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유람기 2019 (5) : [1일차-4]
시먼딩西門町으로 나왔다. 파란색 반난선板南線을 타고 타이베이 기차역에서 한 정거장이다.
시먼딩은 타이베이 최대의 번화가로, 밤 늦게까지 사람들이 버글버글하다. 시먼역 출구로 나오면 무슨 명동 롯데백화점 사거리 내지는 시부야 스크램블을 방불케 하는 불야성이 펼쳐진다. 철도패스 수속을 마치자마자 이쪽으로 나온 것은 여기에 맛있는 길거리 음식이 가득하다는 것을 사전에 찾아 두었기 때문이다. 금강산도 식후경, 타이베이도 어쨌든 식후경 아니겠는가.
제일 먼저 간 곳은 '아종면선阿宗麵線'이라는 곱창국수 전문점이었다. 곱창이 들어간 국수라면 작년 6월에 오사카 도톤보리에서 먹었던 카스우동 이래로 처음이다. 곱창의 기름진 맛을 퍽 좋아하기 때문에, 저으기 설레었다.
가게 앞은 제 차례를 기다리며 줄을 선 사람들과 삼삼오오 모여서 국수를 먹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대만 특유의 향신료 냄새가 바람을 타고 코끝을 간질였다. 여행할 때마다 '아, 내가 외국에 왔구나'라는 사실을 느낄 때는 역시 그 나라만의 음식 냄새가 콧속을 파고들 때가 아니겠는가. 아, 배고프다.
가격판을 보라. 정말 정신나간 가격이 아닌가? 물론 그렇게 많은 양은 아니지만, 심지어 떡볶이 1인분마저 4000원에 육박하는 한국의 맛간 물가에 익숙해 있다가 이런 가격을 보면 누구라도 눈이 뒤집힐 수밖에 없을 것이다.
둘이서 먹을 거라는 생각에 큰 그릇 하나를 시킬까 했다가, 시먼딩의 길거리 음식을 조금씩 다양하게 먹어 보고 싶다는 아내의 지당하기 짝이 없는 의견에 따라 작은 그릇 하나를 시켰다. 아내가 고수를 잘 못 먹어서 "부야오샹차이不要香菜(고수 빼 주세요)"를 엄청 연습해 갔지만, 워낙에 음식이 빨리 나오다 보니 '부야오샹차이'의 '부'자를 꺼내기도 전에 이미 고수를 얹은 국수가 내 손에 들리고 말았다. 사실 괜찮다. 난 고수에 환장하는 인종이니까!
기본적으로 진한 가쓰오부시 국물에 중국식의 가느다란 쌀국수, 그리고 쫄깃쫄깃한 곱창살이 들어간 국수였다. 고수와 함께 먹으니 특유의 향 덕분에 곱창의 기름진 맛이 부담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 한 반절쯤 먹고 아내에게 그릇을 건네 준 뒤, 주위를 둘러보다가 흥미로운 것을 하나 발견했다. 가게 한켠에 소스 선반이 있고, 사람들이 거기서 다진 마늘이라든지 고추기름 소스 같은 것을 국수에 얹어 먹고 있었다. 약간 느끼한 감이 없잖아 있었던 참에, 고추기름 소스를 좀 얹어서 먹어보기로 했다.
결과는? 훌륭했다. 고추기름 베이스에 간장을 살짝 섞은 소스였는지, 마치 매콤한 양념간장을 넣고 섞은 듯한 맛이 났다. 매우 진한 잔치국수를 먹는 듯한 느낌마저 나면서도, 곱창 특유의 구수한 맛과 녹말을 넣었는지 걸쭉한 국물이 또 다른 풍미를 주었다. 하 적다 보니 또 배고프네, 지금 한밤중인데.
뜨끈한 국물로 입맛을 돋군 뒤 다음으로 찾은 곳은 천천리天天利였다. 이곳은 굴 오믈렛으로 유명한 가게이다. 주위에 취두부 가게가 많은 탓에, 취두부에 익숙하지 않은 한국 촌것들 입장에서는 가게 앞에 줄 서 있는 시간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다(전국의 취두부 매니아 여러분께 심심한 유감을 표합니다. 그치만 냄새가 너무 심했어요). 가게 안에 사람이 너무 많았고, 우리가 이 가게에 온 목표는 오로지 굴 오믈렛이었기 때문에 굳이 안에까지 들어가지는 말고 포장해서 길거리에서 먹기로 했다.
