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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가레보시 Apr 23. 2024

타코피의 원죄

앎, 대화, 공감, 이해, 그리고…


만화 <타코피의 원죄>를 읽는 동안 ‘원죄’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고민해 보았다. ‘타코피의 원죄’란 무엇일까? 이해의 부재? 독선적인 행동? 그렇게 죄의 근원을 향하여 거슬러 올라간 끝에, 나는 타코피의 원죄를 깨달을 수 있었다. 원죄,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태생적으로, 혹은 불가항력적으로 저지르고 마는 죄, 그것은 바로 ‘무지’이다. 무지는 비극의 시작이다. 인간은 무지하기에 지금까지 수많은 죄를 파생적으로 저질러왔다. 무지는 이해의 부재를 낳았고, 이는 작게는 일대일의 싸움에서 크게는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치는 전쟁 등의 비극을 낳았다. 그 근원에 존재하는 죄, 원죄가 바로 ‘무지’인 것이다. 주인공 타코피는 이처럼 인간의 본능이라고도 할 수 있는 무지를 캐릭터화 한 결과물이다.


타코피는 무지하다. 그것은 존재의 한계이다. 외계인 타코피가 태양계 제3행성 지구의 지적 생명체 ‘인간’에 대하여 알고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기에 타코피는 자신의 눈 앞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상황들을 자신의 기준대로 받아들이고 만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이해하고자 하지 않는다. ‘대화가 행복을 낳는다피.’ 하고 이야기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상황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채 대화 없이 멋대로 행동한다. 그저 곁에 있어줄 누군가가 필요했던 2022년의, 2016년의 마리나는 그렇게 아무도 공감해주지 않은 채,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한 채 쓸쓸히 떠나가고, 비극은 깊어만 간다. 우리 인간이 ‘관계’를 이어갈 수 있는 이유는, 서로가 서로에게 공감한 끝에 이해하기 때문이다. 무지한 타코피는 그럴 수 없는 생물이기에, 결국 비극을 낳는 원죄를 짓게 된 것이다.


하지만, 사실 생각해보면, 그리고 앞에서도 이야기했던 것처럼, ’무지‘는 비단 타코피만의 특성이 아니다. 사실 인간도 본능적으로 무지한 끝에 비극을 초래하고 마는 생물이니까. 단지, 타코피가 모든 비극의 시발점이었기 때문에 그 원죄를 대표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이 만화의 모든 등장인물들 역시 죄를 저질렀거나, 저지르고 있다. 시즈카도, 마리나도, 나오키도, 그들의 부모도, 전부 ‘무지’의 원죄를 저질렀다. 부모들은 아이의 아픔과 슬픔을 알아주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게 방치된 아이들도 서로를 알아보려하지 않는다. 결국 공감과 이해는 이루어지지 않게 되고, 비극은 시작되고 만다.


조금 더 미시적으로 들여다보도록 하자. 시즈카는 타코피에게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며 소리친다. 아무도 시즈카의 상황을, 마음을 알아주지 않았다. 그녀의 부모는 시즈카를 외면할 뿐이었다. 마리나에게는 곁에 있어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하지만, 아빠는 술집 여자에게 빠져버렸고(그 여자가 시즈카의 엄마라는 것이 슬프다), 엄마는 그런 아빠의 모습에 마리나만은 변하지 말아달라며 애원하고 집착할 뿐이며, 유일하게 자신을 사랑해주는 줄 알았던 나오키마저 아빠를 빼앗은 여자의 딸에게로 떠나가버렸다. 나오키에게는 자신의 속마음을 들어주고 할 수 있다며 이야기해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러한 갈구는 아들에게 완벽만을 강요하며 정작 아들을 알고자 하지는 않았던 엄마에게서는 받을 수 없었던 사랑과, 이에 반해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해내는 형의 존재에 느낀 열등감으로부터 기인된다. 이처럼, 세 주인공들의 내면에 존재하는 어둠은 무지로부터 비롯된다.


이는 애석하게도 대물림된다. 무지라는 부모의 원죄는 아이에게로 유전된다. 마리나는 시즈카를 알고자 하지 않는다. 부모의 무지로부터 비롯된 비극에 사로잡혀, 시즈카의 처지를 알고자 하지 않는다. 시즈카 역시 무지하게 된다. 부모의 무지와 외면이라는 1차적 비극과 마리나의 무지라는 트리거는 새로운 비극의 기폭제로 작용한다. 결국 시즈카는 상대의 마음을 알고자 하는 생각을 접은 채 자신의 목표를 향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된다. 나오키는 여기서 조금 떨어져 있다. 그의 위치는 시즈카와 마리나보다는 타코피, 즉 조력자에 더 가깝다. 이를 인지하고 나오키의 무지에 대하여 이야기해보도록 하자. 사실 나오키는 무지한 인물이 아니다. 인간으로서 저질러서는 안 될 행위의 존재에 대하여, 그는 ‘알고 있다’. 하지만, 무지의 대물림을 나오키는 피해갈 수 없다. 엄마의 무지로 인하여 갈구하게 된 애정은, 결국 나오키의 눈을 가려버리고 만다.


