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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가레보시 Dec 03. 2023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저널리즘의 예술성


‘저널리즘은 예술이 될 수 있는가?’ 나는 이 질문에 ‘그렇다’라고 확실하게 답을 내리는 영화를 감상한 적이 있다. 웨스 앤더슨 감독의 영화 <프렌치 디스패치>가 바로 그것으로, 마치 기사가 극화(劇化)된 것처럼 다가오는 이야기들을 필름과 카메라를 통해 촬영하는 것으로 감독 스스로가 정해둔 답이자 영화의 주제인 ‘저널리즘의 예술성’을 관객들에게 설명해내는 작품이다. 한편, 카이 버드와 마틴 셔윈이 저술한 J.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평전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는 앞의 <프렌치 디스패치>와는 다른 방식으로 ‘저널리즘의 예술성’을 발산하고 있다. 조금 의아하게 생각되실지도 모르겠다. <프렌치 디스패치>는 애초에 ‘저널리즘의 예술성’을 주제로 잡고 있는 영화이지만,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는 저널리즘을 다루는 작품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를 읽어내리는 동안 독자들은 그 안에 내제된 저널리즘의 예술성을 자연스럽게 깨달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독자인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하며 글을 읽어내려야만 한다. ‘저널리즘은 어떻게 예술이 되는가?’


25년 간의 답사와 인터뷰, 자료 수집을 통해 완성된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는, ‘저널리즘이 예술로 만들어져 가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프렌치 디스패치>와 비슷해보인다. 전자도, 후자도 ‘하나의 기사, 혹은 도서를 완성하기 위한 저널리스트의 고군분투’라는 지점에서 예술성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프렌치 디스패치>는 감독 웨스 앤더슨 스스로가 ‘저널리즘은 예술이다‘라는 답을 내려놓은 채, 폐간호 잡지를 완성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저널리스트들의 모습을 필름과 카메라로 촬영하여 그 답을 관객으로 하여금 느낄 수 있도록 만드는 작품이다. 그러나,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에서 드러나는 ‘저널리즘의 예술성’은 사실 작품의 주제조차 아니다. 나는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를 J.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일생을 낱낱이 추적하는 것으로 메카시즘 시대를 고발함과 동시에, 그러한 시대의 재림을 경고하는 주제를 담고 있는 전기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작품’이라는 단어 선택에 주목해주시기 바란다. ‘작품’이라는 단어는 대부분 예술 분야에서 사용된다. 즉, 나는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를 예술의 범주에 속하는 서적이라고 생각하는 셈이다. 자, 그렇다면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는 어째서 예술 작품이 될 수 있는가? 그 이유는 바로 ‘과정’과 ‘모습’에 있다. 분명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의 주제는 ‘저널리즘의 예술성’이 아니다. 그러나, 메카시즘 시대에 대한 경고와 재림의 여지에 대한 경고라는 주제를 저술해내는 과정과, 그 과정을 이행하는 저자들의 모습은 충분히 예술적이다. 25년 동안의 답사와 인터뷰, 자료 수집을 통해 완성된 J.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일생은 ‘이것이 과연 전기인가?’ 하는 착각이 들게 만들 정도로 자연스럽게, 혹은 ‘문학적으로’ 저술되어 있다.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를 읽다 보면, 저자의 의견, 혹은 주장이 강하게 제시되는 대목들을 제외한 대목들은 마치 하나의 이야기를 읽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 이야기는 사실 창작, 문학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집대성, 비문학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그 결과물이 예술 분야에 속하는 문학에 비견되는 감상을 선사한다는 것은 충분히 인상적이다. 하지만, 이조차도 ‘저널리즘의 예술성’이라는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의 성과를 입증하는 최대의 증거로 기능하지는 않는다.


이쯤에서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복기해보도록 하자. ‘과정’과 ‘모습’이다. 예술 작품에는 그것을 만들어내는 도구의 존재가 끝없이 드러난다. 예를 들어, 영화의 경우 필름과 카메라는 작품을 만들어내는 도구로서 그 존재를 드러내며, 음악의 경우 레코드나 카세트 테이프는 녹음한 음악을 최종적으로 담아내는 도구로서 그 존재를 드러낸다. 실제로, 영화감독 야마다 나오코는 영화 <타마코 러브 스토리>를 통해 도구들의 존재와 작품의 주제를 연관지어 타마코와 모치조라는 두 주인공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만들어내었을만큼, 창작의 과정에 있어 도구는 상당히 중요한 지점으로 다가오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그러한 도구를 사용하는 사람들, 즉 예술가들의 ‘모습’과, 그들이 도구를 사용하는 ‘과정’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히라오 타카유키 감독의 영화 <영화 너무 좋아 폼포 씨>를 보면, 그 생각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감독의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감독이 없다면 영화는 예술로서 성립될 수 없다. <영화 너무 좋아 폼포 씨>는 그 사실을 당연하게도 인정하는 작품이다. 다만, 이에 부연 설명을 덧붙인다. ‘영화 예술에 있어 감독의 존재는 절대적이겠지만, 감독의 뒤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수많은 스태프와 관계자의 존재 역시 잊혀서는 안 된다.’ 이는 곧 영화 예술을 완성시키는 도구인 필름과 카메라에 대한 지분과 기여가 오직 감독에게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 된다. <영화 너무 좋아 폼포 씨>는 카메라를 작동시키고자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영화이다. 그렇다면, 퍼즐은 조금씩 맞춰진다.


