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의 머리에, 이무기의 꼬리
2021년 일본 애니메이션계의 최대 문제작을 꼽으라면, 나는 와카바야시 신 감독의 TV 애니메이션 <원더 에그 프라이어리티>를 꼽을 것이다. 마지막화까지 흥미롭게 진행되던 작품이 마지막화에서는 '엔딩이 존재하지 않는 작품', '용두무미'라는 평가를 들을 정도로 비판받았으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원더 에그 프라이어리티>를아예 비판받을만한 작품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정말 좋아하는 감독인 야마다 나오코 감독의 영향을 짙게 받은 와카바야시 신 감독의 연출이 무척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흑막의 존재를 확실히 설명하지 않고, 갑작스레 부활을 선언하는 주인공의 모습으로 끝나버리는 엔딩이 작품의 비판점이 되어버린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종영으로부터 2년 반이 지난 지금, 나는 <원더 에그 프라이어리티>를 다시 시청하고, 작품을 제대로 파악해서, 가능한 한 내가 느낀 모든 것을 리뷰에 쏟아내기로 했다. 그렇게 다시 시청하게 된 <원더 에그 프라이어리티>는, 역시 훌륭한 작품이 맞았다고 생각한다.
자신을 믿고, 뛰어드는 이야기
내가 TV 애니메이션 <원더 에그 프라이어리티>를 처음 시청했을 때는, 여러 가지 사회의 문제점들을 비판하는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이지메와 히키코모리, 성폭행 같은 사회의 문제점들로 인하여 소녀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되었다는 무겁고 자극적인 설정들이 전면적으로 등장하는 작품이니, 그럴 법도 했다. 하지만, 나는 작품을 다시 시청한 후 그 생각을 거두게 되었다. <원더 에그 프라이어리티>는 사회적인 시선으로 만들어진 작품이 아닌, 심리적인 시선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오히려, 사회적인 시선은 심리적인 시선을 꾸며주는 장치로 기능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원더 에그 프라이어리티>에서 나타나는 심리적인 시선이란 무엇일까? TV 애니메이션 <원더 에그 프라이어리티>는 아이들의 불안과 충동을 깊이 조명한다. 무엇에 의해 아이들은 불안에 휩싸이고, 충동적으로 행동하게 되는가. 동시에, 그 끝에서 얻게 되는 깨달음과, 미래를 바라보는 새로운 선택을 강조한다. 그것이 바로 논란의 지점이지만, 나는 결국 이해하게 되었다.
<원더 에그 프라이어리티>는 기본적으로 마법소녀에 기반을 둔 어반 판타지 애니메이션이라고 볼 수 있다. 사회적인 문제들을 형상화한 원더 킬러에 맞서 히어로가 되어 소환자들을 지켜내면, 자살로 인해 다시는 만날 수 없게 된 사람들을 만날 수 있게 된다는 설정을 기반으로 소녀들의 복잡한 심리를 풀어내고, 하나의 깨달음과 선택으로 이어지는 구조를 갖추고 있다. 이처럼 심리적인 고뇌들을 기반으로 마법소녀적 판타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역시 신보 아키유키 감독의 애니메이션 프로젝트 <마법소녀 마도카마기카>와 유사하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설정으로 만들어진 세계에서 활약하는 네 명의 주인공 아이, 네이루, 리카, 모모에는 저마다의 심리적인 고민을 안고 있는 아이들이다. 아이는 유일한 친구인 코이토의 의문스러운 죽음에 의해 히키코모리가 되었고, 네이루는 친구의 생명을 두고 고민하며, 편모가정에서 외로워하는 자신을 바라봐주던 팬을 잃은 리카는 자해를 하고, 모모에는 사람들의 시선에 의해 성적 정체성을 고민한다.
