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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가운 열정 Nov 15. 2022

탈출 07

신령한 젖

오티반이 끝나고 이제 목사님의 강의는 다음 텀 새로운 오티반에게로 넘어갔다.

그러면 오티반이 끝난 사람들은? 계속 배운다. 오티반까지만 하고 그만두는 사람들도 가끔 있지만, 대체로는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post OT, 오티 후 과정이라고 포닥(postdoc)처럼 post를 붙여 포티라고 불렀다. 포티는 목사님을 대신하여 리더가 가르친다. 반갑지 않다. 목사님이 아니라면 배우고 싶지도 않다. 그냥 관둘까 하는 생각도 안 해본 건 아니다. 하지만 마지막 시간에 목사님이 당부하신 게 있다. 

"여러분은 이제 막 태어났어요. 복음으로요. 태어난 아기가 혼자 삽니까? 못 삽니다. 엄마 젖을 먹어야죠. 말씀이 우리 영혼을 성장시키는 신령한 젖입니다. 다음 단계로 가셔서 말씀을 푹푹 받아먹고 쑥쑥 성장하시기 바랍니다. 탄생은 시작일 뿐입니다."


포티는 장소부터 낯설었다.

교회 건물과 같은 골목에 있던 작은 원룸. 어떤 오래된 멤버의 집이라고 했다. 대학가 하숙촌에 흔히 있을 법한 골목쟁이 다세대 주택들 사이에서 토요일 오후 5시만 넘으면 와르르 구멍 난 쌀가마니에서 쌀알이 쏟아지듯 사람들이 몰려나왔다. 그 골목 사이사이 건물들마다 작은 문들이 빼곡하고, 문들만큼이나 작은 방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으며, 작은 방들마다 열두 명 남짓한 사람들이 둥글게 모여 앉아 성경 공부를 했다. 


복음의 ABC를 배우는 건 지루했다.

매주 종이 한 장씩 나눠주며 미리 답을 찾아오도록 했는데 이미 재희가 수련회 전부터 찾아와 정성스럽게 가르쳐준 적이 있었다.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닌 데다가 내용이 간략해서 다 알고 있었다. 그런 걸 굳이 토요일마다 무려 다섯 시간이나 들여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서 또 배워야 한다는 사실에 종종 짜증이 나기도 했다. 하지만 몇 번 앉아있다 보니 나보다 어린 사람이 어떻게 진리에 관해 깊이 파고들고 신의 뜻에 침잠할 수 있었는지, 새삼 나보다 더 어른스럽게 느껴지고 때로는 존경스러울 때도 있었다. 특히 리더 자신의 묵상이나 경험을 나누어줄 때에는 구도자의 경건함을 뛰어넘어 속세를 떠난 사람만이 갖는 바람 냄새 같은 게 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냄새에 고독함이 배어 있지 않았다. 그건 참 독특한 점이다. 리더는 그걸 '함께함'이라고 표현했다. 면벽 수행처럼 홀로 신의 경지에 다가가는 구도의 길이 아니라 사람들과 두루 함께 나아가는 기쁨이 있다고. 그래서 외롭거나 힘들지 않다고. 마치 입시를 준비할 때 분명히 경쟁자임에도 불구하고 같이 앉아 공부하면 힘든 것도 모르고 무작정 그 시간을 건너올 수 있었던 것처럼, 그런 느낌인 걸까? 내 경험치 안에서 이해한다는 것이 온전한 것은 아니겠지만 성경 공부라는 게 대체로 그런 식의 이해를 요청했다. 


그건 내 경험치 안에서의 이해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때로는 다른 사람들의 경험도 끌어다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었다. 그 시간에 끌어올 수 있는 건 대부분 리더의 경험이었다. 처음 만난 사람들끼리 서로의 경험을 나눈다는 것이 조심스럽고 불편했기에 모임을 이끌고 내용을 이해시키려면 리더가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많이 나누어야 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리더가 모임에 오게 된 사연이었다. 


