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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가레보시 Jan 06. 2024

이 세상의 (그리고 다른 세상의) 한구석에

기억하며, 살아나가, 이어내는 삶


감히 이야기하겠다. 카타부치 스나오 감독의 영화 <이 세상의 한구석에>의 완전판 <이 세상의 (그리고 다른 세상의) 한구석에>는, 태평양 전쟁기를 다루는, 더 나아가 전쟁을 다루는 모든 영화들 중에서도 상당히 높은 위치에 오를만한 작품이다. 누군가는 이야기할지도 모른다. ‘애니메이션이 그 정도의 위치까지 오를 수 있다고?’ 이에 나는 답하겠다. ‘이 영화는 애니메이션이었기에 그 정도의 위치까지 오를 수 있었다.’ 영화 <이 세상의 (그리고 다른 세상의) 한구석에>는, 일상을 구성하던 침략과 수탈이라는, 얄팍하게 가려져 있었던 거짓된 정의에 대한 참회와 함께, 그 기반이 되었던 전쟁의 반대, 즉 반전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작품이다. 동시에, 과거를 기억하는 것이야말로 올바르고 평화로운 일상을 새로운 미래로 이어줄 수 있는 방법이라고, 현재에 촉구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러한 주제들은 애니메이션의 오리지널리티를 통해 그려져, 끝내 우리의 마음을 움직인다. 이 지점에서, 영화 <이 세상의 (그리고 다른 세상의) 한구석에>는 위대한 걸작으로 거듭난다.


그렇다면, 애니메이션의 오리지널리티란 무엇인가? 나의 글을 읽어보셨던 분들이라면 금새 눈치채시리라고 생각한다. 애니메이션의 오리지널리티란 바로 작화, 움직임이다. 영화 <이 세상의 (그리고 다른 세상의) 한구석에>에서 표현되는 전시의 일상들은 애니메이션의 오리지널리티인 작화, 움직임이 모이고 모인 끝에 만들어진 인물들의 행동들로 표현되어 있다. 여기서 영화의 훌륭함은 드러난다. 사실, 움직임을 그려낸다는 행위는 어쩌면 현실의 모방에 불과한, 영혼 없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카타부치 스나오 감독은 그러한 움직임들에 영혼을 불어넣어 작화의 존재의의를 증명해낸다. 그 방법은 바로 작화로 그려낸 움직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카타부치 스나오 감독은 작화로 그려낸 움직임을 조금씩 겹쳐 만들어내는 예술인 애니메이션이 아니라면 쉽사리 전달할 수 없는 주제를 명확하게 화면 속에 담아내고 관객인 우리를 향해 전달하는 것으로, 세밀하고 아름다운 작화로 이루어진 움직임이 영혼 없이 현실의 모방만으로 남지 않도록 한다.


지금부터 이야기할 것은 바로 그 의미들, 작화로 그려진 움직임에 녹아든 의미들이다. 이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기 전에, 방금 전의 이야기를 되짚어보도록 하자. 애니메이션이 실사와 차별화될 수 있는 이유는, 움직임을 작화로 ‘그려내는’ 것으로 현실이라는 제약에 구애받지 않은 채 원하는 세계를 창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반론을 제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결국 애니메이션이라는 것은 현실을 그림으로 모방한 아류가 아닌가? 그렇다면, 작화의 존재를 애니메이션의 오리지널리티라는 이름으로 거창하게 띄워줄 필요가 있는가?‘ 이는 틀린 이야기가 아닐지도 모른다. 애니메이션이 태생적으로 실사 뒤에 존재하는 방식이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나는 이야기하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존재하는 현실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고 재구축하는 행위에서 예술성을 찾을 수 있는 실사처럼, 의미를 담은 하나의 세계를 작화라는 이름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정교하게 설계해내가는 애니매이션 역시 예술적인 행위이리라.’


