리되기 전이어서 발전소뿐만 아니라 지점과 지사 사람들도 같은 사택을 함께 사용하던 시절이었다. 지사 사람들은 그 당시에는 월급은 용돈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월급 외로 들어오는 돈이 많아서 화려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때는 그런 시절이었다. 지금은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는 소문이 있다.
다음날부터 나는 호남화력에 출근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에는 대부분 신입사원들은 처음에 교대근무에 투입되었다. 지금은 세상이 많이 바뀌어서 오히려 교대근무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 당시에는 경력이 어느 정도 쌓여야만 정상적인 일근 근무를 할 수 있었다. 나는 교대근무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밤에 잠을 자지 못하고 근무를 한다는 것은 생체리듬에 맞지 않았다. 몇몇 사람들은 야간근무에 적응하지 못하고 사표를 내고 떠나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왕에 입사를 했으니 딱 3년만 다니고 그만 두기로 작정을 했다. 한 3년 정도 다니면 수술비를 마련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면 오래도록 함께 살아온 심장병과 이별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심장수술이 실패를 한다면 나의 운명은 그렇게 끝날 것이지만 만약 수술이 성공한다면 본격적으로 시인의 길을 걸어갈 작정이었다.
호남화력에서 조금 근무를 하다가 또다시 삼천포화력 연수원에서 발전소 실무교육을 본격적으로 받았다. 지금은 태안화력 발전소에 발전연수원이 있지만 ― 얼마 전에 숨진 고(故) 김용균(25)씨가 일하던 바로 그 발전소 ― 그 당시에는 삼천포화력에 발전 연수원이 있었다. 발전연수원은 아마도 얼마 있으면 대전으로 한 번 더 이사를 할 모양이다. 나는 삼천포에서 한 3개월 정도 교육을 받은 것 같다. 그렇게 짧은 삼천포 생활을 마치고 다시 여수로 돌아가 본격적인 여수 생활이 시작되었다.
여수에서의 생활은 그야말로 바람이었다. 한 시도 가만히 앉아서 쉬어보지 않았다. 나는 책상에 앉아서 쓰는 시는 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손으로 쓰는 시가 아니라 발로 쓰는 시가 진짜 시라고 생각했다. 나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홀로 싸돌아다녔다. 바람처럼 싸돌아다니는 날파람둥이였다. 나는 여천시 쌍봉동에서 살았다. 하지만 나는 여천시를 벗어나 주로 여수시 쪽을 돌아다녔다. 물론 나름대로 의미 있다고 생각되는 여천 쪽도 많이 돌아다녔다. 한하운 시인처럼 문둥병(한센병) 환자들이 모여 산다는 신풍애양원을 비롯하여 사화복지법인 시설이었던 동백원도 자주 들락거렸다. 그리고 소호동 바닷가를 비롯하여 소라면 바닷가를 많이 걸었다. 또한 이순신 장군께서 거북선을 만들었다는 선소마을과 날마다 찾아가던 바닷가의 언덕 또한 나의 산책코스였다.
회사에 가지 않고 쉬는 날에는 주로 여수시로 나갔다. 그 먼 길을 걸어서 다녔다. 그 당시에는 길이 좀 단순했다. 여천시에서 여수시에 가려면 윗길과 아랫길이 있었다. 나는 주로 윗길로 가서 아랫길로 돌아왔다. 버스 노선도 윗길로 가서 아랫길로 돌아오는 노선이 많았다. 하지만 나는 버스를 타지 않고 주로 걸어서 돌아다녔다. 그렇게 나는 밤새도록 걸어 다니곤 하였다. 숨이 차서 한꺼번에 걸을 수 없으니 자꾸만 쉬면서 다녀야만 하였다. 내가 주로 다니는 곳은 여수항과 서시장 그리고 여수역과 자산공원이었다. 그리고 여수 어항단지와 돌산대교 등도 부지런히 싸돌아다녔다.