굴을 익혀 먹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음에도, 그리고 길거리 음식 특성상 위생이 영 좋아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음식의 상태는 제법 괜찮았다. 일단 전혀 비리지 않아서 깜짝 놀랐다. 굴 향을 좋아하지 않는 아내도 전혀 거리낌없이 잘만 먹었다. 중간중간에 야채가 들어 있어서 씹는 맛도 제법 있었는데, 재미있는 것은 젓가락으로 뒤적거리다 보면 마치 지가 굴인 양 덩어리져 있는 녹말 뭉치 친구들이 젓가락에 걸려 올라오기도 한다는 것이다. 녹말 특유의 흐릿한 젖빛을 띠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굴로 착각하기 쉽지만, 어쨌든 맛은 녹말 덩어리 맛이다. 중화권이 녹말을 좋아하는 줄은 알았지만 설마 이렇게 녹말떡을 통째로 음식에 넣어 먹는 걸 좋아할 줄은 몰랐지. 뭐 어떤가. 맛있으면 그만 아닌가? 다만 길거리에 서서 먹는 내내 옆에서 한국인 남자 셋이 쭈루룩 앉아서 담배를 태우는 바람에 살짝 기분이 상했지만, 굴 오믈렛이 너무 맛있었기 때문에 그냥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천천리 바로 옆에는 삼형제 빙수三兄妹雪花冰 시먼점이 있다. 사실 한자를 뜯어보면 '삼형제'가 아니고 '삼형매三兄妹'인데, 왜 다들 '삼형제'라고 부르는지는 미지수이다. 일본어로야 '형제'건 '형매'건 전부 '쿄ㅡ다이'라고 읽는다지만, 왜 가게 이름의 가족 구성을 굳이 바꿔 가면서까지 '삼형제'라고 읽는단 말인가!
아무튼 제법 유명한 가게이고, 대만에 왔으면 망고빙수를 한 번 먹어 봐야 한다는 생각에 들어가서 망고빙수 한 사발을 시켰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좀 실망했다. 이 정도 퀄리티의 빙수는 말여... 한국에서도 먹을 수 있어...
물론 객관적으로 봤을 때는 제법 가성비도 높고 맛있는 축의 빙수였다. 그러나 대만까지 왔는데 고작 냉동 망고 얹은 빙수를 돈 내고 사 먹기는 좀 애매하다. 작년 5월에 방콕에 갔을 때도, 10월에 자카르타에 갔을 때에도 냉동실 근처에도 안 간 제철 망고를 원없이 사먹을 수 있었던 기억이 도리어 발목을 잡은 꼴이 되었다. 조금 북쪽에 있는 탓인지, 아무래도 대만에는 망고에도 철이 있는 모양이었다. 8월에 대만을 찾았던 학생 시절의 아내는 어딜 가든 생망고를 먹을 수 있었다고 했는데, 그 때의 기억 때문인지 아내가 나보다 더 실망하는 눈치였다. 요약하자면, 10월 대만에 맛있는 제철 망고를 먹으러 오는 사람은 서울대입구역에서 서울대 정문까지 걸어가는 정도의 바보인 것으로 치자.
어느 정도 배가 찬 상태에서 시계를 보니, 저녁 일곱 시를 조금 넘긴 시간이었다. 복잡한 시먼딩에서 빠져나온 우리는 다음 행선지로 가기 위해 첩운역으로 향했다.
본래 우리 부부는 둘 다 밤하늘 바라보는 것을 좋아하는데, 그 덕분인지 최근 생긴 여행 습관 중 하나는 동네 천문대에 한밤중에 찾아가서 망원경을 들여다볼 기회를 찾는 것이다. 신혼여행 때 시드니에 갔을 때에도 시드니 시립 천문대에 방문했었지만 재수없게도 그 때만 하늘이 흐려지는 바람에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아쉽게 발걸음을 돌린 바 있었다. 그 때문인지, 이번에는 둘 다 잔뜩 벼르고서 타이베이 시립 천문과학관의 달 관찰 야간개장에 참여하기로 했다.
단수이신이선淡水信義線, Tamsui-xinyi Line 스린역士林站, Shilin Stn에서 내려서 어두컴컴한 길을 한 15분 정도 걸은 끝에 천문과학교육관에 도착했다. 로비에 불이 켜져 있고, 마침 로비 앞에 단체 관람이라도 온 듯한 어린 학생들 한 무리가 모여서 떠들고 있는 것을 보고 제대로 찾아왔단 확신이 들었다.