저마다의 고민에 불안해하던 아이들은, 서로를 만나며 조금씩 불안을 벗어던지고, 충동적으로 행동하기 시작한다. 미션에 관한 일로 심각해지면서도, 어느새 흥미로운 연애담 쪽으로 빠져버리기도 하고, 자신들을 고민에 빠뜨리는 어른들의 험담을 하기도 한다. 작품의 흑막이 되는 죽음의 충동과는 대비되는, 일명 유익한 충동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충동들은 사실 일상적인 장면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의외로 <원더 에그 프라이어리티>는 그러한 일상 장면에 있어서도 호평받을만하다. 야마다 나오코 감독의 영향을 받은 와카바야시 신 감독은, 호러틱한 분위기를 내뿜는 판타지 장면들과는 대비되는 일상적인 장면을 상당히 밀도 있게 연출한다. 와카바야시 신 감독은 여성이 아닌데도, 야마다 나오코 감독의 레퍼런스가 나타나는 일상의 행동들은 진짜 소녀들이 할 법한 행동처럼 연출되어 있다. 오히려, 일상 쪽에 있어서는 각본가 노지마 신지가 집필한 각본이 와카바야시 신 감독이 연출한 소녀들의 행동을 따라가지 못하는 편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서로를 의지하게 된 아이들은 힘을 내어 원더 킬러들에 맞서 싸운다. 그 과정에서 아이들은 각자의 트라우마를 조금씩 벗어나가기 시작한다. 아이는 끊임없이 자신을 괴롭히는, 자신의 눈에만 보이는 영혼들과, 괴로움의 호소를 믿어주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 자살한 소환자를 구해내는 과정에서, 자신의 처지를 대입한다. 그 끝에서, 아이는 아무리 방 안에서 홀로 앓는다고 해도 들어주는 사람은 없고, 해결되는 것 역시 없다는 것을 깨달으며, 학교로 돌아가 선생님을 향한 자신의 마음과 코이토의 죽음에 대한 비밀을 직접 파헤치기로 결심한다. 또한, 애정결핍에 시달리고 있던 리카는 마음속 아픔을 이용하는 원더 킬러에게 넘어갈 뻔하지만, 거북이 만넨을 키우면서 조금은 깨닫게 된 부모의 마음을 다시금 느끼고, 상처 입으며 나아가겠다는 선언과 함께 원더 킬러를 물리쳐 보인다. 그날 밤, 리카는 어머니에게 당신을 버릴 것이라고 말하지만, 동시에 만넨과 원더 킬러와의 전투로부터 얻은 깨달음을 반영하며, 그래도 지금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네이루는 감정적으로 변화한다. 본인의 감정을 그다지 드러내지 않았던 네이루는, 친구들을 만나 조금씩 감정적으로 변화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는 실험을 반복한 끝에 식물인간이 되어버린 친구 코토부키의 생사에 대한 고민을 더욱 가중시키게 된다. 그런 와중에 에그 세계에 코토부키가 소환되고, 네이루는 그녀와 해후하며 지금까지 앓고 있던 슬픔을 터뜨리며 육체를 초월한 코토부키의 선택을 존중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네이루가 코토부키의 생명 유지 장치를 정지시키는 순간, 그녀의 곁에 아이가 있었다는 사실은, 네이루가 조금씩 인간성을 찾아가고 있음을 암시한다. 모모에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정 짓는다. 몸은 여성이지만 자신을 남성으로 지칭하는 카오루가, 원더 킬러에게 붙잡혀버린 위험한 상황에서도 스스로 규정지은 남성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는 모습을 본 모모에는, 여성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정 짓게 된다. 이후 모든 싸움이 끝나고, 카오루는 남성으로서, 모모에는 여성으로서 키스를 나누는 장면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조금씩 성장해나가는 아이들의 앞에는 프릴이라는 흑막이 나타난다. 프릴에 의해 패닉과 만넨을 잃은 모모에와 리카는 각각 죽음에 대한 공포와, 막무가내의 증오를 얻으며 죽음의 유혹에 빠져버릴 수도 있는 불안한 상태로 리타이어 된다. 프릴은 14세의 사춘기 소녀로 설정된 AI 로봇이다. 따라서, 사춘기 특유의 불안정한 정신은 어른들에 의해 제어되고 바른 길로 이끌어져야 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프릴을 제어해야 할 어른들인 아카와 우라아카는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에게 게을러지고, 끝내 충동을 제어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그러한 프릴의 충동은 질투로 나타난다. 자신의 아름다움을 믿고 행동하던 프릴의 앞에 새로운 아름다움이 나타나 아카와 우라아카의 시선을 빼앗아버리고 말았으니, 이는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자기 자신만의 아름다움을 믿게 된 프릴은 자신과 같은 아름다움을 갖고 있는 아이들을 질투하며 타나토스로 유혹하기 시작한다. 마지막으로 남은 히어로 아이와 네이루는 에로스의 전사가 되어 그녀를 막아내야 한다.
