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의 존재와 야마다 나오코의 진보
2023년 10월 21일, 나는 제25회 부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이하 BIAF)에 방문했다.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야마다 나오코 감독의 신작 단편 영화 <기억의 정원>을 관람하기 위해서였다. 만약 제25회 BIAF에서 <기억의 정원>을 관람하신 분이 계신다면 어떤 감상을 받으셨을지 궁금하다. 내가 극장을 나서며 들었던 다른 관람객들의 감상은 ‘이해하기 어렵다’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감상이라고 생각한다. 단편 영화는 장편 영화와 달리 러닝타임이 짧기 때문에 짧은 시간 안에 주제와 이야기를 표현하기 위하여 관객에게 많은 정보를 빠르게 전달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기억의 정원> 역시 그러한 경향을 어느 정도 갖고 있는 작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야마다 나오코 감독의 단편 영화 <기억의 정원>을 명작이라고 생각한다. <기억의 정원>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이라는 야마다 나오코 감독의 정체성을 여전히 잇고 있는 작품임과 동시에 이전의 작품들과는 다른 새로움 역시 여전히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만남과 이별, 카메라의 존재론
야마다 나오코 감독의 단편 영화 <기억의 정원>은 연인 간의 사랑이 깊이 연관되어 있는 만남과 이별의 순환을 다루는 작품이다. 그렇다고 해서 <기억의 정원>을 연인 간의 사랑을 경험해 본 사람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영화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언제나 이야기하는 것이지만, 야마다 나오코 감독의 주제와 정체성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이다. 만남과 이별 역시 그러하다. 누구나 만남을 경험하고, 이별을 경험한다. 이들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되풀이되는 경험들이며, 그 경험들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되풀이되어 느껴질 마음들을 낳는다. 따라서 야마다 나오코 감독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마음들을 만들어내는 경험들인 ‘만남과 이별’을 연출하기 위해 사랑이라는 또 다른 변하지 않는 마음을 활용한 것에 가깝다. 그렇기에 누구나 <기억의 정원>을 이해할 수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야마다 나오코 감독의 단편 영화 <기억의 정원>의 토대가 되는 ‘만남과 이별’이 무엇을 위하여 기능하는지에 대해 알아보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두 경험들의 과정을 파헤쳐야 한다.
<기억의 정원>은 이전에 사랑했던 사람과의 기억이 아직 남아있는 방 안에서 홀로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여주인공의 모습이 반복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따라서 영화는 얼핏 보면 그녀의 시점에서 전개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야마다 나오코 감독은 영국에서의 인터뷰를 통해 그것은 사실이 아님을 밝힌 바 있다. 동시에 <기억의 정원>은 여주인공이 사랑했던 남주인공의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되는 영화이며, 관객은 작품을 통해 직접 그 시점이 되어보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렇기 때문에 <기억의 정원>은 흥미로운 영화가 된다. 세상을 떠난 남주인공의 1인칭 시점이 그대로 카메라가 되고, 카메라는 남주인공이 사랑했던 여자친구인 여주인공을 촬영하는 것으로 관객을 남주인공의 1인칭 시점에 동화시켜, 끝내 관객은 영화 예술의 결정체인 카메라의 본질을 카메라 그 자체가 되어 체험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있어 이보다 더 흥미로운 것이 어디 있겠는가? 야마다 나오코 감독은 그러한 카메라의 존재로부터 주제를 확립해가기 시작한다.
이제 남주인공의 1인칭 시점이 되어 처음으로 되돌아가 보자. 남주인공은, 혹은 카메라와 우리는 이전에 사랑했던 떠나간 사람과 함께한 흔적이 아직 남아있는 방에서 홀로 살아가고 있는 여주인공의 일상이 반복되는 모습을 그저 바라보고 있다. 살아있는 그녀의 세계에 간섭할 수 없는 남주인공은 자신을 잃고도 홀로 일상을 반복하고 있는 여주인공을 향해 직접 감정을 표현할 수 없다. 그저 그녀를 바라보는 자신의 시점을 촬영한 결과물이 영사되는 화면에 이모지를 띄우는 것으로 간신히 대신할 뿐이다. 그러한 남주인공은 여주인공과 사귀기 이전에 사귀었던 것으로 보이는 검은 머리 여인의 일상 역시 조금은 바라본다. 이는 남주인공이 죽음 이후 이제까지 맺어왔던 관계들을 이리저리 떠돌면서 바라보고 추억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주인공의 마음은 마지막으로 사랑한 존재에게 닿아있다. 그렇기에 남주인공의 1인칭 시점이 아닌 카메라의 3인칭 시점으로 바라보는 유일한 세계인 환상 속에서 남주인공과 재회하는 것은 여주인공이다.
