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의 괴물을 끄집어내는 근본적인 괴물의 존재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데뷔작 <환상의 빛>을 제외한 자신의 모든 영화의 각본을 스스로 집필한 감독이었다. 그런 만큼,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신작 영화 <괴물>은 흥미로움과 함께 불안함을 느끼게 만들었다. '도이 노부히로 감독의 영화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 같은 히트작의 각본을 집필한, 심지어 칸 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하기까지 한 사카모토 유지의 각본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스스로 각본을 집필하기에 자신의 색을 뚜렷하고 온전하게 드러낼 수 있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연출과 어우러질 수 있을까?' 하는 불안이었다. 이는 기우였다. 물론, 각본에 있어 아쉬운 점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조금은 인위적이고 딱딱한 각본이 탄생했다는 점은 분명 지울 수 없는 아쉬움이다. 하지만, 이를 감안하더라도 <괴물>은 훌륭한 영화였다. 나를 구성하는 영혼과, 그 영혼이 살아가고 있는 이 사회의 시스템에 대해 재고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고레에다 히로카즈와 사카모토 유지, 그리고 사카모토 류이치는 분명 주었다.
괴물은 누구인가
부산국제영화제의 티켓팅을 실패하고 만 탓에 군대에서 휴가를 기다리며 인터넷에 올라온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괴물>에 대한 다양한 반응들을 구경하는 동안, 나는 궁금해했다. '어째서 사람들은 괴물의 존재를 찾고 있는 것인가? <괴물>은 관객으로 하여금 수수께끼의 해결을 유도하며 막을 내리는 영화인 것인가?' 그러한 궁금증은 영화를 감상하며 완전히 해소되었다. <괴물>은 관객에게 해답을 맡긴 채 모호하게 막을 내리는 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괴물의 존재는 처음부터 끝까지, 영화 속에 명확하게 암시되어 있다. 혹자는 '괴물을 찾고 있는 내가 바로 괴물이었다' 같은 해답을 내리기도 했지만, 이는 오히려 내가 발견한 괴물의 하위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질질 끌지 않고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127분 동안 암시되는 괴물의 정체는, 서문의 감상에서 이야기했던 사회의 시스템이다. 그 괴물은 학교라는 이미지로 촬영되어, 일련의 사건에 휘말린 등장인물들과 영화를 관람하고 있는 관객의 내면에 존재하고 있는 괴물의 모습을 영사한다.
그렇다면, 사회를 근본적으로 작동시키는 시스템은 어째서 우리 인간의 내면을 괴물의 모습으로 타락시키는 근본적인 괴물로서 존재하게 되는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서, 우리는 또 다른 질문을 던져야만 한다. '인간은 무엇에 의해 인간으로 결정지어지는가?' 나는 먼저 이 질문에 '마음'이라고 답하겠다. 마음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 끝내 인간으로 결정짓는 존재이다. 이는 미나토의 어머니 사오리가 학교의 교직원들에게 날리는 일갈과도 연관되어 있다. 마치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고 마음대로 행동하여 끝내 상처를 입히고 마는 사람에게 '당신이 그러고도 인간인가?'라고 일갈하게 되는 것처럼. 시스템은 이처럼, 마음의 존재를 앗아가 인간의 존재에 상처를 입히고, 괴물의 존재를 끄집어낸다. 그리하여, 자신을 구성하는 시스템 속에서, 혹은 괴물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결국 상대의 마음을, 심지어 자신의 마음조차도 일정 부분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 그것은 곧 괴물로의 타락과도 같은 것이다.
각본가 사카모토 유지는 그 타락의 과정을 군상극이라는 장르를 빌려 묘사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연출에 따라 이동하는 카메라는 이에 맞추어 다양한 시점을 촬영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편모가정이라는 시스템 속에서 미나토에 대한 강박에 사로잡힌 사오리의 시점을, 시스템의 문제점에서 학생들을 위해 동분서주하지만 근본적으로는 해결하지 못한 채 끝내 자신만을 생각해 버리며 좌절의 위기에 처한 호리 선생의 시점을, 학급이라는 시스템 속에서 요리를 일정 부분 외면하고 마는 미나토의 시점을, 학교라는 시스템 속에서 시스템의 책임자로서 비극마저 이용하고 마는 교장의 시점을 목격하며 타락 역시 목격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타락이 있다면 구원도 있다. 있으리라고 믿어야 한다. 구원받기 위해서는 구원을 믿으며 진심을 다해 타락을 깨닫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 미나토는 그렇게 한다. 교장과의 대화에서 괴물로 타락해 가는 자신을 깨닫고 그 타락을 불어낸 뒤, 태풍이 마을을 덮친 그날 밤, 요리를 찾아가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며, 함께 구원을 받는다.
