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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가운 열정 Sep 23. 2022

탈출 01

첫 만남

첨벙, 기합과 함께 물보라를 튀기며 시원하게 입수하는 사람들.

야생인가? 눈살이 찌푸려졌다. 젊은 남자들이 주변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야말로 자기들만의 시공간에 와 있는 듯 신이 나있다. 어림잡아도 스무 명 가까이 된다. 산책로 옆에 자리 잡은 계곡, 계곡 앞에 솟아 딱 마침 다이빙을 위해 예비된 듯 평평하고 높다란 바위, 다음 선수가 그 위에 서서 타잔인지 늑대소년인지 모를 소리를 내며 양껏 박수를 유도하더니 무식할 정도로 물과 수평을 이루며 배치기 다이빙에 성공했다. 저렇게 떨어지면 내장 파열될 것 같은데, 오히려 사람들은 아주 잘했다며 환호했다. 심지어 목사님까지? 당신은 이미 수차례 짜릿하게 했다며 기꺼이 형제들에게 기회를 양보하고 계곡물에 들어가 입수하는 그들을 붙들어 일으키며 포옹해주는 모습. 정말 어린아이들같이 격의 없이 어우러져 노는 게 누가 목사이고 누가 성도인지, 아니 이게 과연 교회 수련회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인지. 이렇게 사람과 사람이 세상의 온갖 계급장 다 떼고 거의 벌거벗은 모습으로 마주 웃을 수 있다면 좀 야생이면 어떠랴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특히 천진난만한 목사님의 꾸밈없는 자연산 웃음, 그 함박웃음에 덩달아 입 근육이 꿈틀거렸던 것 같다. 계곡물이 참 맑다. 햇빛에 반짝이는 물방울도, 웃음소리도.


"언니도 한번 들어가 볼래?"

재희가 옆구리를 쿡 찔렀다. 내 눈에서 호기심을 읽었나 보다. 시원하긴 하겠다. 그렇다고 형제들이 드글거리는 계곡 가운데로 직진하기엔 좀 그렇지 않겠나, 아무리 유부녀라 해도 아직 아기도 없는 신혼 1년 차인데, 아직 아줌마 철판이 그 정도로 계발되진 않았단 말이다. 반바지에 하얀 셔츠 차림, 이대로 물에 빠지면 너무 민망할 텐데. 근데, 잠깐만, 내가 지금 저걸 왜 해? 나도 모르게 그 짧은 사이에 스쳐 지나가는 온갖 생각들에 스스로 화들짝 놀라 재희 팔짱을 끼며 시선을 거두고 산책길로 서둘러 발을 옮겼다. 

"너네 목사님, 진짜 순수하신가 봐. 천진난만."

"뭐, 맨날 저러고 노셔. 농구하고, 축구하고, 나이를 거꾸로 드셨나 봐."

"청년 사역 어쩌고 하시더니, 진짜 청년들 눈높이로 노시네."

"골프를 좋아하시면 청년이랑 못 어울리는 거지. 소박하셔."

"저게 저렇게 재미있을 일인가? 신나셨던데?"

"저것도 일부러 새로 온 사람들 놀자고 그러시는 거야. 자유를 느끼는 법부터 누려보라고. 눈치 보고 그러느라 자유를 못 누리잖아, 사람들이. 일종의 빗장 열기 프로그램? 그렇다고 강제는 아니고. 놀고 싶은 사람들은 해보는 거고. 그런 거지."


돌아오는 길에 보니 아직도 목사님은 그 자리 붙박이였다. 다른 사람들은 얼굴을 모르니 바뀐 건지 그대로인지는 잘 모르겠다. 다른 점은 이번엔 여자들이 많아졌다는 점이다. 물속에 이미 뛰어내린 여자들이 바위 위에 있는 사람들을 응원해주느라 시끌시끌하다. 바위에는 제법 많은 여자들이 아래를 내려다보며 서 있다. 나도 높이가 문득 궁금했다. 내려다보면 어떤 느낌일까? 슬쩍 가서 물을 내려다보는데 어느새 옆에 있던 사람들이 다 뛰어내렸다.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 모였다. 목사님과 눈이 마주쳤다. 이리로 내려오라고 머리를 까딱하며 손짓하신다. 스스럼없는 부르심. 어쩌면 신이 부르실 때에도 저렇게 해맑고 다정하시지 않을까? 문득 해야 할 이유보다 하지 않을 이유를 떠올려보고 있었다. 얇은 웃옷? 사람들의 시선? 처음 온 낯선 모임? 그 무엇도 나를 부르는 자유를 외면할 이유가 되지 못했다. 바위 끝에 서서 물을 바라보자 순간 무서웠다. 생각보다 깊지 않아서 몸이 부딪히면 어떡하지? 반대로 너무 깊어서 올라오기까지 숨이 모자라는 건 아니겠지? 물끄러미 물을 보다 다시 목사님을 보았다. 활짝 웃으며 다시 손짓하신다. 괜찮다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무모해 보이겠지만, 스타일도 구겨지고 볼품 없어지겠지만, 진정한 자유가 여기에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공중으로 몸을 날렸다. 자유낙하의 시간은 찰나, 떨림도 두려움도 짧은 순간에 지나가고 나는 그렇게 머리끝까지 물에 잠기었다가 죽다 살아난 듯 물 위로 솟아올랐다. 물이 섬찟할 정도로 차가웠으나 그만큼 정신이 번쩍 들며 새로 태어난 기분이 들었다. 해냈다는 기쁨이나 물에 빠지는 즐거움보다 이 계곡의 일원이 되었다는 일종의 유대감 같은 것, 개구쟁이들의 공범 의식 같은 것, 같이 소리 지르며 바위 위에서 구경하는 사람들에게 뛰어내려오라고 응원하고 싶은, 나도 망가졌으니 너도 망가지라고, 그 망가짐이 제법 짜릿하다고, 이걸 꼭 맛 보여주고 싶은, 그리고 이미 이 맛을 아는 사람들끼리 느끼는 유쾌한 우월감 같은 것, 그런 마음이 왜 갑자기 생기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도 힘껏 외쳤다. 뛰어내리라고. 우리를 내려다보며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들에게.