이 환상으로부터 카메라의 시점은 조금씩 여주인공의 시점으로 옮겨가는 것처럼 보인다. ラブリーサマーちゃん의 음악이 시작되면서 여주인공과 남주인공이 함께 갖고 있는 기억, 함께 했던 일상들은 필름이 돌아가는 것처럼 연출된 플래시백을 통해 여주인공이 홀로 반복해 왔던 일상들과 오버랩된다. 잠시 여담으로 빠지자면 이는 <타마코 러브 스토리>에서도 시도되었던 것이며, 이를 통해 야마다 나오코 감독은 여전히 영화에 대한 애정을 영화의 상징을 통하여 표출하고자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여주인공과 남주인공의 공통된 기억과 일상이 겹쳐지면서, 카메라의 3인칭 시점으로 바라보는 유일한 세계, 두 사람이 재회할 수 있는 환상의 세계는 만들어진다. 이 지점에서 관객은 조금씩 여주인공의 시점으로부터 그녀의 감정을 읽어낼 수 있게 된다. 환상의 세계에서의 여주인공은 추억한 끝에 환상으로나마 현현한 사랑과 해후하면서 완전한 이별을 이루어낼 수 있게 된다. ‘사랑해, 안녕히.’ 가사이자 여주인공의 대사인 이별의 고백, 따뜻하고 쓰라리다.
재회와 완전한 이별 이후의 카메라는 더 이상 남주인공의 시점을 반영하고 있는지, 여주인공의 시점을 반영하고 있는지 명확하게 알 수 없어진다. 이별을 고백하는 여주인공의 모습을 촬영하는 카메라는 남주인공의 시점이었을까, 여주인공의 감정을 반영한 시점이었을까? 진정한 이별 이후 남주인공이 성불했다고 생각한다면 후자일 수 있겠지만, 후술할 마지막 장면에서 빈 방에 함께 들어온 커플 중 한 명이 여주인공이라고 생각해 본다면, 여전히 카메라는 남주인공의 시점을 반영한 채로 추억의 방에 남아 이전의 사랑인 검은 머리의 여인을 바라본 적이 있었던 남주인공처럼 다음 사랑을 만나게 된 여주인공을 바라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남주인공과 여주인공이 진정한 이별을 이룬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카메라가 반영하는 정체성보다도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이라는 야마다 나오코 감독의 정체성이다. 마지막 장면, 이별과 함께 비어버린 방에는 새로운 커플이 들어온다. 그 커플 중 한 명이 여주인공인가 아닌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반복됨이다.
만남과 이별은 반복된다. 비어버린 방에서 새로운 만남과 사랑을 시작한 커플은 빈 방을 새롭게 채워나갈 것이고, 언젠가 이별하게 되면 방은 다시 새롭게 비어버릴 것이다. 이는 반복된다. 야마다 나오코 감독은 그렇게 채워짐과 비워짐을 반복하는 방에 꽃병을 가져다 둔다. 그 순간 카메라는 다시 중요해진다. 카메라는 아네모네 꽃이 담긴 꽃병을 촬영한다. 그 꽃에는 지금까지의 모든 기억과 사랑이 담겨있다. 화면 안에 명확하게 명시된 그 꽃의 주인은 세상을 떠난 남주인공에게 마음을 가진 적이 있었던 여주인공과 검은 머리의 여인이다. 그러나 채워짐과 비워짐을 수없이 반복하는 방에 놓인 꽃병을 카메라가 촬영해 버리는 순간, 앞으로도 수많은 만남과 이별을 반복할 커플들 역시 꽃의 주인이 된다. 그리하여 카메라는 만남과 이별이라는, 영원히 반복되는 경험을 촬영할 수 있게 되고, 자연스럽게 수많은 만남과 이별이 만들어낼 마음들 역시 암시될 수 있게 된다. 그것이야말로 수많은 만남과 이별의 반복들이 두고 간 마음, 꽃이 아름답게 피어있는 ‘기억의 정원’이리라.