회색 바바리코트를 입고 밤낮없이 여수항 부근에 나타나서 자꾸만 무엇인가 메모를 하고 이것저것 물어보며 다니는 바람에 나는 간첩으로 오인받아 파출소에 끌려가 조사를 받기도 하였다. 그때 나는 철저히 미쳐 있었다. 시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나는 그렇게 길에서 시를 찾아 헤매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홀로 쓴 시들을 모아 월간지와 계간지에 동시에 투고를 하였다. 월간지에서 먼저 발표하였다. 나는 그렇게 비로소 시인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그때는 너무 몰랐었다. 시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시인의 길이 얼마나 험한 길인지 미처 알지 못했었다. 월간지 신인상 발표가 있은 뒤 계간지에서도 연락이 왔다. 계간지에도 신인상에 당선되었으나 이미 월간지에 당선되었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당선이 취소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내가 우리나라 문단 상황에 대하여 지금만큼만 알았다면 나는 아마 월간지가 아니고 계간지 신인상을 선택했을 것이다. 그 당시 나는 어떻게든 시인만 되면 다 되는 줄로 착각하고 있었다. 시인만 되면 원고 청탁이 줄을 이을 줄로 알고 있었다. 시인은 그저 시만 쓰면 되는 줄로 착각하고 있었다. 문단활동이나 인간관계가 따로 있지 않아도 그저 시인만 되면 무조건 시만 쓰면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특히 나처럼 지방에서 홀로 시만 쓰는 시인에게는 그런 기회가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았다. 나는 시 쓰는 방법만 알았지 진짜 시인이 되는 길을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곧 실망하고 말았다. 그 당시 문학사상에서는 상패도 주지 않았다. 지금은 바뀌어서 상패도 주고 그러는 모양인데 그 당시에는 상패도 없고 시상식도 따로 없었다. 그래도 문학사상 신인상은 문단에서 꽤 전통도 있고 권위가 있는 등용문으로 알려져 있지만 나는 그 당시에 그런 것들에 대하여 너무 모른 상태에서 그저 실망만 하였다.
그래서 나는 다시 한번 결심했다. 신인상 정도로는 나에게 관심이 없으니 이번에는 시집을 한 권 내야겠다,라고 결심했다. 그리고 그동안 쓴 시들을 모아 시집을 발행하려고 준비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무모하고 당돌한 생각이었다. 시인으로 등단하고 1년도 되지 않아서 시집을 내겠다는 생각을 감히 할 수 있었다니,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나는 문단을 너무 몰랐고 몰라서 오히려 용감할 수 있었다.
나는 홀로 정리한 시집 원고를 가방에 넣고 문학사상 사무실로 찾아갔다. 그때까지도 나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한국문단의 상황이 어떤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그저 헛웃음만 나올 뿐이다. 문학사상 사무실에 가서 인사를 하고 차를 한 잔 마시고 나는 그냥 나왔다. 나는 말주변이 없어서 시집 이야기는 한 마디 꺼내보지도 못했다. 아니, 어쩌면 그때 시집 이야기를 꺼냈다면 오히려 웃음거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얼마나 웃음이 나올 일인가. 신인상 당선되고 1년도 안된 놈이 불쑥 찾아와서 시집을 내달라고 떼를 쓴다고 생각해 보면 참으로 당돌한 놈이 아닌가.
노란 은행잎이 떨어지는 은행나무 가로수 길을 걸으며 어깨가 축 처지고 있었다. 참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심히 타자를 쳐서 나름대로 시집을 만들었는데 시집 이야기를 한 마디도 꺼내지 못하고 돌아오는 내 모습이 참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는 컴퓨터가 없는 시절이어서 타자기로 원고 정리를 하였다.) 여수에서 서울까지 그 먼 길을 일부러 찾아갔으면서도 정작 다른 일로 왔다가 잠시 들렀다고 둘러대는 나 자신이 참으로 한심스러웠다. 그렇게 기운이 빠져서 털레털레 길을 걷고 있는데 길가 가판대의 신문이 눈에 들어왔다. 그 신문에 신춘문예 응모 광고가 실려 있었다. 나는 그 신문을 1부 사서 여수로 돌아왔다. 어차피 버려질 원고였는데 차라리 신춘문예에 응모라도 해보자. 그래서 나는 시집 원고 표지만 바꾸어서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응모하게 되었다. 물론 기존에 발표한 몇 편의 시들은 당연히 빼고 보냈다.
아마도 신춘문예 사상 이런 응모자는 처음이었을 것이다. 또한 이런 심사평도 이례적인 것이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같은 해 동아일보에 응모했던 다른 분들께 좀 미안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내가 이렇듯 생뚱맞게 응모하지 않았더라면 다른 좋은 시인이 탄생할 수도 있었을 것이며 또한 최종심에 올랐던 다른 분들의 심사평 한 줄 없었으니 내가 많이 야속했을 것이라 짐작되기 때문이다.
