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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가레보시 Jan 02. 2024

1984

전체주의의 극한과 그 경고


전체주의의 극한에 다다른 국가는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다. 프랑코의 스페인, 히틀러의 독일, 무솔리니의 이탈리아, 스탈린의 소련도 악명 높은 전체주의 국가였을지언정 그 극한에 다다르지 못했다. 그렇다면, 전체주의의 극한에 다다른 국가란, 혹은 세계란 무엇일까? 자신의 사상이 국가의 사상에 반한다는 이유로 통제되는 세계? 국가에 반한다고 판단되는 자들이 쥐도새도 모르게 사라진 후 훗날 세뇌된 인민들에게 조리돌림 당하는 세계? 이 예시들은 극한에 다다른 전체주의 세계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전체주의의 극한에 다다른 세계란, 애초에 반할 생각조차 존재하지 않는 세계이다. 조지 오웰은 바로 그 세계를 자신의 소설 <1984>에, 문학이라는 예술 속에 그려내었다.


<1984>의 무대인 오세아니아의 등장 이전에 존재했던 전체주의 국가들에는 언제나 ‘반동분자’들이 있었다. 당장 조지 오웰의 에세이 작품 <카탈로니아 찬가>에서도 주요 사건으로 등장하는 스페인 내전에서 프랑코의 독재 야망에 맞서 싸운 사람들이 있었고, 히틀러를 중심으로 주장되었던 나치즘에도 반대자들은 있었으며, 무솔리니는 아예 자국민의 손에 죽었을 정도이고, 스탈린이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자신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이나 반대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을 모조리 숙청한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한 ‘반동분자’들의 최후는 어땠을까? 소설 속에서 오브라이언은 말한다. 그들은 사형장으로 향하는 순간까지 반항심을 품고 있었을 것이라고. 이것이 바로 스페인과 독일, 이탈리아와 소련이 끝내 전체주의의 극한에 다다르지 못한 이유이다. 프랑코의 총칼은, 히틀러의 나치즘은, 무솔리니의 파시즘은, 스탈린의 대숙청은 결국 사형장으로 향하는 이들을 완전히 굴복시키지도, 전향시키지도 못했다. 그렇다면, 그들은 결국 자신들의 모든 것을 단숨에 무너뜨려버릴지도 모르는 ‘반동분자’를 두려워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빅 브라더의 오세아니아는 그러한 과거의 인물들과 국가들을 뛰어넘어, 전체주의의 극한에 다다른 국가, 혹은 세계가 되었다. 물론, 오세아니아에도 ‘반동분자’는 있다. 하지만, 동시에 없다. ‘반동분자’가 101호실에 입실하게 되면, 빅 브라더에 대한 증오는 눈 녹듯이 사라지고 열렬한 사랑만이 남는다. 그 순간, ‘반동분자’는 애초에 없었다. 모두가 빅 브라더를 사랑하고 있다는 현실만이 남을 뿐이다. 이것이 바로 전체주의의 극한에 다다른 세계, 반하고자 하는 생각마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세계이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인간은 사고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고를 통해 자신만의 세계관을 확립해나가기에, 인간은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오세아니아의 ‘당’은 사고를 통제한다. 자유로운 사고는 금지되고, 당의 사고만이 주입된다. 결국, 인간들은 판단력을 잃고 인간의 지위를 박탈당한 채 빅 브라더만을 사랑하게 된다. 그것은, 더 이상 살아있는 상태라고 볼 수 없다. 빅 브라더의 존재유무조차 생각해보지 못하고 죽어버린 사람들이 들어찬 세계, 유일하게 당에 맞서볼 수 있을지도 모르는 프롤들은 애초에 인간 이하로서 부품이 되어버린 세계. 그 위에서 빅 브라더라는 상징 뒤에 숨은 채 순수히 권력을 탐하는 자들이 존재하는 세계.


이것이 바로 전체주의의 극한에 다다른 세계이다. <1984>가 영원히 살아숨쉬게 될 걸작인 이유는, 그러한 정치적인 사실을 문학이라는 예술로서 소름끼칠 정도의 현실감과 함께 녹여내었다는 점이다. 조지 오웰은 에세이 <나는 왜 쓰는가>에서 밝힌 바 있다. ‘나의 목표는 정치적 글쓰기를 예술로 만드는 것이다.’ 옳아보이는 정치 사상을 가진 글이라고 해서 무조건 호평받을 수는 없다. 예를 들어, 독재를 비판하는 소설이라고 하더라도 그 문장이 비문으로 점철되어 제대로 읽을 수 없는 상태라면, 그것은 예술로서 호평받을 수 없다.


바로 이 지점이다. 조지 오웰은 ‘정치적 글쓰기의 예술성’이라는 지점에서 성공을 거둔 작가이다. <1984>의 주제는 ‘전체주의에 대한 비판과 경고’이다. 이는 정치적이고, 보편적으로 옳은 생각이기도 하다. 동시에, <1984>는 ‘문학적으로도’ 훌륭한 작품이다. 오세아니아라는, 전체주의의 극한에 다다른 국가, 혹은 세계에서 반항심을 품지만, 101호실에서의 고문 끝에 그 마음을 잃고 사실상 죽어버리고 마는 윈스턴의 이야기는, 암울한 세계관과 그 세계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글로서’ 흥미롭고 섬뜩하게 그려낸 결과이다.


예술 분야들에는 그것들이 어째서 예술인지를 증명해내는 요소들이 존재한다. 영화의 경우에는 필름과 카메라이고, 비디오 게임의 경우에는 플레이이며, 문학의 경우에는 글이다. 그중에서도 소설, 즉 산문의 경우에는 문장이 예술성을 결정짓는다. 조지 오웰의 문장은 오세아니아라는 국가, 혹은 세계를 체화하도록 만든다. 동시에, 그곳에서 서서히 무너져가는 주인공 윈스턴에 동화되어, 무력감과 절망감을 느껴보도록 만든다. 즉, 조지 오웰의 문장은 독자를 전체주의의 극한에 다다른 세계에 떨어뜨려 체험하도록 만드는 것으로 독자들 스스로가 전체주의를 비판하고 경계하도록 한다. 이것이 바로 조지 오웰이 추구했던, 정치적 글쓰기가 예술로 만들어진 모범적인 사례이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로 어째서 <1984>가 훌륭한 예술 작품인지에 대해서는 설명되었으리라고 생각한다. 수많은 예술가들이 작품을 통해 자신의 정치 사상을 드러낸다. 하지만, 대부분의 결과물들은 저열한 프로파간다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조지 오웰은 이들과는 다르다. 조지 오웰의 글은 그의 정치관을 훌륭하게 뒷받침하면서도, 예술성을 잃지 않는다. 이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조지 오웰의 글들은 지금까지 읽히며 전체주의의 현주소를 경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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