여기서 나는 '이해'를 거론했다. 이 영화에서 이해란 '오해'의 반대에 서 있는 개념이다. 시스템의 괴물은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도록, 즉 오해하도록 만든다. 이해는 그 오해를 바로잡아 타락으로부터 구원받도록 만든다. 그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미나토와 요리의 관계이다. 두 사람은 서로를 사랑한다. 미나토는 그 사랑의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학급 시스템이라는 괴물에 의해 오해해버리고 말았지만, 끝내 깨달아 이해한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도 분명 그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화를 관람하는 관객의 입장에서 그것은 바람이다. 미나토와 요리, 두 사람의 작문 메시지를 발견한 호리 선생과 사오리가, 휘몰아치는 태풍 속에서 허망해진 요리의 아버지가, 그들보다 조금 뒤에 서서 손녀의 죽음과 학교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을 은근히 겹쳐보는 교장이 소년들의 마음을 이해해 주기를 관객은 바라고 마는 것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매정하게도 사카모토 유지의 각본을 생사불명의 엔딩으로 연출하여 그 바람을 더욱 간절한 것으로 만든다.
처음으로 되돌아가보자.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괴물>은 시스템이라는 괴물 속에서 사라져 가는 마음의 존재를 미나토와 요리라는 두 소년들의 존재로 끄집어내는 것으로, 인간의 존재를 되돌아보는 작품이다. 그 과정에서 시스템의 존재가 필연적으로 비판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괴물>은 어느 정도 사회비판적인 요소를 띠게 된다. 하지만, 그보다도 중요한 것이 있다고 영화는 말하는 듯하다. 비판을 통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것보다도 중요한 것은, 우리 인간 스스로가 스스로의 마음을 아름답게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 간직이 선행되었을 때, 우리가 바라는 아름다운 세상 역시 만들어져, 미나토와 요리의 운명은 희망으로 장식될 수 있을 것이다. 이쯤에서 '괴물을 찾고 있는 내가 괴물이었다'라는 혹자의 해답에 본인 나름대로의 주석을 달아보고자 한다. 조금은 모호한 이 해답은, '어쩌면 괴물일지도 모르는 시스템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마음을 잃어버리며 괴물이 되어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
인간의 마음이라는 게 있는가?
인간은 결국 자신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그렇기에 상대마저도 이해하지 못하는 괴물의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강하게 믿는다. 인간의 마음은 분명히 존재한다고.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살아있을 수 없다고. 그렇다면, 인간이 인간임을 결정짓는 그 마음의 존재를 앗아가고 만 것은 무엇인가. 앗아간 마음을 깊숙한 곳에 가두어 이해를 방해하는 오해의 정체는 무엇인가. 우리는 그것의 정체를 시스템이라고 쓰고, 괴물이라고 읽는다. 괴물 속에 살며 마음을 오해하고 있는 우리는, 오해를 딛고 이해하기 위해 파헤치고 달려 나가기 전까지 따뜻한 햇살을 볼 수 없으리라. 각본가 사카모토 유지는 그 사실을 조금은 딱딱할 정도로 인위적이지만 분명 임팩트 있는 군상극으로 써 내려가고,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스산하고도 따뜻한 생사불명의 엔딩으로 그 과정을 화면 속에서 증폭시키며, 음악가 故 사카모토 류이치의 선율은 오해와 이해 사이에 선 두 소년들을 살며시 감싸 안는다. 그리하여, <괴물>은 영화라는 종합예술의 이름으로서 훌륭해진다.
위대한 사카모토 류이치를 추모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