심사평 ― 두 심사위원은 별다른 이견 없이 배진성 씨를 당선 시인으로 정하는 데 합의하였다. 그는 두 권 정도의 시집이 될 만한 작품을 투고하였다. 오히려 어려움은 이 많은 작품 가운데 어느 것을 당선작으로 하느냐 하는 데 있었다. 결국 ‘길이 있는 풍경’과 ‘밤하늘은 반란이다’ 두 편을 골랐지만, 이 선정은 필연성이 있는 것이라고 자부하기가 어렵다. 그렇다는 것은 배진성 씨의 작품이, 많은 작품 수에도 불구하고, 매우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의 시는 오늘의 범람하고 몽롱하고 막연한 서정시나 비분강개의 시의 언어에 비하여 괄목할 만한 탄탄함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그의 시가 오늘의 현실 ―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밀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거기에 서정이나 판단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느낌과 판단에도 흐릿함이 있고 탄탄함이 있게 마련인 것이다. 수가 많은 만큼 또 고른 수준의 것인 만큼 그의 시가 믿을 만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수준의 한계가 이미 다 드러나 버린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되기도 한다. 지금의 수준이 가장 바람직한 폭과 깊이, 무엇보다도 오늘의 수다스러운 시세계에서 반드시 필요한 시상과 표현의 압축에 도달하였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 심사위원 / 김우창, 신경림
나는 이렇게 우연히 신춘문예에 당선되었고 그 덕분에 첫 시집을 빨리 낼 수 있게 되었다. 신춘문예 심사를 맡으셨던 김우창 교수님께서 내가 응모했던 원고를 민음사로 넘기셨기 때문이다. 그 당시에 김우창 교수님께서 민음사와 많은 관련이 있었던 탓에 그렇게 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민음사와의 인연이 닿게 되었다. 글이나 시집은 따로 타고난 운명이 있는 듯했다. 나에게는 그렇게 우연히 좋은 인연이 많이 찾아왔지만 나는 그 좋은 인연들을 나의 것으로 완전히 붙잡지는 못했다. 모두가 나의 어리석음 때문이었다.
나는 우리나라에서 제대로 시를 쓰려면 먼저 대학교수가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대학교수가 되어 시를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좋은 제자들도 많이 길러내야만 비로소 시인으로 바로 설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나는 지금도 그 생각에는 어느 정도 공감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시인으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대학 교수가 가장 유리한 입장에 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출판시장과 문단풍토로 보아 그렇다는 것이다.
대학교수가 꼭 좋은 시인은 아니지만 확실히 좋은 조건에서 시인으로서 자리를 잡을 수 있는 확률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지금은 인터넷이 발달하고 사회 환경이 많이 바뀌어서 꼭 대학 교수가 아니어도 많은 제자들을 길러낼 수 있고 또한 소셜네트워크서비스가 발전하여 독자적인 방법으로 독자들을 끌어 모을 수 있지만 그 당시만 해도 대학교수가 가장 확실하고 가장 손쉬운 방법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대학교수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대학교수가 되려면 대학원에 가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공부를 더 해야만 했다. 그래서 나는 우선 방송대학에 편입을 하였다. 우선 대학 졸업장이 있어야 대학원에 입학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의 체력은 급격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내 몸이 한계에 도달하고 있었다. 나의 심장병이 나를 가만 놔주지 않았다. 나는 이제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나의 소망은 30살까지 버티는 것이었는데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서른 살까지만 살 수 있어도 나는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나의 몸은 도저히 서른 살까지 버틸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 진행되고 있었다. 남몰래 쓰러지는 횟수가 늘어나고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었다. 그래도 다행히 우여곡절 끝에 시집은 한 권 내었으니 덜 억울할 것만 같았다.
나는 다시 남몰래 병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더 이상 수술을 미룰 수 없을 만큼 몸이 많이 아프기 시작했다. 나는 전남대학교병원에서 검사를 받았다. 병원에서 당장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하였다. 당장 수술을 받지 않으면 위험하다고 하였다. 때마침 우리나라에 의료보험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치료비도 많이 저렴해졌으며 또한 심장재단 덕분에 심장수술 성공률도 많이 좋아졌다고 하였다. 그래서 나는 여러 상황을 고려하여 드디어 심장 수술을 받기로 결심하였다.
