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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인 May 18. 2020

가시나무 산의 고사리 원정대

그리고 헨젤과 그레텔



 고사리는 1년 365일 중 2주라는 짧은 기간 동안에만 수확할 수 있는 산나물이다. 물론 봄이 오면 냉이도 쑥도 캘 수 있지만, 고사리는 냉이나 쑥만큼 흔하게 볼 수 있는 작물은 아니다. 밭에서 재배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산에 올라서야 그 존재를 만날 수 있다. "제발 날 데려가 줘!"라는 듯 자란 산나물도 많은데, 고사리는 사람이 쉽게 따도록 자라지 않는다. 길이 난 곳에 쪼르르 모여 있으면 좋으련만, 길이 없는 산 구석구석을 들쑤시고 다닐 때에야 귀한 모습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한다.


 저 멀리서 고사리를 따러 함께 산에 오른 언니의 목소리가 들린다.

"도오옹새애애앵!(언니는 나를 동생이라고 부른다.) 여기 노다지야아아! 여기로 와아아아!"






 5월의 황금연휴를 맞이하여 언니와 횡성으로 향했다. 집으로 가는 차 안, 부모님은 한 마디 걱정을 넌지시 던진다. "젊은 처자들이 쉬는 날마다 자꾸 시골로 와서 어떡해. 주말에 약속도 없어? 엄마 아빠는 너네가 여기 오는 거 좋긴 한데..." 부모님은 연애도 안 하고 주말이면 자꾸만 횡성으로 찾아오는 두 딸이 걱정이다. 딸들이 연애도 안 하고 결혼도 영영 안 할까 봐서. 우리는 연애하라는 말에는 대꾸 않고, 그간 있었던 굵직굵직한 이야기들을 꺼내놓기 바쁘다.


 석가탄신일과 노동절, 주말 그리고 어린이 날까지 징검다리로 이어진 황금연휴. 택배가 이동하지 않는 황금연휴는 우리 집 같은 농가에는 치명적이다. 두릅의 새순이 하나둘 나오기 시작하는 시기와 황금연휴가 맞물리는 것이다. 우리 집은 새벽에 두릅을 따고 고객이 다음 날 택배를 받을 수 있도록 당일 출고하는데, 연휴 동안에는 택배를 부치더라도 물류창고에 며칠씩 머무르기 때문에 도착하기도 전에 두릅이 상해버리고 만다. 이럴 때엔 어쩔 수 없이 비슷한 주소지를 묶어 직접 배송을 가야 한다. 말 그대로 '산지직송'인 셈이다. 딸들이 오랜만에 집에 왔는데 하필 이럴 때 배송을 가야 한다고, 수원으로 떠날 채비를 하시는 부모님의 얼굴에 아쉬움이 비친다. 언니와 나, 둘만 횡성에 남았다. 부모님이 산지직송을 하러 떠난 동안 우리는 고사리를 따러가기로 했다.






 <고사리 원정대의 필수 준비 5단계>

 STEP 1. 옷장을 뒤적여 작업복으로 입을 긴 바지와 긴 팔 티셔츠를 찾아 입는다. 우리 산에는 가시나무가 무척 많아서 가시를 조심해야 한다. 반팔을 입거나 뜯어지기 쉬운 소재의 바지를 입고 산을 활보하다 보면 가시에 온통 긁힐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혹시 모를 진드기를 막기 위함이기도 하다.

 STEP 2. 스윽스윽 선크림을 얼굴에 대충 넓게 펴 바르고, 챙이 넓은 모자를 챙겨 쓴다. 햇빛을 조금만 받아도 쉽게 까맣게 타버리는 피부 탓이다. 바다나 계곡으로 이른 휴가를 다녀온 것도 아닌데 까매진 얼굴로 서울로 돌아가고 싶진 않다.

 STEP 3. 손에 목장갑은 하나씩 꼭 껴야 한다. 고사리를 찾아 산 이곳저곳으로 이동하다 보면 자연스레 나무나 땅을 짚게 된다. 장갑을 끼지 않으면 나중에 흙이 잔뜩 낀 손톱을 마주할 각오를 해야 한다.

 STEP 4. 무릎 아래까지 오는 목이 긴 고무장화는 이 계절 필수품이다. 봄이 되면서 햇살 가득한 날과 촉촉하게 비 오는 날이 번갈아 찾아오면서, 이름을 알 수 없는 수많은 풀이 무성하게 자란 상태다. 이런 풀 숲을 지나다니다가 보호색을 띤 뱀을 미쳐 발견하지 못하고 밟아버릴 우려가 있으므로 꼭 장화를 신어야 한다.