몸을 물에 담그고 있자니 점점 추워졌다. 나보다 먼저 물에 들어온 저 사람들은 괜찮을까? 주변을 살펴보았지만 신참들의 입수 응원에 에너지를 불태우느라 오히려 얼굴이 열에 들떴다. 안 추워지려면 목청을 돋우며 박수를 치는 수밖에 없었다. 그게 아니면 그냥 얼른 나가서 옷을 갈아입거나. 대체로 처음 온 사람들이 뛰어내리도록 권하는 편인 것 같았다. 재희는 나보다 한 텀 먼저 왔다. 그땐 겨울이어서 계곡 입수는 못 했단다. 겨울엔 눈썰매였다. 건물 뒤쪽 언덕배기를 직접 다듬어 포대자루를 타고 미끄러져 내려오는 건데 어마어마한 스릴에 반쯤 중독된 사람들도 있었다고. 그랬던 재희가 염치없게 신참들의 축제에 뛰어들리 만무하다. 눈치를 보다가 슬쩍 물밖로 기어 나왔다. 머리에서부터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입술이 오들오들 떨렸다. 셔츠가 젖어 몸에 달라붙었다. 역시 우려했던 현실은 뒤늦게 몰아닥친다. 창피하다.


어느덧 사람들은 처음의 몇 십배로 불어났고 그럴수록 추위를 잊은 물속의 사람들이 바위 위의 사람들을 기다리느라 더욱 열광했다. 속옷이 비칠 것 같아서 두 팔을 가슴 앞에 모으고 물 위를 빠져나오는 내 모습이 한심했다. 다행히 아무도 나를 쳐다보는 것 같지 않았다. 괜히 혼자 사람들을 의식했던 것 같다. 자유, 자유라고 했는데, 나도 모르게 또 자유롭지 못했다. 그래도 속옷은 속옷이지. 건물 쪽으로 쭈뼛거리며 걸어가는데 남편이 저쪽에서 나를 보며 빠르게 걸어왔다.

"이게 무슨? 왜 이래? 괜찮아?"

"아아, 다이빙했어?"

남편 친구 정민이가 선수치고 들어왔다. 재희의 남자 친구인 정민이가 재희를 먼저 데려왔다. 이후 재희가 우리 부부를,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를 데리고 왔다. 나는 혼자 오기 싫어서 남편을 끌고 왔다. 우리 넷은 서로 잘 알던 사이라 어떻게 엮여도 이상하지 않다. 남편과 내가 연애할 때부터 친구라며 소개해주고 오며 가며 만나 종종 술을 마시기도 했던 이가 정민이고, 그런 정민이 여자를 소개해달라고 해서 붙여준 사람이 재희였다. 우리 부부가 결혼하기 전부터 다 같이 여행도 다니고 밤이 깊도록 인생을 논했던 막역한 사람들이다. 

"엉겁결에 했는데, 상쾌하더라고. 근데 꼴이 좀 이렇게 됐다."

"당신 옷 갈아입고 와야겠다. 빨리 가. 속이 다 비치는데, 뭐 걸칠 거 없나?"

"없어. 나 숙소 갈게. 이따 봐."


또다시 부끄러움이 밀려들어 어쩔 줄을 모르겠던, 고개를 푹 숙이고 죄지은 사람처럼 종종걸음 치던 그때의 그 마음이 지금도 가끔 몸서리치게 기억이 난다. 자유보다 더 큰 수치감이. 그게 첫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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