나는 회사에 휴가를 내고 고향 집에 들렀다. 고향 집에는 아버지께서 늘 아랫목에 누워계셨다. 젊은 시절 방앗간 천정에서 떨어진 이후로 후유증 때문에 언제나 아버지 등은 구들장에 붙어 있어야만 했다. 나는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이 길을 떠나기 전에 아버지께 무엇인가를 해드리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잘 아는 동네 어르신을 찾아갔다. 그리고 그분께 돈을 드리며 내가 떠난 다음에 아버지께 개를 한 마리 잡아 드리라고 신신당부를 드렸다. 그리고 “나는 서울에 출장을 가기 때문에 당분간 연락을 드리지 못할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라고 말씀드리고 광주로 떠났다. 그렇게 나는 홀로 광주로 가서 전남대학교병원에 입원을 하였다.
그런데 그날 밤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고 말았다. 심장판막 교체 수술을 하기 전에, 좀 더 간단한 시술을 먼저 한 번 해보자고 했다. 나의 대동맥판막이 지금 잘 열리지 않기 때문에 먼저 풍선 확장시술을 한 번 시도해 보자고 하였다. 그 당시에 막 개발되어 시험 중인 시술법이었다. 우리 인간들의 대동맥은 심장에서 시작하여 양쪽 허벅지 안쪽으로 지나간다고 하였다. 그러니까 가장 굵은 대동맥이 바로 그 핏줄이라는 것이었다. 풍선 확장시술은 카테터라고 하는 관을 환자의 혈관 안에 삽입하여 주로 좁아진 혈관을 넓혀주는 시술인데, 이 시술 방법을 응용하여 심장 판막 확장에까지 이용하는 시술법이었다. 나의 경우는 왼쪽 사타구니 쪽에 구멍을 내어 대동맥을 따라 거꾸로 관을 집어넣어서 대동맥판막까지 접근하게 한다. 그 관 안에는 작은 풍선이 달려 있다. 대동맥판막은 세 개의 조각으로 되어 있어서 그 조각들이 열렸다가 닫혔다가를 반복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나의 경우에는 열릴 때에 세 조각이 완전히 분리되지 않아서 덜 열리기 때문에, 붙어 있는 날개 안쪽을 강제로 더 찢어지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대동맥판막 쪽에 풍선을 위치하게 한 다음, 그 풍선을 순간적으로 확 불어주면 자연스럽게 세 조각의 날개가 잘 분리되어 충분히 열어줄 수 있다는 원리였다. 그런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방법은 실패로 돌아갔다. 내 심장병의 첫 번째 오진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나는 지금 여기서 오진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날 밤 나에게 벌어진 일들을 말하려는 것이다. 그러니까 풍선 확장 시술을 받기 전날 밤에 그동안 철저히 숨겨왔던 나의 심장병이 다른 가족들에게 그만 들통이 나고 말았다. 시술받기 전날 밤에 주치의가 서류를 들고 찾아왔다. 풍선확장시술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보호자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고민 끝에 광주에 사는 누나에게만 조심히 전화를 하였다. 그동안 철저히 숨겨왔던 나의 심장병에 관한 사실들을 누나에게만은 사실대로 털어놓을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절대로 시술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만에 하나라도 시술 도중에 잘못되면 병원 측이 심각한 타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어떤 일이 있어도 보호자 동의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누나는 다른 가족들에게는 절대로 알리지 말아 달라는 나의 간절한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곧 누나가 병원으로 달려왔고 시골에 계시던 어머니께서도 병원으로 달려오셨다. 어머니께서는 내가 혹시 교통사고를 당해서 입원한 것으로 알고 달려오셨던 것이었다. 서울에 출장 가겠다고 떠난 자식이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서 달려온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20년 넘게 홀로 앓아오던 나의 심장병을 가족들에게 들키고 말았다. 그렇게 나는 큰 충격을 가족들에게 안겨주고 시술 동의를 받고 다음날 무사히 풍선확장 시술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시술은 결코 성공하지 못했다. 오진이었으니 당연히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며칠 후에 개복수술을 하여 대동맥판막을 인공판막으로 교체하기로 하고 수술날짜를 기다렸다. 그러는 동안 여수 직장 동료들이 버스를 대절하여 와서 혈액검사를 하였다. 수술하는 날 직접 와서 피를 뽑아주겠다는 사람들이었다. 미리 뽑아놓은 피보다 그날 바로 뽑아서 수혈하면 더욱 좋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그렇게 번거로움을 감수하고 찾아온 동료들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또다시 더욱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나와 같은 병실에 입원해 있다가 나보다 먼저 수술을 받은 환자에게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 나와 같은 병으로 수술을 받은 환자였다. 그런데 그 환자가 그만 죽고 말았다. 수술은 잘 되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회복실에서 그만 잘못되고 말았다. 마취가 풀리면서 심하게 움직이는 바람에 그만 인공호흡기가 빠져버리고 말았다. 곁에서 당직의사나 간호사가 착 달라붙어서 지켜보아야 하는데 그만 자리를 잠시 비우고 말았다는 것이다. 환자 곁에 아무도 없는 사이에 마취에서 깨어난 환자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마구 흔들어대는 바람에 인공호흡기가 빠졌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그만 사망하는 사고가 벌어지고 말았다.