리더는 어려서 어머니를 잃었다. 

아버지는 딸을 섬세하게 사랑해줄 줄을 몰랐다. 자신도 삶의 방향을 몰랐다. 어린 딸을 돌보기보다는 오히려 돌봄을 받아야 할 처지였다. 알코올과 무기력에 절어 광패를 부리거나 드러누워있기 일쑤였다. 리더는 그런 집에서 벗어나고 싶어 대학을 포기하고 일찌감치 취업을 했다. 대졸과 고졸은 초봉부터 달랐지만 개의치 않았다. 몇 푼이라도 더 모아 빨리 결혼을 하고 자기만의 가정을 꾸리고 싶었다.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했다. 먹고 싶은 것, 입고 싶은 옷, 모든 걸 다 참고 돈을 모았다. 2년 만에 4천만 원을 모았다. 월급에서 교통비만 뺀 금액이었다. 조금만 더 모으면 결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럴듯한 남자를 먼저 만나야 했다. 남자들은 왜소한 고졸 은행원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래도 성실함이 다른 모든 조건을 다 이길 수 있다는 막연한 희망을 갖고 집을 떠날 날을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멋진 여자를 만났다. 멋진 남자는 아니어서 실망했지만, 적어도 말을 걸어온 여자가 멋지다는 사실은 마음에 들었다. 그 여자는 시궁창 같은 인생에 찾아온 빛에 대해 알려주었다. 길에서 순식간에 전도당한 리더는 의심을 품은 채 몇 번 더 여자를 만나며 성경공부를 하게 되었고, 결혼하지 않아도 집을 떠날 수 있게 되었다. 리더는 결혼을 꿈꾸며 모아 왔던 돈을 몽땅 교회에 헌금하고 교회 옆 작은 원룸에 사는 그 멋진 여자네 집에 옷가지들을 싸들고 들어왔다. 그곳에는 이미 서너 명이 비슷한 사연들과 옷가지들을 싸들고 들어와 함께 살고 있었다.


이렇게만 들어보면 말이 안 되는 멍청이들 같다.

하지만 그 스토리에 성경을 곁들이면 얘기가 달라진다. 마리아는 결혼 지참금으로 쓰려고 모아둔 거의 연봉에 가까울 정도로 비싼 향유 옥합을 깨뜨려 예수에게 붓고 최고의 사랑과 감사를 표현한다. 사람들은 수군댔지만 예수는 자신의 장례를 준비한 것이라고 다독이고,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마리아의 그 행동도 기념될 것이라며 칭찬한다. 신을 따르는 행동에는 모든 걸 쏟아붓는 열정과 결단력이 필요하다고. 이제 더 이상 결혼으로 위장된 가출에 연연하지 않고 처음 신을 만났던 감격을 잊지 않으며 열심히 배우고 익혀 언젠가는 선교하러 떠나겠다고 자신의 비전을 밝혔다. 사연도 비전도 모두 내게 성경을 이해하는 소중한 간증이 되었다. 특히 어디든 아무리 위험한 곳이라 해도 반드시 목숨을 걸고 '선교'하러 가겠다는 대목에서는 복음을 듣고 배운 사람의 끝이 어떤 방향이 되어야 하는지 보여주는 것 같았고, 젊은 여자가 꽃 같은 나이에 일신의 정욕을 내려놓고 영원의 전사로 살아가기를 결단하는 것에 큰 감동을 받아 눈물이 찔끔 났다.