그렇다면, 이제서야 글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정해질 수 있게 되었다. 카타부치 스나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영화 <이 세상의 (그리고 다른 세상의) 한구석에>는, 애니메이션 영화로서 애니메이션이 아니라면 담아낼 수 없을 의미들을 담고 있는 작품이자, 담긴 의미들을 통해 과거를 되돌아보고, 현재에 촉구하며, 결과물을 미래로 이어줌과 동시에 나아가고자 하는 작품이다. 그 끝에서 우리는, 애니메이션이 엄연한 예술의 한 분야로서 성취할 수 있는 바를 기어코 증명해내고야 마는 카타부치 스나오 감독의 모습을 목격할 수 있다. 서론이 길었다. 지금부터 우리는 카타부치 스나오 감독이 증명하여 전달하고자 하는, 애니메이션이 엄연한 예술의 한 분야로서 성취할 수 있는 바, 혹은 작화와 움직임이라는 애니메이션의 오리지널리티들에 담긴 의미와 아름다움을 파헤치며, ‘애니메이션’ 영화로서의 정체성을 끝없이 표출하는 작품의 주제를 이해하고, 조금씩 따르며 이행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일본인과 그들의 역사를 넘어, 인간 그 자체에게까지 다가오는 것이다.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카타부치 스나오 감독이 전시의 일상을 세밀하게 애니메이팅하고자 하는 이유는, 그 순간들을 기억하기 위함이다. 주인공 스즈와 그녀의 가족들은 조국의 운명을 건 거대한 전쟁이 벌어지고 있음에도 최선을 다해 버텨내며, 일상을 유지하고 살아간다. 여기서 우리는 오랜 의문의 해답을 찾아낼 수 있게 된다. ‘어째서 절대 다수의 일본인들은 팔광일우라는, 대동아공영권이라는 거짓된 정의들을 신봉하고야 말았는가?’ 작화는 이에 해답을 제공한다. 어떻게든 일상을 살아내고자 하는 세밀한 움직임에서, 우리는 깨달을 수 있게 된다. 일본인들이 광기에 사로잡히면서까지 거짓된 정의를 신봉했던 이유는, 그들의 일상이 거짓된 정의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대공황 이후, 일본의 체제는 정치, 경제 등 전반적인 면에서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에 수뇌부가 선택한 것은 의외로 간단하지만 동시에 치명적인 방법이었다. 제국주의와 군국주의를 통한 수탈, 군수 경제로 체제의 수명을 연장시키는 것. 이 지점에서 일본인들은 거짓된 정의를 신봉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세뇌 교육이나 선전 등으로 거짓된 정의를 정당화하고자 하는 시도 역시 어느 정도 작용했겠지만, 그보다 더 직접적인 이유는 체제가 붕괴하는 순간 자신들의 일상 역시 함께 붕괴할 것임을, 일본인들은 무의식적으로 예감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거짓된 정의를 신봉하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일상을 유지해 줄, 거짓된 정의를 올바른 정의로 믿어내고 말았다. 전시의 일상을 표현하는 작화는 그러한 의미를 첫 번째로 담고 있다. 영화 속에서 작화는, 겉보기에는 전시에도 어떻게든 일상을 유지하고자 하는 스즈의 모습 속에서 전쟁이 그녀에게 입힌 상처를 그려내는 것으로, 일본인들을 무고한 피해자로 만들어내고자 하는 과정의 사전 작업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틀렸다. 영화의 후반부를 장식하는 것은 피해 호소가 아닌, 가해 자각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후술하겠지만, 스즈가 가해를 자각하는 순간, 우리는 우리의 눈에 아로새겼던, 세밀한 작화로 그려진 일상의 기억 역시 거짓된 정의로 이루어져 있었음을 깨달을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카타부치 스나오 감독이 추구하는 작화의 의미이자, 일종의 충격요법이다. 세밀하고 정교한 작화로 전시라는 고난 속에서도 일상을 유지하고자 하는 스즈의 모습과, 패배로 끝나버린 전쟁으로 인해 일상을 유지할 이유를, 유지했던 이유를 잃어버리며 울부짖는 스즈의 모습에서 우리는 극명한 대비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견딤에서 오는 치유력이 작화를 통해 극대화된 끝에 하루미의 죽음을 시작으로 붕괴하고 마는 모습. 이 지점에서 우리는 갈 길을 잃는다. ‘스즈의 치유적인 일상을 붕괴로 끝맺을 것이라면, 어째서 그들의 일상은 이토록 세밀하게 그려진 것인가?’ 그 순간, 카타부치 스나오 감독은 작화로 ‘그려진’ 스즈의 오열을 빌려 두 번째 의미인 깨달음을 우리에게 전한다. 조국의 패배에 스즈는 분노한다.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악착같이 버텼는데, 돌아온 것은 하루미의 죽음, 원자폭탄의 투하로 사라지고 떠난 고향과 가족, 끝내 들려온 패전의 소식 뿐이었으니까. 이에 누군가는 의아함과 함께 스즈처럼 분노할지도 모른다.