자신을 돌아봐주지 않는 엄마와 어딘가 닮은 구석이 있는 소녀, 시즈카는 엄마와 달리 자신을 필요로 해준다. 나오키는 이에 기꺼이 자신의 마음을 내던지고, 무지해진다. 저질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저질러버리는 나오키의 모습은, 어쩐지 타코피와 닮았다. 타코피는 다른 별 사람에게 도구를 맡겨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시즈카의 부탁에 그 원칙을 무시하고 만다. 그렇다면, 이렇게도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만약 누군가의 존재로 ‘무지’의 죄의식을 깨달을 수 있다면, 비극은 끝을 맺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오키에게는 형 준야가, 타코피에게는 나오키가 바로 그 존재가 되어준다. 극심한 애정결핍에 시달리는 나오키는 자신을 필요로 해주는 유일한 인물인 시즈카의 부탁으로 자수를 결심하여, 모두가 자신을 원망하리라고 망상한다. 하지만, 준야는 그런 동생의 마음마저 ‘알아주며’ 자신을 의지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리하여 나오키는 무지의 원죄를 극복하게 되고, 어디에도 속박되지 않은 자신으로서 의지의 의미를 깨달아 살아가고자 한다.


그러한 ‘조력자’ 나오키의 성장은 또다른 ‘조력자’인 타코피가 자신의 원죄를 극복할 수 있는 실마리를 던져준다. 과거의 기억을 되찾은 타코피는 선과 악이 교차하는 시즈카의 존재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갈팡질팡한다. 이에 나오키는 결론을 내려준다. 모두에게는 좋은 점과 나쁜 점이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함께였고, 즐거웠다. 친구였으니까. 친구, 서로의 곁에서 서로를 알고 공감하여 끝내 이해하게 되는 존재. 그렇기에 곁에서 ‘도와주기만’ 하는 것은 애초에 잘못된 접근이었다. 진정으로 시즈카가, 마리나가 웃어주기를 바랐다면, 도움의 이름으로 그들의 곁을 떠나가는 것이 아닌, 곁에 있어주며 그들의 진심을 들어주어야만 했다. 그렇게 타코피는 깨닫는다. 알게 된다. 그렇다면, 이제 타코피에게 남은 것은 자신의 원죄를 뉘우치고, 씻어내는 일 뿐이다.


타코피는 시즈카의 앞을 막아선다. 시즈카는 절규한다. 아무도 그녀의 곁에 있어주지 않았다. 아무도 그녀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그렇게 시즈카는 무지하게 되었고, 비극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이에 타코피는 사과하고, 알아준다. 도와주기만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는 착각으로 곁에 있어줄 누군가를 원했던 시즈카의 진심에 무지했던 자신의 원죄를 사과하고, 시즈카의 외침을 받아준다. ‘아무것도 이해하려 하지 않아 미안하다피. 시즈카, 혼자 둬서 미안하다피.’ 끝내 알게 된 진심, 끝내 이해받은 진심. 이제 타코피에게는 마지막 선택만이 남는다. 타코피는 원죄에 대한 마지막 극복으로서 자신의 해피력을 쏟아부어 해피 카메라를 고쳐내고, 지금까지 함께했던 모든 시간들과 함께 시즈카를 과거로 되돌려보낸다. 이제 타코피의 존재는 아무도 기억할 수 없다. 하지만, 함께하며 쌓인 수많은 추억만큼은 무의식 속에, 마음 속에 남는다. 마치 사진 같다. 지나간 시절임에도 그 순간은 분명 담겨있다. 그리하여, 마지막 공감과 이해가 남는다.


과거로 되돌아가도 같은 나날은 반복된다. 의지할 사람 하나 없는 시즈카와 마리나의 관계는 늘 최악을 달리고 있다. 하지만, 분명 추억의 존재는 남아있다. 무의식적으로 마음 속에 남은 타코피의 존재, 그 존재로 인하여 나오키는 만년 조력자의 위치에서 벗어나 주체를 되찾고, 시즈카와 마리나 두 사람에게는 우정이 싹트기 시작한다. 서로에게 존재하는 공통된 추억과 감정이 하나로 합쳐지는 순간을 우리는 공감이라고 부른다. 타코피의 존재는 공감이다. 어느 날과 다름 없이 시즈카와 마리나는 대면한다. 하지만, 공감의 존재는 끝내 비극의 탄생을 막아낸다. 공책에 그려진 개쓰레기, 바보. 그러나 언제나 버티며 다가오는 말, ’대화가 행복을 낳는다피.‘ 그렇게 두 사람은 무의식 속에 남은 존재에 대한, 시시껄렁하지만 분명 마음 깊이 울리는 대화로 끝내 서로를 공감하고, 이해하며, 친구가 된다.


인간은 언제나 죄를 저저른다. 그러한 죄의 근원, 원죄란 바로 ‘무지’이다. 무엇에 대해서든 ‘알지 못했을 때’, 인간은 배척하고 고립되어 비극을 맞는다. 하지만, 모든 인간이 비극적인 결말을 맞게 되는 것은 아니리라고 나는 믿는다. 흔히들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라고 한다. 인간은 무지하여 타의 무언가를 그렇게나 배척하지만, 그만큼 타와의 관계가 존재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만화 <타코피의 원죄>는 바로 그 사실을 조명한다. 무지로부터 비롯된 공감과 이해의 부재는 겹치고 겹친 끝에 필연적인 비극을 낳는다. 하지만, 끝내 알고 공감하여 이해했을 때, 비로소 앞으로의 삶과 미래는 드러나게 된다. 그제서야 인간은 추억한다. 조금씩 알아가며 축적했던, 태생적이고 불가항력적인 인간으로서의 원죄를 극복하고자 했던 삶을, 그 안의 수많은 마음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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