이런 사실을 전해 들은 그 환자의 가족들은 바로 다음날부터 병원 마당에 텐트를 치고 농성에 들어가고 말았다. 죽은 아들을 살려내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하는 바람에 병원이 발칵 뒤집히고 말았다. 그래서 수술을 담당했던 흉부외과 의사들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다른 환자들의 수술은 무기한 연기되고 말았다. 그런데 나는 마침 그 병원에 먼 친척 되는 의사가 있었다. 그 의사 덕분에 나는 서울대학병원으로 갈 수 있게 되었다. 나도 곁에서 나와 같은 처지의 환자가 죽어나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전대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싶지 않았다. 더 이상 나의 목숨을 허술한 그곳에 맡길 수 없었다.
나중에 서울대학병원에서 수술을 받으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만약에 내가 그때 전대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다면 멀쩡한 대동맥판막을 떼어내고 인공판막으로 교체를 할 뻔했다. 만약 그렇게 했더라면 병은 치료도 되지 않고 멀쩡한 대동맥판막만을 인공판막으로 바꿀 뻔하였다. 생각만 하여도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서울대학병원에서 수술을 받기 위해 정밀검사를 다시 하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나의 대동맥판막은 멀쩡한 상태였다. 대동맥판막이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대동맥판막 앞쪽에 혹이 하나 있어서 대동맥으로 나가는 피의 양이 충분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나와 같이 혹이 있어서 출구가 좁아진 환자는 많지 않았고 피가 잘 흐르지 못하는 환자들 대부분이 판막 자체에 문제가 있었던 환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나의 경우도 그렇게 생각하고 오진했던 것이었다. 그 당시에는 나와 같은 특별한 케이스가 많이 발견되지 않아서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지금은 연구가 많이 진행되어 ‘비후성심근증’이라고 따로 정의를 내리고 치료법과 수술법도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중이다.
전대병원에서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하고 나는 진료의뢰서를 가지고 서울대학병원에 접수를 하였다. 하지만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자 나의 몸은 심각할 정도로 더욱 나빠지고 있었다. 그동안 비밀이었던 나의 심장병이 가족들에게 들켜서 더욱 걱정이 되었다. 나의 예상대로 가족들은 모두 걱정이 태산이었고 가족들에게 몹쓸 짓을 한다는 생각에 나의 몸과 마음은 급속도로 더욱 심각하게 망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또다시 무작정 회사에 휴가를 내고 서울로 올라갔다. 그리고 떼를 써서 응급실로 입원을 하였다. 그때는 이미 잘 걸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도 나를 수술할 의사 선생님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아주 젊은 의사 선생님 이셨다. 그 당시에는 그분에 대하여 잘 알지 못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아주 훌륭한 선생님 이셨다. 그 당시에는 아주 젊었지만 실력이 매우 좋은 분이셨다. 나는 아주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그렇게 실력 있는 의사를 만나기는 쉽지 않은데 나는 우연히 그렇게 좋은 의사를 만난 것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그분에게 두 번의 수술을 받았다. 1990년 6월 8일에 1차 수술을 받았고 2017년 12월 22일에 2차 수술을 받았다. 2차 수술을 받을 때에도 우연히 한 번 찾아갔다가 바로 그 자리에서 수술날짜를 결정하고 바로 수술을 하게 되었다. 나의 몸은 그만큼 위험한 상태였으나 나는 모르고 있다가 참으로 운이 좋게도 그분을 다시 만나 이렇게 새 생명을 얻을 수 있었다. 그분을 다시 만나지 못했다면 나는 아마도 나도 모르게 돌연사를 당할 뻔했었다. 그분은 나의 수술을 마지막으로 하시고 서울대학병원에서 정년퇴직을 하셨다. 그야말로 그분은 그렇게 나의 하느님이 되셨다.
