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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선미 Dec 31. 2020

마니또를 하는 시간

 카페나 식당, 술집이 이른 시간에 영업을 끝내야 하는 코로나 19 방역상황이다. 연말이라는 구실로 이런저런 모임이나 만남을 기다려 왔던 이들에겐 여간 아쉽지 않을 거라 짐작한다. 나는, (영업을 못하는 업주들에겐 죄송하지만) 감사 베리 땡큐다! 덕분에 크리스마스를 덤덤한 남편 얼굴과 TV 화면만 번갈아 보며 지내지 않을 수 있게 됐다. 


 아이들과 둘러앉아 샤부샤부를 해 먹었다. 지난해에 이어 ‘마니또’도 했다. 깜짝 선물 시간이다. 연말이고 하니 가족끼리 서로 작은 선물이라도 주고받자는 큰 아이의 제안으로 시작했다. 선물 가격대를 정해 준비한 뒤 ‘사다리 타기’를 해서 무작위로 받는, 스릴도 살짝 있는 즐거운 시간이다. 올해 달라진 것이 있다면 휴대폰 앱을 이용한 ‘전자’ 뽑기였다는 것. 간편하긴 했으나 첨단 기술의 세계는 종이와 연필이 주는 낭만을 뺏어간다는 측면이 분명히 있다. 


 작년에 내가 뽑은 선물은 남편이 준비한 거였다. 세상에나, 현금이었다. 맘대로 실체를 바꿀 수 있다는 점에선 좋았지만 가족을 생각하며 노심초사한 노력이 보이지 않아 조금 실망스러웠다. 올해 받은 선물은 큰아이가 준비한 치아세정기다. 고압의 가는 물줄기로 이사이에 낀 이물질을 제거해 주는 거라고 한다. 이가 좋은 편이었는데 점점 약해지는 게 느껴지던 참이었다. 치실보다 효과가 좋다고 하니 기대가 된다. 내가 준비한 선물은 종합비타민이다. 큰아이에게 갔다. 서로 주고받은 셈이다. 


 지난해 현금을 준비해서(A4 용지로 겹겹이 두른 바람에 투명 테이프가 덕지덕지 했다) 내게 눈총을 받았던 남편이 올해 준비한 건 SNS 선물 보관함에 들어 있었다. 무려 일곱 가지나 찜 해 두고 당첨자가 그중에서 고르는 방식이라나. 본인은 여러 가지를 고르느라 애먹었단다. 이번에도 현물은 아니다. 남편의 선물은 막내에게 갔다. 아이는 작은 가방을 골랐다. 사흘 후 택배박스에 담겨 도착했다.


 둘째는 빈손이었다. 모두의 지탄이 이어지자, “진짜 또 할 줄 몰랐지. 까먹었어.” 라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본인 선물이 당첨되는 가족에게 일주일 내로 선물을 주마는 약속과 함께. 하지만 공교롭게도 막내의 선물이 남편에게 당첨되면서 자연히 둘째는 제 걸 제게 주는 결과가 나왔다. 그렇게 되면 사다리 타기를 다시 해야 하는 거지만 그걸로 끝. 줄 선물 준비도 안 했으면서 받을 선물이 없다는 결과에 시무룩해하는 둘째에게 막내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 “누나 것도 있어!”


 막내는 선물을 준비하려고 강남에 있는 유명 편집 숍까지 다녀왔다고 했다. “처음엔 하나만 준비할 생각이었는데 둘러보다 보니 ‘이건 누나가 좋아할 거 같고, 저건 엄마한테 주면 어울릴 거 같고…’ 그러더라고. 그래서 그냥 다 골랐지, 뭐.” 한 명분의 비용으로 모두에게 줄 걸 고르다 보니 그야말로 소소한 것들이었다. 알바도 끊기고 부모에게 용돈을 받는 것도 아니라 종잇장보다 얇았을 지갑에서 버티고 버티던 진짜 비상금을 풀었을 게다.


 아이의 마음이 그대로 전해졌다. 코로나 때문에 가급적 외출을 삼가고는 있지만 스무 살 청춘이 집에만 있는 건 거의 초인적인 인내를 요구하는 고행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아이는 자기가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감염이라도 되면 식구들 모두 고생이라는 생각으로, 드라이브라도 가자는 친구의 꼬드김에 번번이 ‘나중에’라고 답장을 보내는 중이다. 막내뿐만 아니라, 식구 모두 날마다 정은경 질병관리청장이 하라는 대로 하고 있다. 우리는 말 잘 듣는 시민이다.


 검정색 머그컵과, 앵두가 그려진 유리잔, 곰돌이 푸우 퍼즐 상자, 그리고 작은 진주알이 달린 팔찌. 막내가 식구들 앞에 펼쳐 놓은 선물들이다. 머그컵은 커피를 좋아하는 둘째를 위한 거였다. 퍼즐 맞추기가 취미인 큰누나 앞엔 300조각짜리 곰돌이 푸우 퍼즐 상자를 내밀었다(큰아이는 수능이 끝난 뒤 가장 먼저 퍼즐 맞추기를 했을 정도로 좋아한다). 앵두 그림 유리잔은 내 차지였다(얼마 전 나의 ‘전용’ 맥주잔이 깨진 걸 기억하고 있었다니). 그리고 남편에겐, 팔찌가 건네 졌다. 가느다란 끈에 진짜 눈곱만 한 진주 장식이 붙어 있는 모양이었다. 

 

 식구들 모두 ‘벙 쪘다.’ “아니, 뭐야?”, “왜?”, “젠더리스야?”, “괜찮아, 걸어두고 보면 돼!” 나눔의 시간은 순식간에 성토장으로 변했다. 그러다 남편이 팔찌를 손목에 차고 흔들어 보이자 잠잠해졌다. 각자 다른 데를 바라봤다. 남편은 내 팔을 툭 치며 “어때, 어울려?”했고, 나는 “그런대로 봐 줄만 하네.”라고 대답했다. 우리는 모두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성인만으로 이루어진 가족이 한꺼번에 박장대소를 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런대로 봐줄 만 하기는 했다, 이미지 변신이라는 측면에서. 반전의 미학이란 말도 있지 않았던… 가. 




 어쨌든 우린 지난 열두 달 동안의 속상함과 아쉬움, 답답함, 억울함 따위를 털어버릴 수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한 동안 버틸 수 있을 것이다. 따뜻한 커피가 든 머그컵과 맥주 거품 넘치는 앵두 유리잔을 기울이면서, 옆구리에서 달랑거리는 미니 백을 만지작거리거나, 잠이 덜 깨 반쯤 감은 눈으로 양치할 때마다, 정수기 옆에 놓인 비타민 통을 열어 손가락으로 그날분의 한 알을 집어 올리면서, 그리고 차마 손목에 차진 못해 책상 위 스탠드에 걸어두곤 반짝이는 장식에 눈길을 보내며. 서로를 떠올리고 왠지 등이 따뜻해질 것이다. 


 가족의 무게가 버거워지면, ‘나는 어쩌자고 능력도 안 되면서 식구들은 이렇게 주렁주렁…’했었다. 이젠 안다. 그 ‘주렁주렁’이 실은 내 삶의 무게를 가볍게 띄워주고 있었음을. 때론 돌덩이처럼 무겁게 때론 풍선처럼 가뿐하게 다가오던 식구들은 내가 누리는 사랑의 모습이었다. 느끼지는 못하지만 땅에 발붙일 수 있게 해주는 중력의 힘이나 보이진 않지만 나를 에워싼 뒤 온몸을 돌고 나가는 산소처럼 말이다. 그나저나 내년엔 나도 막내처럼 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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