필름과 카메라라는 도구를 활용하며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과정’. 이들을 통해 영화라는 예술 작품은 최종적으로 완성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알 수 있게 된다. 예술 분야에 있어 그것을 만들어내기 위한 도구의 영향력은 분명 거대하지만, 그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것을 활용하는 ‘모습’과 ‘과정’이라는 것을.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에서도 그 사실은 고스란히 적용된다.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의 저자들이 저술을 위해 사용한 도구는 (현실적으로든, 비유적으로든) 펜이다. 그렇다면, 펜이라는 도구를 활용하기 위해 고군분투한 저자들의 ‘모습’은 어떠했는가? 그 ‘과정’은 어떠했는가?


바로 여기에서 ‘저널리즘의 예술성’이 입증된다. 카이 버드와 마틴 셔윈, 두 저자들은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를 저술하기 위해 25년이라는 긴 세월을 바쳐 답사하고, 인터뷰하고, 자료를 수집했다. 그 ‘모습’과 ‘과정’은 영화 <프렌치 디스패치>처럼 카메라로 촬영되고 필름으로 영사되어 우리의 눈 앞에 당도하지는 않지만, 완성된 작품을 읽어내리는 것만으로도 펜을 놀리기 위해 고군분투했을 저자들의 ‘모습’과 ‘과정’은 생생하게 상상된다. 나는 그것이 <영화 너무 좋아 폼포 씨>에서 필름과 카메라라는 도구를 활용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고군분투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영화라는 예술 작품에 드러나는 ‘모습’ 및 ‘과정’과 같은 성질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이제, ‘저널리즘의 예술성’의 입증에 마침표를 찍을 때가 다가왔다. 예술가는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작품으로 표현한다. 화가는 그림으로, 영화감독은 영화로, 음악가는 음악으로. 저널리스트 역시 그러하다. 저널리스트는 글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한다. 이는 시인이나 소설가와 같은 문학가의 범주에 저널리스트가 포함된다는 것으로 생각될지도 모르지만, 저널리스트의 저널리즘은 문학가의 문학정신과는 차별화되는, 독립적인 범주 속에 존재한다고 나는 믿는다. 그 믿음을 뒷받침하는 것이 바로 답사, 인터뷰, 자료 수집 등의 행동들을 종합하여 하나의 글을 완성해냄과 동시에, 자신들의 생각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저널리스트만의 ‘모습’ 및 ‘과정’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카이 버드와 마틴 셔윈은 J.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평전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를 통해 그 사실을 철저하게 입증해보였다. 이는 ‘간접적이었던’ 웨스 앤더슨 감독의 영화 <프렌치 디스패치>와 달리 ‘직접적이다’. <프렌치 디스패치>의 경우에는 감독이 ‘저널리즘은 예술이다’라는 답을 정해놓은 후, 그 답에 맞추어 구성된 화면으로 해설을 제공한다. 관객은 그 화면을 감상하면서 ‘저널리즘은 예술이구나’하고 ‘간접적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의 경우에는 다르다. 독자는 카이 버드와 마틴 셔윈이 집필한 글을 읽어내리면서, 그들이 함께 달려온 고군분투의 ‘모습’ 및 ‘과정’과 함께 ‘저널리즘의 예술성’을 ‘직접’ 깨달을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가 위대한 저작이자 예술 작품인 진짜 이유이다.


이쯤에서 누군가는 질문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는 저널리즘의 예술성을 증명하는 저작이기 이전에 미국이라는, 현대 자유민주주의의 상징과도 같은 국가에 존재하는 명백한 오명인 메카시즘 시대에 대한 고발과, 그 재림을 경고하는 주제를 담은 저작이 아닌가?’ 물론 그러하다. 하지만, 우리는 그 주제가 ‘저널리즘의 예술성’을 기반으로 하여 천천히 쌓아올려졌다는 사실을 감안해야 한다. 펜을 놀리기 위해 고군분투한 저자들의 ‘모습’과 ‘과정’이라는 예술적인 행위 속에서 우리는 ‘저널리즘의 예술성’을 먼저 발견할 수 있고, 그 존재 덕에 비로소 쌓아올려질 수 있었던 ‘고발과 경고’라는 작품의 주제를 마저 발견한 다음, 끝내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정리와 함께 글을 마쳐보고자 한다.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는 ‘평전’으로서 J.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일생을 평하며, 죽음의 무기를 만든 과학자가 이를 통제하려다 실패하는 모습을 통찰하는 것으로 자유민주주의를 실종시킨 메카시즘을 비판하고, 그 재림까지 경고한다. 동시에,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는 20세기 초중반의, 미친 듯이 격동했던 미국사를 J. 로버트 오펜하이머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풀어내는 역사서이기도 하며, 카이 버드와 마틴 셔윈이라는 두 저자가 펜을 놀리기 위하여 고군분투한 ‘모습’과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저널리즘이 끝내 예술로 거듭나 만들어진 ‘작품’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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