‘이것은 가해국의 일원으로서 가해에 가담한 주제에 자신들이 받은 피해만을 생각하고 있는, 이기적인 모습이 아닌가?’ 하지만, 뒤이어 그려지는 스즈의 모습은 누군가의 분노를 가라앉힌다. 패전의 소식에 분노하며 오열하던 스즈는, 어떠한 광경을 목격하며 분노의 이유를 다른 곳으로 돌려내기 때문이다. 패전에 분노하던 스즈는, 한 가정집에서 태극기가 게양되는 모습을 목격한다. 그 순간, 스즈는 깨닫는다. ’전쟁이라는 폭력 속에서도 자신과 가족들이 일상을 그나마 유지라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침략과 수탈이라는 또다른 폭력으로 빼앗은 것들이 존재했기 때문이었구나.‘ 이제 스즈는 자신에게 분노한다. 폭력으로부터 견디기 위해 시도했던 모든 행동들이 또다른 폭력의 결과물이라는 아이러니를, 그 폭력에 무의식적으로 동조했다는 부끄러움을, 스즈는 견딜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한번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어째서 스즈는 부끄러움을 깨달아버리고 만 것일까? 이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우리는 앞서 이야기했던 ‘거짓된 정의’를 떠올려야 한다.


스즈의 일상은 팔광일우, 대동아공영권 등의 이름으로 주장되었던 거짓된 정의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는 평범해 보이는 일상 뒤에 얄팍하게 가려져 있던 것이었다. 하지만, 일본은 전쟁을 통해 그 얄팍한 가림막을 스스로 걷어내어버린다. 그 순간 드러나는 것은, 펄럭이는 것은 거짓된 정의가 억누르고 있었던 것들의 상징과도 같은 태극기이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펄럭인 태극기, 그것은 얄팍함을 의미한다. 만일 거짓된 정의가 일상 속에 교묘히 숨어들어 사람들을 비폭력적으로 현혹하고 지배했다면, 태극기 역시 효과적으로 제압되어 전쟁이 일본의 패배로 끝나더라도 펄럭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의 선택은 폭력에 의존하는 것이었고, 이는 피지배자로 하여금 반감만을 품게 하여 거짓된 정의가 효과적으로 숨어들지 못하도록 만들어버렸다. 그 결과물이 바로 보란 듯이 펄럭이는 태극기이다. 그리하여 스즈가 이를 목격하며 오열하는 장면은, 얄팍하게 가려져 있던 거짓된 정의의 폭력이라는, 피해자이자 가해자가인 자들이 얻은 깨달음을 의미하게 된다.


폭력이란 얄팍함이다. 피지배자의 역습이 두려워, 얄팍하게 억누르는 것뿐이다. 그러니, 체제가 전복되는 순간 그 얄팍함은 곧바로 드러나게 될 수밖에 없다. 전시의 일상을 유지하고 있던 것은, 승리라는 신민들의 믿음을 기반으로 얄팍하게 숨어있던 거짓된 정의로 행해진 침략과 수탈이었다. 그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순간 함깨 드러나는 부끄러움이라는 깨달음을, 스즈는 얻었다. 그리하여 스즈의, 일본인들의 일상은 무너졌다. 일상을 유지시키던 거짓된 정의가 붕괴된 이상, 그들의 일상은 다시 재건될 수 없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스즈의, 일본인들의 일상은 이어진다. 어째서인가? 이 지점에서 ‘유지’는 거시적에서 미시적으로 초점을 맞춘다. 거시적으로 보면, 스즈의 일상을 유지시키던 것은 거짓된 정의로 행해진 침략과 수탈이었다. 하지만, 미시적으로 보면, 즉 스즈라는 인물의 주변을 둘러보면, 스즈의 곁에는 ‘이 세상의 한구석에’서 긿을 잃은 그녀를 발견해 줄 사람들이 존재한다. 바로 그들의 존재가 여전히 곁에 있기에, 일상은 이어진다.


