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한달살이하는 동안 엄마가 한 번 제주에 왔다. 여행보다 집에 있는 걸 좋아하는 아빠를 남겨 두고 혼자. 여행을 좋아하는 엄마지만, 칠십 평생 늘 가족 아니면 친구들과의 단체 여행만 다녔지 혼자 멀리(?) 제주까지 오기는 처음이었다.
공항 체크인하고 탑승 게이트 찾는 방법을 알려 주고도 걱정스런 마음에 잘 올 수 있겠냐고 재차 물었더니 쿨한 답변이 돌아왔다.
“말 안 통하는 외국도 아니고 모르면 입 뒀다 뭐 하니?”
엄마가 오기로 한 날 아침. 몇 년, 아니 몇 달을 못 본 것도 아니고 겨우 집 떠나 3주 정도 못 본 건데 기다려지는 마음은 뭘까. 떨어져 지냈어도 얼굴을 못 본 것도 아닌데. 제주 한달살이를 온 후 하루가 멀다 하고 엄마 아빠와 화상 통화를 했기 때문이다. 늘 함께 지내다 비록 한 달이지만 제주에 내려가 혼자 지내는 딸을 궁금해하고 걱정하시는 듯해 오늘은 어디를 다녀오고 뭘 먹고 다녔는지 자주 전화해서 주저리주저리 떠들어댔다.
일찌감치 제주 공항 도착장에 나가 엄마를 기다렸다. 공항에서는 늘 바쁘게 면세품 찾아 출국하고, 도착해서도 빨리 목적지로 가기 위해 서둘러 나오느라 분주하기만 했지, 느긋하게 앉아 공항을 둘러볼 여유는 없었던 듯싶다.
공항 도착장 밖에서 기다리며 밀물처럼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러브 액추얼리’라는 영화가 생각났다. 개봉한 지 오래된 영화지만 크리스마스 시즌만 되면 단골로 나오는 영화라 무척이나 많이 알려진 영화다. 특히 스케치북을 넘기며 하는 고백 장면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해 모두 한 번쯤 보지 않았을까 싶다. 나는 이 영화를 극장에서도 그리고 TV 채널을 돌리다 다시 봤을 때도 참 재미있게 봤다. 여러 인물의 다양한 사랑 이야기도 좋지만, 엔딩 장면이 참 좋다. 히드로 공항 도착장에서 아빠와 아들, 엄마와 딸, 남편과 아내, 연인, 친구들이 만나 서로 얼싸안고 반가워하는 모습의 영상이 모자이크처럼 수십, 수백 개가 이어진다. 연기자들인지, 공항에서의 실제 재회 장면을 모아 놓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보고 있자면 왠지 가슴이 몽글몽글해진다. 그리고 그 장면과 함께 나오는 휴 그랜트의 내레이션 속 “사랑은 사실 모든 곳에 있다”라는 말이 마음에 잔잔하게 스며든다.
그 영화 때문인지, 만남과 헤어짐이 공존하는 공항의 분위기 때문인지, 아니면 엄마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인지 설레는 마음과 함께 애틋한 기분이 들었다.
여행할 생각에 들떠 왁자지껄 웃고 떠들며 나오는 사람들, 누군가를 찾는지 두리번거리며 나오는 사람들, 피켓을 손에 들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들, 서로 만나 반가워하는 사람들 등 많은 인파 사이로 내 눈은 이리저리 엄마를 찾고 있었다.
‘아, 왜 이렇게 안 나와? 아휴, 핸드폰도 안 받고.’
비행기가 도착한 지도 한참 되었고 사람들은 마구 쏟아져 나오는데 엄마 모습이 보이지 않아 살짝 조바심이 들었다. 한편으론 엄마가 아이도 아니고, 엄마 말처럼 말 안 통하는 외국도 아닌데 무슨 걱정이람 싶기도 했지만.
한참을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저만치에서 걸어오는 조그마한 엄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몸은 작아도 그 모습이 얼마나 당차 보이던지. 그리고 오랜만의 여행이라고 한껏 멋을 내고 나타난 엄마의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럼 그렇지, 우리 엄만데.’
엄마와 서로 얼싸안고 반가워하는 모습에 아마 사람들은 몇 년만의 모녀 상봉인가 싶었을 수도 있다. 혼자서도 잘 올 수 있다고 호기롭게 이야기했던 엄마도 그제야 안심이 되는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비행기 타는 거 별것 아니네. 이제 혼자 비행기 타고 외국도 갈 수 있겠어.”
처음으로 혼자 제주 한달살이하고 있는 딸도, 처음으로 혼자 비행기를 타고 제주로 날아온 엄마도 뭔가 새로운 일을 하나씩 해냈다는 생각에 자신감이 한 뼘씩은 자란 그런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