서울대학병원에 처음 입원해서 나는 감기에 걸렸다. 감기에 걸리면 수술을 할 수 없다고 해서 수술날짜가 뒤로 미루어졌다. 그 바람에 나는 더 많은 정밀검사를 할 수 있었다. 정밀검사 결과 심장판막증이 아니라 ‘대동맥판막하협착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수술방법도 전면적으로 수정하게 되었다. 원래는 대동맥판막을 인공판막으로 교체할 예정이었으나 대동맥판막은 교체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대신에 대동맥판막 아래쪽에 있는 혹을 제거하는 것으로 완전히 수술방법이 바뀌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흔하지 않은 심장 수술이었다. 아마 그때 담당 선생님께서 젊기도 하고 패기도 있고 실력도 있는 의사였기 때문에 그런 수술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참으로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천만다행으로 나는 좋은 의사를 만나서 판막을 교체하지 않고 심장 속에 있었던 혹 하나 떼어내는 수술로 건강이 회복되었다. 수술을 하고 나니 내 몸이 날아갈 듯 가벼워졌다. 나로서는 처음으로 경험하는 상쾌함이었고 가벼움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심장병 환자로 태어났으니 정상적인 사람들의 몸 상태를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하고 살았던 것이다. 나는 너무나 좋았다. 심장병은 수술은 어렵지만 수술이 끝나고 나면 바로 몸으로 느낄 수 있을 만큼 좋은 성과를 보이는 경우가 많다. 바로 내가 그랬다. 그동안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그야말로 신세계였던 것이다.
그런데 나의 행복은 그렇게 오래가지 못했다. 나는 수술을 받고 약 한 달 동안 입원을 하였다. 그리고 퇴원해서는 여수로 내려가지 못하고 인천에서 지냈다. 장거리여행이 불가능했을 뿐만 아니라 병원에도 자주 가야 했고 또한 나를 돌보아줄 사람이 없어서 큰형 집에서 두 달 정도 누워서 지냈다. 2차 수술 때에는 의술이 발달해서 그런지 아니면 가슴을 봉합하는 재료가 좋아져서 그런지 아니면 개복한 부위를 봉합하는 획기적인 방법이 새로 도입되어서 그런지 나로서는 잘 알 수 없지만 한결 쉬워졌음을 실감하였다. 1차 수술 후에는 꼬박 석 달 동안 누워만 있으라고 했는데 이번 2차 수술 후에는 마취에서 깨어나자마자 나를 번쩍번쩍 들어서 침대를 옮겨주기도 하고 바로 걸어 다녀도 좋다고 하셔서 나는 깜짝 놀라고 어리둥절하기도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수술하고 일주일도 못되어 퇴원을 하라고 하고 심지어는 비행기도 바로 탈 수 있다고 하여 제주도로 바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의술이 그만큼 발전한 것인지 그동안 세상이 그렇게 변한 것인지 나로서는 아직까지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 당시 큰 형은 인하대 후문에 있는 새마을금고 2층에 살고 있었다. 형과 형수는 둘 다 직장에 나가고 나 혼자 방에 누워 있었다. 그런데 아직 철이 덜 든 조카는 누워있는 나를 자꾸만 밟으려고 하여 마음 놓고 잠을 잘 이루지 못했다. 6월 8일에 수술을 하였으니 그렇게 한 여름 3개월을 불안하게 보냈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
나는 그렇게 심장병 수술에 성공하여 25년 만에 심장병과 이별을 하였다. 그런데 참 인생은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산다는 것이 참 쉽지 않다는 것을 절감했다. 심장병이 떠나고 나니 이번에는 간에 문제가 생겼다. 병원에서 전염이 된 것인지 아니면 형 집에서 전염이 된 것인지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형과 내가 비슷한 시기에 간염으로 고생한 것으로 보아 어쩌면 내가 병원에서 옮겨왔을 가능성이 많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형에게 더욱 미안하다. 나는 그 후에 간경화로 진행되었고 인터페론 주사를 맞는 치료를 받아 완치가 되었는데 형은 치료가 되지 않아 결국 간 이식수술을 받게 되었으니 나는 또다시 본의 아니게 몹쓸 짓을 하고 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