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말했다시피 우리의 신혼여행은 내 인생의 첫 자유 여행이었다. 그전까지는 항상 가족들과 패키지여행을 다녔다. 패키지여행을 가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패키지여행에서는 모든 것이 다 정해져 있다. 무엇을 먹을지, 무엇을 볼 지, 어디서 잘 지. 어쩌면 무엇을 느껴야 하는지도 다 알려준다. '여기서는 이것을 보시면 됩니다.' '이곳은 이 음식이 유명해요. 이게 맛있습니다.' '이 앞에서 사진을 찍으세요.' 그것도 그것대로 나름 즐거운 여행이었지만 자유 여행은 그 첫 발걸음부터 차원이 달랐다.
생의 첫 자유 여행의 첫 식사. 옆자리 아저씨의 한식을 보며 한식을 먹을걸 그랬나 생각했다.
나는 공항에서 식사를 해본 적이 별로 없었다. 항상 집합 시간에 맞춰 가족들과 함께 도착을 하고 다 모이면 출발이었으니까. 그런데 이번은 달랐다. 출국 심사 전 공항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그마저도 너무 설렜던 나머지 사진으로 남겨 두었다. 역시 자유란 좋은 것이다. 내가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 우리가 모두 어릴 때 어른을 꿈꾸는 것도 같은 이유이지 않은가.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그 선택의 무게에 대해서는 생각지 못한 채 말이다. 여행의 첫 식사를 내가 직접 선택한 그 순간부터 설렘이 정말 측정 가능한 수치를 뛰어넘고 있었다. 자유 여행이라니! 게다가 유럽이라니! 게다가 신혼여행이라니! 이 어찌 설레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처음이란 항상 어설프기 마련이라고 했던가. 우리는 공항에서 여러 가지 면으로 꽤나 어설펐다. 일단 우리는 출국 심사 후 면세점 근처에 ATM기가 있을 거라는 어설픈 생각을 했고 그 생각은 맞지 않았다. 그 결과 개인적으로 받았던 축의금들을 입금하지 못했고 마치 중국에서 여행 온 부자 중국인 마냥 꽤나 많은 현찰을 허리춤에 차고 다니게 되었다. 최대한 가지고 있는 현찰을 줄이기 위해 면세점에서 물건을 살 때마다 현찰 다발에서 돈을 꺼내 계산했다. 그리고 다 쓰지 못한 현찰들은 유럽 여행 내내 우리와 함께 했다. 그리고 우리는 탑승 게이트의 위치가 면세점에서 그다지 멀지 않을 것이란 어설픈 추측을 했고 그 추측은 역시나 틀렸다. 우리의 탑승 게이트는 면세점과 꽤나 멀었고 우리는 결국 2주간의 여행 일정을 책임질 커다란 캐리어와 면세점에서 산 물건들을 각자 양손에 들고 공항을 질주하여 게이트로 달려가야만 했다. 정말 숨이 턱까지 차오르게 뛰는데 사람들도 쳐다보는 것 같았지만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그런데 사실 나는 그 순간에도 자꾸만 웃음이 났다. 내 앞에서 너무나 열심히 뛰며 나를 살피는, 남편이 된 지 하루 된 나의 초보 남편이, 그 뒤에 엉망진창으로 쫓아 뛰는 내가, 어설픈 우리가 너무나 웃겼다.
나에게는 여행이 정말 정말 특별한 일이라 평생에 공항에 와 본 일이 열 손가락 안으로 꼽는다. 공항에서부터 나는 놀이동산에 처음 온 아이처럼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는데 막상 공항에는 마치 집 앞 편의점을 온 듯한 복장으로 집 앞 편의점 마냥 공항을 자주 오는 것 같은 사람들로 가득 차있다. '다들 이렇게나 여행을 다니고 사는구나. 나만 맨날 집에 있는 거구나.' 이상한 반성과 이상한 질투 혹은 열등감과 비슷한 것이 섞인 기분을 느끼게 되는데 그런 사람들 사이로 몸집 만한 캐리어를 끌며 뛰는 우리의 모습이 너무 웃겼다. '나도 이런 곳 자주 와.'같은 분위기를 내보고 싶었는데 너무나 적나라하게 그렇지 않음을 드러내며 뛰는 우리가 참 우리 같아 웃겼다. 다행히도 우리는 전혀 늦지 않게 탑승 게이트에 도착했고 자연스레 탑승에 성공할 수 있었다.
안전한 여행을 위해 국적기를 선택했고 지갑 사정이 그렇게까지 여유 있진 않아서 이코노미를 택했다. 그렇게 택한 우리 비행기에는 공교롭게도 대학 후배가 승무원으로 탑승하고 있었다. 우리를 알아본 후배는 우리에게 무언가 하나라도 더 잘해주기 위해 자주 우리 자리를 찾았으나 그 친구는 비즈니스석 담당이었고 우리는 이코노미에 탑승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친구가 해줄 만한 것은 별로 없었다. 잘해주기 위해 자주 찾아오는 그 친구의 마음씨에 따뜻함을 느끼면서도 무언가 그만 왔으면 하는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왜 부유하지 않은 것은 부끄러움을 느끼게 할까. 나만 그런 것일까. 저 친구가 담당하는 비즈니스석을 탔더라면 덜 부끄러웠을 것 같은데. 난 죄를 짓거나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이상하게 부끄러워서 그 친구가 그만 왔으면 하고 바랐다.
꼬박 꼬박 찍어 놓은 기내식들
하지만 부끄러움이 사로잡기에는 나는 너무나 신나 있었다. 이래서 사람을 비행기 태우지 말라고 하는 것일까. 이렇게나 들뜨는 기분은 비행기라서일까. 정말 지상에서라면 절대로 돈 주고 사 먹을 것 같지 않은 어설픈 음식이 나오는데도 이렇게나 재미있고 즐거울 수가 없다. 컵라면은 원래도 맛있지만 하늘에서 먹으니 더 맛있다. 신혼 여행자라면 미리 신청할 경우 조그마한 케이크를 하나 받을 수 있는데 난 또 이걸 야무지게 신청해서 그 후배가 가져다주었다. 조그마한 선반에 아기자기 올려놓고 기분을 내는 것이 좀 웃기기도 했지만 그래도 만약 내가 신랑과 행복하게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잘 산다면 내 생애 이 케이크를 신청할 수 있는 기회는 이 번뿐이니까 신청을 해서 먹어보았다. 긴 비행시간인데도 그다지 지루하지 않았다. 나에게는 모든 것이 신기하고 재밌었으니까.
히스로 공항으로 들어서자 웬 할아버지가 반기고 있다
그렇게 도착한 런던. 공항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외국인 할아버지가 마치 Welcome to London이라고 외쳐 주는 것 같았다. 바로 이 순간까지는 매우 즐거웠다. 앞으로 어떤 일이 펼쳐질지도 모른 채 너무 설레는 마음으로 이 사진을 찍었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