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우식(주인공 영재)이 주연을 맡은 영화 거인은 성당에서 후원을 받는 개인이 운영하는 시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영화에서는 이 시설이 법적 허가에 따른 공동생활가정인지, 아니면 개인이 종교기관의 후원을 통해 운영하는 개인운영시설인지 다소 모호한 부분이 있습니다. 영화 시작에서 모든 것은 허구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듯이 영재가 의지하는 곳은 허구의 공간으로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예전 고아원으로 말했던 시설은 00 소년의 집 등으로 불리며 지금도 도심 속에 여전히 유지되고 있습니다. 수천 명을 수용하던 시절도 있었으며 지금도 수백 명이 함께 생활하는 시설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인권을 이야기할 때 구조적인 개선 없이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선의에 기대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집단안에서는 기본적으로 애정과 관심이라는 원리가 작동하지 않고 감시와 통제라는 원리가 작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가정과 같은 소규모 형태로 운영해야 할 것입니다.
아동복지설 중 공동생활가정(그룹홈)은 보호대상 아동에게 가정과 같은 주거여건과 보호, 양육, 자립지원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시설입니다. 원칙적으로는 18세가 넘으면 아동보호시설을 떠나야 하나 학업 등의 연장사유가 있다면 일정기간 연장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최근 시설보호가 종료되는 시기의 꽃다운 많은 젊은이가 세상을 등지는 안타까운 사고로 인해 보호기간의 연장 등이 제도화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보호종료 예정 아동에게는 2023년 기준 1인당 1천만 원 이상의 정착지원금을 지급하도록 하고 있으나 그 돈으로 정착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액수입니다. 그룹홈의 경우 5~7인 보호를 원칙으로 하고 시설장과 보육사가 인원 비율에 따라 근무할 수 있습니다.
영화에서 ‘이삭의 집’ 원장 역할을 하는 부부는 누가 보아도 전문가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위탁가정의 원장 아버지는 아이들의 미래에는 관심이 없으며 절대적인 후원을 해주는 성당의 신부님이 와서 있을 때의 모습과 아침에 아이들의 식사를 준비하는 모습은 같은 사람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사회복지현장에서 일하는 종사자도 그러한 모습이 없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종사자가 잘 보여야 하는 법인 관계자, 관계공무원, 후원자, 자원봉사자 등에는 너무나 헌신적인고 성실한 모습을 보이고 그 시설의 존재 목적인 대상자에게는 너무나 차갑고 막대하는 모습은 없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대상이 되는 사람이 부당한 대우를 당하여도 누군가에게 하소연할 수 없는 장애인이나 영화에서처럼 도움을 줄 수 있는 제대로 된 가족이 없는 아이들일 경우에는 더욱 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인공 영재의 모습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첫 번째 모습은 환심을 사기 위해 애쓰는 모습입니다. 심방 나온 신부님에게 작은 선물과 카드를 전달하고 본인도 신부님이 되고 싶다고 말하는 등 잘 보이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모습은 차갑고 매몰찬 모습입니다. 이삭의 집에서 같이 지내는 동료와 동생들에게는 너무도 차갑게 대하는 모습을 보 수 있습니다. 세 번째 모습은 범죄를 저지르는 모습입니다. 성실하게 보이는 모습과 정반대로 이삭의 집 후원품을 빼돌려 학교에서 파는 범죄자의 모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해 함께 지낸 친구를 경찰에 신고하는 일도 비정한 행동도 서슴없이 합니다 네 번째 모습은 울분과 슬픔을 모두 보이는 가족을 대하는 모습니다. 진짜 가족인 아버지에게는 울분과 비난을 쏟아붓고 하나뿐이 동생에게는 애정을 보이나 동생이 이삭의 집으로 오고 싶어 하자 결사반대합니다. 이와 같이 영재의 삶은 수많은 모습으로 변신해야 살아갈 수 있는 삶이었습니다. 하루하루 삶은 정글에서 살아남기 위해 처절하게 애쓰는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친구를 경찰에 신고하는 영재
사회복지현장으로 적용할 때, 함께하는 이용자의 모습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성실하고 착한 이용자의 모습은 오로지 선생님과 사회복지사에게만 보이는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집에서 아니면 또래 집단에서의 행동은 완전히 다른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한 사람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상의 삶까지도 살펴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24시간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누구와 친밀하게 지내고 어떠한 행동을 하는지 살펴볼 수 있어야 합니다. 시설에서 보이는 모습이 다가 아니라는 사실을 늘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연기’, ‘가면’이라는 개념을 가져온다면 영재는 본인이 살아남기 위해 처절한 연기를 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성당의 신부님에게는 믿음이 좋은 장래에 신부가 되고 싶은 학생으로, 이삭의 집 원장부부에게는 말 잘 드는 착한 원생의 모습으로 역할연기를 합니다. 착한 아이 역할을 하기 위해 나름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나 연기의 무대가 되는 현실은 너무나 가혹하게 진행됩니다. 이삭의 집에서는 나가야 할 나이가 되어가고 공부도 잘 되지 않습니다. 결국 영화는 해피앤딩이 아닌 칼부림까지 보이는 파국으로 치닫게 됩니다.
누군가는 영재의 잘못을 이야기하고 싶어 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린 영재의 나이에 그렇게라도 해서 살아남으려 한 모습을 따라간다면 그 누가 영재를 비난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영재가 사는 게 숨이 차요라고 말하는 영화 포스터처럼 나락으로 떨어지는 모습은 참으로 슬프다는 마음 외는 달리 표현할 수 없습니다.
2023년 지금도 1만 명이 넘는 아동이 아동양육시설, 보호시설, 자립지원시설, 일시보호시설이라는 곳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아이들이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이러한 곳에서 어찌어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인이 된 이후에는 일정기간 유예기간을 충분히 주면 좋겠습니다. 나무도 옮겨 심으면 3년간 몸살을 앓는다고 하는데 하물며 사람인데 스스로 살아갈 수 있을 힘을 가지기 위해서는 충분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충분한 유예기간을 통하여 혼자서도 넉넉히 이겨낼 힘을 가질 수 있도록 하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그 지원의 끈을 스스로 놓을 수 있다고 생각할 때 마음편하게 그 끊은 놓을 수 있게 하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