야마다 나오코 감독에게 음악이란
ラブリーサマーちゃん의 음악은 지금까지 이야기한 모든 것을 남김없이 담아낸다. 따라서 <기억의 정원>은 마치 뮤직 비디오처럼 보이는 영화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뮤직 비디오식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노래가 흘러나오는 동안 무의미한 장면들이 흘러나오는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영화 <날씨의 아이>가 대표적인 예시이다. 하지만 나는 <기억의 정원>을 뮤직 비디오식 영화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설사 뮤직 비디오라고 하더라도 흘러나오는 음악과 함께 상영되는 장면들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뮤직 비디오를 음악가가 부르거나 연주하는 음악을 영상으로 담아내는 장르라고 생각한다. <기억의 정원>은 그 정의의 정반대에 서 있는 영화이다. <기억의 정원>은 음악을 통해 화면이나 이야기, 주제 같은 영화의 전부를 남김없이 담아내는 작품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야마다 나오코 감독에게 있어 음악이란 영화라는 종합 예술을 통해 자신의 주제를 표현하기 위한 방법론적 도구라는 사실을 다시금 알 수 있게 된다.
야마다 나오코 감독의 숨겨진 능력
이쯤에서 조금은 다른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단편 영화 <기억의 정원>을 관람하는 동안 나는 야마다 나오코 감독이 유아사 마사아키 감독과 그가 설립한 애니메이션 제작사 ‘사이언스 SARU’의 연출 및 작화 방식을 받아들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플래시백 연출 등에서 자주 활용되었던 몽환적인 연출이 현실까지 확대된 후 시각적으로 눈치챌 수 있을 만큼 색채적으로 변화하였다거나, 매 순간 동안 일렁이는 작화를 추구한다거나 하는 것 등이었다. 여기서 놀라운 점은 그러한 영향들이 일체의 어색함 없이 야마다 나오코 감독의 본래 방식들에 녹아들었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이는 이전에도 꾸준히 드러났던 야마다 나오코 감독의 능력이다. 그 예시로 영화 <타마코 러브 스토리>를 들 수 있다. 야마다 나오코 감독은 이시하라 타츠야 감독로부터 사사한 코미디 및 일상 연출 기술을 자신만의 연출 기술 및 주제와 융합하여 <타마코 러브 스토리>를 자신의 최고작으로 만들었다. 이는 야마다 나오코가 어떤 영향도 자신만의 것과 훌륭하게 융합시키는 능력을 지닌 감독임을 증명한다.
총평
야마다 나오코 감독의 신작 단편 영화 <기억의 정원>은 가히 야마다 나오코 감독의 신지평이라고 부를 수 있을 작품이다. 지금까지 야마다 나오코 감독은 <기억의 정원>만큼 노골적인 이별 그 자체를 그려낸 적이 없었다. <타마코 러브 스토리>의 미도리는 실연했지만 딛고 일어서고, <리즈와 파랑새>의 노조미와 미조레는 언젠가 갈라질 것이지만 그럼에도 지금은 함께한다. 그러나 <기억의 정원>의 이별은 그 자체로 끝이다. 환상 속 잠깐의 재회 이후에 진정한 이별의 고백이 있을 뿐, 이별한 자들은 재결합하지 못한다. 대신 새로운 만남이 탄생한다. 이 지점에서 야마다 나오코 감독의 주제,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은 진보한다. 이전의 야마다 나오코는 한 가지의 마음을 깊이 파고드는 감독이었다. <케이온!>의 학창 시절, <타마코 러브 스토리>의 첫사랑을 둘러싼 결실과 실연, <리즈와 파랑새>의 남성은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여성들 간의 묘한 우정 등. 그렇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야마다 나오코 감독은 <기억의 정원>을 통해 분명 이별과 그 마음을 그려내야 했을 터였다.
하지만 <기억의 정원>에 들어선 야마다 나오코 감독은 이별에서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새롭게 진보한다. 이별이라는 마음을 딛고, 만남이라는 마음으로 나아가서, 기억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기억의 정원>을 야마다 나오코 감독의 신지평으로 부를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줄곧 하나의 마음을 다루었던 야마다 나오코 감독이 하나를 딛고 둘, 셋을 다루어내기 시작했다. 교토 애니메이션의 영향과 애니메이션을 바라보는 사이언스 SARU의 시선으로부터 깨달은 영향, 그리고 감정 및 관계, 음악이라는 방법론들은 영화의 권능과 상징물을 추구하는 야마다 나오코 감독의 연출력과 융합하여 진보를 돕는다. 야마다 나오코 감독은 언제나 카메라라는, 영화의 권능을 탐구하고 작품에 담아 왔다. 그것은 리얼리즘 작화를 추구하는 교토 애니메이션의 영향일지도 모르지만, 감독 본인의 취향처럼 보이기도 한다. 동시에 야마다 나오코 감독은 자신만의 주제를 끊임없이 갈고닦으며 발전시키기도 한다. 그것이야말로 야마다 나오코 감독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라고, 나는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