아이는 에로스의 전사가 된다. 평행세계의 자신을 괴롭혔던 평행세계의 사와키 선생을 무찌르고, 어머니와 사와키 선생님에 대한 관계를 인정하며, 끝내 또 다른 자기 자신을 위로하는 것으로 자신의 트라우마를 스스로 치유하고, 끝내 자신을 믿어내는 데에 성공한다. 자신을 믿는 것이야말로 죽음의 유혹, 타나토스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일지도 모른다. 유혹이라는 것은 나 자신이 나를 믿지 못하는 순간 나타나 저편에서 손짓한다. 결국, 나 자신이 나를 믿지 못하게 되는 순간, 나는 유혹을 믿고 의지해버리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아이는 자기 자신을 믿어내는 데에 성공하였다. 평행세계의 아이 역시 죽음을 후회하고 새롭게 살아나갈 또 다른 자신을 위해 희생한다. 그리하여, 오오토 아이는 에로스의 전사로 거듭난다. 하지만, 네이루는 죽음의 유혹에 넘어가버리고 만다. 코토부키의 죽음 이후 외로워했던 네이루는 친구들을 만나며 행복해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네이루의 정체는 AI였다. 그러한 네이루의 본심은 인간이 되어 친구들과 함께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정체가 AI라는 사실은 모두에게 알리기에 너무나 큰 비밀이었다. 프릴은 그러한 네이루의 고민을 찌르며 들어온다. 프릴 역시 인간이 되고 싶어했기 때문에, 동질감을 이용하여 네이루를 끌어들이고자 한 것이다. 결국, 네이루는 프릴의 유혹에 넘어가게 되고, 아이는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지 않은 네이루에게 실망하여, 마지막으로 걸려온 그녀의 전화를 충동적으로 무시한다. 하지만, 두 사람은 친구다. 결국, 아이는 네이루의 전화를 무시했던 것을 후회하며 눈물 흘린다. 아이는 모두와 함께 했던 나날들을 되돌리고 싶다. 이 역시 충동이다. 충동은 유혹에 빠지기 쉽게 만든다. 네이루 역시 인간이 되고 싶다는 마음에 충동적으로 프릴의 유혹에 넘어갔다. 하지만, 자신을 강하게 믿고 있다면 어떤 충동적인 행동에도 불구하고 유혹에 빠져들지는 않을 것이다. 오오토 아이가 그러하다. 오오토 아이는 자신을 믿고 새롭게 나아가고 있는 중이기 때문에, 에로스의 전사가 되어 네이루를 구해내겠노라는 결심과 함께 용기를 낸다면, 어떤 유혹도 두렵지 않다.
자신을 믿고 용기있게 뛰어드는 것. 이것이 바로 TV 애니메이션 <원더 에그 프라이어리티>의 진정한 주제이다. Priority, 영어로 우선 사항이라는 뜻이다. <원더 에그 프라이어리티>는 이 영단어를 키워드로 하여 끊임없이 변화하는, 불안하고 충동적인 아이들의 우선 사항이 조금씩 확정되어 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작품이다. 어떻게 아이들은 자신을 믿어내고, 자신만의 우선 사항을 세워가게 되는가? 그 방법은 아이들마다 제각각 다를 것이다. 하지만, 자신을 믿고 용기를 내야 한다는 것만큼은, 제각각 다른 방법들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공통 기반이다. 오오토 아이는 그 사실을 일깨워주는 캐릭터이다. 시청자는 불안하고 충동적인 히키코모리 소녀 아이가 친구들을 만나고, 원더 킬러에 맞서 싸우며, 끝내 자신을 믿고 새롭게 나아가는 모습을 통해 주제를 깨닫게 된다. 와카바야시 신 감독은 그러한 주제를 야마다 나오코 감독의 영향을 받은 일상 연출과, 색채적이고 몽환적인 자신만의 판타지 연출을 합쳐내는 것으로, 기괴하고 따뜻하게 표현해 낸다.
간단한 비판
지금까지 나는 와카바야시 신 감독의 TV 애니메이션 <원더 에그 프라이어리티>를 호평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애니메이션이 완벽한 것은 아니다. 어째서 <원더 에그 프라이어리티>는 용두무미라는 비판을 듣게 되었을까? 그 이유는, 마지막화의 급전개에 있다. 일반적인 작품 같았으면 마지막화의 급전개는 감독의 책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원더 에그 프라이어리티>는 조금 다르다. 왜냐하면, 원안을 집필한 사람이 각본가 노지마 신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급전개에 대한 책임 역시 노지마 신지에게 있다. 노지마 신지는 이야기를 1쿨 안에 맞추기 위해서였는지는 몰라도, 프릴에 대한 설정을 기초적인 단계까지 설명한 뒤 나머지는 시청장의 상상에 맡기고, 네이루의 정체 역시 갑작스럽게 밝혀버리는 급전개를 선보였다. 이는 각본가로서의 직무유기이다. 어른의 사정이라고 말하기에는, 노지마 신지는 원안을 제공하는 위치에까지 있었던 사람이었다. 결국, 직무유기의 급전개는 시청자의 작품 이해를 방해해버렸고, 명작의 커다란 구멍이 되었다.
<원더 에그 프라이어리티>를 용두무미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용의 머리에, 이무기의 꼬리를 한 작품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