천문대로 올라가는 길을 가르쳐 달라고 하려고 직원에게 다가가서 영어로 말을 걸었더니 친절하게 알려 주기는 했는데, 말미에 "일본인이세요?"라고 일본어로 묻기에 "아뇨, 한국인입니다."라고 일본어로 대답해 줬다. 생각지 못했던 대답이었는지 흠칫하는 직원의 모습을 보면서 어쩐지 고소해지는 작은 마음.
천문대에 올라가는 길에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는데, 꼭대기에 올라가니 제법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제 차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도 줄을 서서 조금 기다린 끝에 망원경을 들여다볼 기회를 얻었다.
마침내 망원경 너머로 본 달의 모습은 놀랍도록 선명했다. 운이 좋게도 딱 반달이 뜨는 날이었기 때문에, 큐레이터가 망원경 렌즈를 음영의 경계에 정확히 걸치도록 조정해 놓았던 것이 신의 한 수였다.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의 경계가 마치 눈앞에 있는 것처럼 깔끔하게 보였고, 크레이터 하나하나의 모양을 세세히 관찰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뒤에 기다리는 사람이 많아서 오랫동안 보지는 못했지만, 무척 인상깊은 경험이었다.
흥분된 어조로 즐겁게 조잘대며 우리 부부는 어두운 골목길을 다시 지나 스린 야시장으로 나왔다. 타이베이에서 가장 크고 가장 유명한 야시장들 중 하나로, 이름은 '스린' 야시장이지만 스린역 근처가 아닌 졘탄劍潭, Jiantan역 근처에 있다. 어쨌든 스린 구에 있어서 스린 야시장인 모양이다.
시먼딩보다 더욱 좁은 골목길에 더 많은 사람들이 잔뜩 몰려, 스린 야시장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진정한 의미의 '야시장'은 이런 곳이리라. 이리저리 구경하며 돌아다니다가, 졘탄역 근처에 이르러 유독 사람이 많이 몰린 가게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바로 대만 특유의 닭고기 튀김인 지파이雞排를 파는 가게였다.
알고 보니 이 가게는 제법 유명해서, 각종 중화권 국가들은 물론 한국과 일본, 호주와 캐나다에도 지점이 있다고 한다. 줄을 서서 제일 작은 것을 구매했는데 웬걸, 제일 작다는 것이 아내의 얼굴보다 더 컸다! 심지어 한 조각만 달라고 했는데, 점원이 덤을 하나 더 줘서 결론적으로는 큼지막한 지파이를 두 조각이나 받아온 모양새가 되었다. 약간 배부른 상태였기 때문에 이 두 개를 그 자리에서 다 먹기에는 애매하고, 그렇다고 이걸 첩운에 들고 탔다가 잘못했다간 거액의 벌금을 내야 할지도 모르겠고... 점원분의 친절에는 감사하지만 의도치 않은 진퇴양난에 빠지고 말았다.
이번에도 고심 끝에 지파이를 해체... 하지는 않고, 일단 먹을 수 있을 만큼까지는 먹어 보기로 했다.
한 입 베어문 순간,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향긋한 대만식 향신료 향기가 코를 스쳤다. 녹말이 많이 섞여 파사삭하고 경쾌한 소리를 내는 튀김옷을 지나 부드러운 닭고기에 이가 꽂힘과 동시에, 입천장이 엄청난 기세로 경고 신호를 보냈다. 야 이놈아, 나 타 죽게 생겼다! 하지만 이미 나는 그런 걸 생각할 처지가 아니었고, 첫 입을 씹어 삼키는 둥 마는 둥 하고 다시 또 한 입을 베어물었다. 아, 이건 정말 맛있다! 그리고 입천장이 다 까지고 있는데 알 바냐! 사실 좀 짰다
닭고기에 무슨 짓을 했는지 정말 큼지막하고 납작하게 튀긴 요리임에도 육질이 생각보다 부드럽고 결대로 잘 찢어졌다. 향신료야 말할 것도 없었고, 튀김옷의 상태도 훌륭했다. 아내도 배만 부르지 않았다면 한 조각을 다 해치웠을 거라며 못내 아쉬워했지만, 이걸 차에 가지고 타기에도 좀 곤란했기 때문에 결국 채 다 먹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아, 아쉬워라.
숙소에 들어왔을 때는 이미 밤 열 시에 가까운 시각이었다. 첫날부터 제법 열심히 돌아다녔고, 다음 날에는 기차여행이 예정되어 있었으므로, 오늘은 일찍 씻고 얼른 자기로 한다.
PS. 신발에 붙은 지파이 조각은 아무리 제가 궁하더라도 먹지는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