거짓된 정의의 붕괴가 일시적으로 일상의 지속을 어렵게 만들지라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라면 견뎌낼 수 있고, 그 견딤의 끝에서 일상은 재건되어 이어질 수 있다. 이 마지막 의문의 해소를 통해 세 가지의 ‘어째서’라는 물음의 답은 하나로 합쳐지고, 우리에게 최후의 의미를 남겨준다. 지금부터 이야기할 것은 바로 그것이다. 거창하게 이야기하기는 했지만, 사실상의 요약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거짓된 정의는 폭력으로 일본인들의 일상을 유지하였고, 그 뒤에 숨어 일본인들을 전쟁의 피해자이지만 동시에 무의식적으로 폭력에 가담한 가해자로 만들었다. 그러한 정의가 무너졌을 때, 그들의 일상은 무너진다. 그렇다면, 어째서 일본인들은 붕괴한 일상을 이어낼 수 있었는가, 함께였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함께 살아나가야 한다. 폭력의 과오를 기억하며, 함께 살아나가, 그 깨달음을 미래로 이어내야 한다. 카타부치 스나오 감독의 <이 세상의 (그리고 다른 세상의) 한구석에>는, 그러한 의미를 애니매이팅이라는, 작화라는 이름으로 ‘그려내는’ 영화이다.


그려내야 하는 이유

그럼에도 의문은 남는다. 카타부치 스나오 감독은 ‘애니메이션’ 감독으로서 스즈의 일상을 세밀하게 그려내는 것으로 그 뒤에 숨어있던 거짓을 폭로하고 기억하여, 새롭고 아름다우며, 정겨운 일상을 새롭게 그려내고자 했다. 하지만, 반드시 그림이어야만 했는가? 물론, 나는 그렇다고 말하겠다. 영화 <이 세상의 (그리고 다른 세상의) 한구석에>가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져야 했던 이유는, 그림을 기반으로 하는 플랫폼인 만화를 가장 아름답게 재해석할 수 있는 것은 똑같이 그림을 기반으로 하는 플랫폼인 애니메이션이기 때문이다. 이는 작품의 내외적으로 작용하는 이유이다. 여기서 내란 작품 속에 등장하는 요소를 말하며, 외란 만화라는 플랫폼, 즉 원작 만화를 말한다. 먼저 외, 원작 만화와 결부지어 생각해보자. 만화는 그림으로 ‘그려져’ 있다. 이 사실을 통해 우리는 지극히 당연한 결론을, 그림으로 그려져 있는 원작 만화를 최대한 훼손하지 않은 채로 미디어믹스가 가능한 플랫폼은 같은 그림으로 그려진 플랫폼인 애니매이션 뿐이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만화를 실사화하면 필연적으로 괴리가 생긴다. 작가가 정교하게 그려내어 구현한 배경이 현실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배우의 생김새와 캐릭터의 생김새가 판이하게 다르다거나 하는 문제 등이 바로 그것이다. 애니메이션과 만화의 관계는 그러한 문제들을 보완해준다. 그림으로 그려져 있다는 공통점은 가상의 2차원과 현실의 3차원 간의 괴리를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다. 동시에, 보완은 진보로 발전한다. 만화에서 애니메이션으로, 괴리 없이 화면으로 옮겨진 세계는, 이윽고 ‘움직이기’ 시작한다. 애니메이션은 ‘움직이지 않는’ 만화를 움직이도록 만들어, 인물들을 더욱 확고하게 결정짓는 것이다. 여기서 외적 이유는 내적 이유와 이어진다. 애니메이션은 정적인 만화를 동적으로 만들어 인물의 모든 것을 극대화한다. 그중에서도 우리는 ‘마음’에 집중해야 한다. 이 영화에서 그림이라는 요소는 마음을, 더 깊게 보자면 ‘꿈’을 형상화하는 도구다. 미즈하라가 가진 감정도, 하루미의 로망도, 유녀들의 소망도 스즈는 그려낸다. 그것은 곧 희망이다.