 STEP 5. 드디어 마지막 단계이다. 진드기 기피제를 모자부터 장화 끝까지 꼼꼼하게 뿌려준다. 봄철 진드기는 살인 진드기라고도 불릴 정도로 해롭다. 면사무소에는 진드기 기피제를 상시 비치해놓고 주민들이 무료로 가져가도록 한다. 뿌리면 안전하다고 하니 뿌리지 않을 이유가 없다.

 

 고사리를 따러가는 데에 깔맞춤이나 예쁨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자, 이제 '고사리 룩'으로 완벽하게 무장한 고사리 원정대가 출동할 시간이다.






 이것저것 많이 껴 입은 탓일까 아니면 체력이 부족한 탓일까. 고작 30분 오르막 길을 올랐을 뿐인데 숨이 차오른다. 작년 그리고 재작년에 고사리가 많이 보였던 곳에 도착하고 나면, 이때부터는 사람이 다니기 편하도록 나 있는 '길'은 무의미하다. 내가 가는 곳이 곧 길이고 고사리가 있는 곳이 길이다. 산 사면을 따라 내려가면서 매의 눈으로 풀 사이사이에 숨은 고사리를 찾는다. 눈에 고사리 탐지기라도 장착한 양 한 면 한 면 스윽 훑는다.

 

앗! 비죽 솟아난 고사리를 발견했다. 지금 수확해야 할 고사리는 올리브 빛을 띠고 있으며 솜털이 나있고 끝은 세 갈래로 갈라져 있다. 갈래의 끝은 보글보글한 파마머리처럼 머리가 말려 있어야 한다. 이 돌돌 말린 머리가 삼각형으로 완전히 펴지고 색도 연두색으로 변하면, 줄기가 이미 단단해진 상태라 식용으로 부적합하다. 고사리의 파마머리는 금방 펴버리기 때문에 겨우 하루 이틀 차이로 딸 수 있고 없고가 결정된다.


 지나다니다 보면 고라니와 산토끼의 흔적이 보이기도 하고, 어떤 동물의 집인지는 모르지만 아늑하게 파놓은 굴도 종종 눈에 띈다. 고라니와 산토끼도 먹을 것을 찾아 산을 헤맸을 텐데 나도 그들처럼 고사리를 찾아 산을 헤맨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웃음이 새어 나온다.



가시나무 산을 뒤로 하고 내려오는 길. 그리고 고사리 한 다발



 예년과 달리 올해에는 '고사리 밭'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산 이곳저곳에 고사리가 많이 보였다. 어느덧 해는 뉘엿뉘엿 지기 시작하고 고사리를 담은 비닐백은 크고 작은 고사리로 가득 찼다. 바로 눈 앞의 고사리 하나하나를 따라 한 발자국씩 내딛다 보면 빵 조각을 따라 깊은 숲속으로 들어가던 헨젤과 그레텔이 생각난다. 사악한 마녀가 빵 조각으로 그들을 과자집으로 이끌었다면 나는 무엇에 이끌려 이토록 맹목적으로 고사리를 따라갔을까.


 평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걱정을 줄줄이 달고 사는 나에게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을 시간이 필요했던 걸까. 마음이 복잡하고 어지러울 땐 고사리조차도 하나의 해결책이 됐다. 잠시라도 한눈팔면 가시나무에 찔리기 십상이라고, 사면 아래로 미끄러지기도 한다고, 까닥 잘못하면 멧돼지나 뱀을 마주칠 수 있으니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고 여러 이유를 둘러댔다. 한 치 앞의 고사리를 신경 쓰느라 다른 생각을 할 틈은커녕 머릿속은 온통 고사리로 가득하다며, 걱정과 근심이 들어올 여유는 없다고 밀어냈다.






 가방 한가득 고사리로 채우고서야 산에서 내려왔다. 간단하게 샤워를 마치고 거실 소파에 누워 눈을 감고 살랑이는 바람을 느끼는데, 눈 앞에 고사리의 잔상이 어른어른거린다.


"얼마나 많이 땄는지 눈 감으면 고사리 보인다. 참, 고사리 따면서 무슨 생각했어?" 언니에게 묻는다.

"생각은 무슨. '어? 고사리다. 어? 왕 고사리다! 어? 대왕 고사리다아아!!!' 했지 뭐."


 그래. 왕 고사리나 또 따러 가자.




시골과 도시를 오가는 삶, 다섯 번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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