전쟁이라는 고난 속에서도 일상을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드는 실낱같은 희망을, 스즈는 그려낸다. 덕분에 미즈하라는 마음에 둔 적이 있었던 상대인 스즈를 꿈꾸며, 하루미는 웅장한 전함을 꿈꾸며, 유녀들은 아이스크림과 머나먼 이국을 꿈꾸며 고난에도 살아나간다. 그것은 애니메이션으로 생생하게 그려져, 이윽고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것이 바로 영화 <이 세상의 (그리고 다른 세상의) 한구석에>가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져야만 하는 이유다. 나는 그림으로 그려진 꿈은 실사로는 완벽히 재현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결국, 애니메이션으로 그려진 꿈은 우리를 몰입시킨다. 이것이 바로 감독의 의도이다. 그렇다면, 몰입의 끝에 폭발하는 것은 존재할 수밖에 없다. 몰입의 끝에서, 시한폭탄의 폭발로 하루미는 세상을 뜨고, 스즈의 손은 잘려나간다. 그 순간 꿈은, 희망은 사라지고 만다. 전함을 보며 꿈과 희망을 품던 하루미는 이제 없고, 더 이상 스즈는 모두의 꿈과 희망을 작게나마 구현하는 그림을 그릴 수 없다. 이는 앞서 이야기한 거짓된 정의에 상응하는 것이다.


그림으로 그려진 희망으로 유지되던 일상 뒤에 숨어 모든 것을 얄팍하게 조종하던 거짓된 정의가 붕괴했을 때, 이에 조응하던 그림, 거짓된 꿈과 희망은 붕괴한다. 어린 하루미가 순진하게 꿈꾸던 전함이 군국주의의 상징으로서 침몰하게 되는 것처럼. 그것이 당시의 흔한 풍경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더욱 안타깝다. 하지만, 그럼에도 희망은, 일상은 다시 피어난다. 그 이유는 이미 이야기하였다. 거짓된 정의로 유지되던 희망과, 스스로 자생하는 희망의 대비. 이를 그려내기 위하여 카타부치 스나오 감독은 ‘그림’을 ‘애니메이팅’하여 움직이게 만드는 것으로 꿈과 희망의 마음을 강조한다. 이것이 바로 <이 세상의 (그리고 다른 세상의) 한구석에>라는 영화가 애니메이션으로 ‘그려져야만’ 했던 이유다. 그림 속에서 아름답게 그려지는 또 다른 그림으로 우리를 깊은 곳에서 더 깊은 곳까지 이끄는 애니매이션만의 방법론을 실사는 모방하지 못하리라. 결국 우리는 알게 된다. 카타부치 스나오는 그려냄으로 마음의 깊이를 조절하여 화면으로 내보일 줄 아는 감독임을.


총평

어째서 그들은 거짓된 정의를 지켜내려 했는가, 그들의 일상은 거짓된 정의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에. 어째서 그들은 깨달아버리고 말았는가, 그들의 일상을 이루고 있었던 거짓된 정의는 얄팍하게 가려진 진실로 이루어져 있었음이 펄럭이는 깃발과 함께 드러나고 말았기 때문에. 그들의 일상은 어째서 새로이 이어지게 되는가, 깨달음 끝에 ‘이 세상의 한구석에’ 떨어져버린 나를 발견해주는 사람들이 그럼에도 존재하기 때문에. 카타부치 스나오 감독의 영화 <이 세상의 (그리고 다른 세상의) 한구석에>는 이치럼 일본의 근대사를 관통하는 격동적이고 논쟁적인 주제들을 세밀하고 아름답게, 뭉클하고 희망적으로 ‘그려내어’, 전쟁의 피해자이자 무의식적으로 전쟁을 수행한 가해자였던 사람들의 기억을 애니메이션의 오리지널리티와 함께 위대하게 되돌아보면서 새로이 내디뎌간다. 그 끝에서 우리는 깨달을 수 있다. 이 영화가 남긴 주제는 특정 국가와 민족에게 한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결국 누구든 과거를 돌아보며 현재를 살아 미래로 이어내어야 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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