나보다 좀 어리다고 살짝 우습게 여겼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 교회의 리더들이란 남녀를 불문하고 한창 데이트하러 다닐 나이에 주말마다 허물어져가는 건물 귀퉁이에서 몇 명씩 붙들고 종이 한 장으로 성경을 가르치는 안타까운 사람들이었다. 특히 우리 리더는 꾸민다고 꾸민 것 같지만 그다지 예쁘지도 않았고 가르친다고 가르치는 것 같지만 그다지 학식이 있는 편도 아닌 그저 그런 여자였다. 하지만 향유 옥합 이후 사람이 달라 보였다. 자존심이 상할 틈도 없이 존경심이 솟아나더니 배우러 다니길 참 잘했다는 자찬으로까지 이어졌다. 더 나아가 리더를 향한 존경심이 목사님을 향한 존경심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존경할 만한 리더들이 열 명이 있었다면 목사님은 열 명 분량으로 존경받아 마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얼마나 제대로 가르치셨으면 리더들이 그렇게 멋있을 수가 있는 건지. 


그런 목사님이 강의 때보다 조금 더 멀게 느껴졌다. 

리더 수준도 어마어마한데, 어떻게 목사님의 경지까지 생각할 수 있을까? 그나마 처음 믿음을 갖는 오티반에서 베풀어주신 지혜와 사랑이 새삼 소중했음을 깨달았다. 목사님에게서 배우고 싶으면 키멤버가 되라고 했다. 리더가 되면 목사님 직강의 기회가 많아진다고. 난 겨우 포티이고 그 세계는 현실 바깥에 있는 것 같았다. 말 그대로 어나더 레벨. 그런 수준을 목사님은 '초절정 고수'라고 불렀다. 여러분도 초절정 고수가 되시길 바란다고. 사실 무협지를 별로 본 적이 없었던 나는 그런 단어가 신비롭게 느껴졌다. 그렇다면 나는 '하수'도 아니고, 그냥 수련 입문 단계인가? 마당을 쓸라고 하면 쓸고, 물을 길어 오라고 하면 헉헉대며 산을 넘어 다녀오는 수련생. 돌아서면 또 떨어지는 낙엽을 불평 없이 쓸고, 철렁철렁 오다가 다 넘쳐 되돌아가 다시 물을 길어오는 끈기로 나는 포티 모임에 힘을 다해 출석했다. 


임신 중.

무려 1월 1일 안수 기도로 생긴 기적의 아이가 내 뱃속에 있었다. 입덧이 극심해서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입덧은 끝이 정해져 있을 뿐, 증세나 고통의 수준을 고려하면 중병이지 싶다. 거의 중환자나 다름없는 상태로 주중에는 링거로 연명하며 주말을 향해 체력을 긁어모았다. 교회는 차로 한 시간 남짓 거리. 주말에는 어떻게든 포티반에 참석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버텼다. 그러고 보면 기질상, 시작하면 열심히 하는 타입인 것 같다. 궁금해서 그렇게 된다. 결석한다면 그 시간에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 궁금해지는, 빈틈없이 배우고 싶은, 심지어 나만 모르는 게 약 오르는, 그런 기분 말이다. 이건 성실함과는 좀 다른 영역이다. 지적 욕구라고 할 수도 없고, 이걸 뭐라고 해야 할지 적당한 말을 찾기 어렵다. 장악, 혹은 통제 같은 말이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관심 갖는 분야에 대해서는 다 알아야 하고 혹 모르더라도 아는 척해야 직성이 풀리는 아집, 잘난 척, 자존심, 교만, 뭐 그런 감정 같은 것 말이다. 그냥 한 마디로 '욕심'이라고 해두자. 포티 과정에 대한 욕심 때문에 언제든지 뛰쳐나가 입덧과 구토를 반복하면서도 끝끝내 목사님이 늘 강조하신 대로 '지속, 반복, 예외 없이' 포티 과정을 이수해 내고 말았다. 리더는 그걸 '열정'이라고 했다. 리더는 늘 긍정적인 말로 내 주제를 잊게 해주는 사람이었다. 


욕심이든 열정이든 결국은 본능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막 태어난 신생아는 세차게 젖을 빤다. 누가 가르치거나 등 떠밀지 않아도 살기 위한 본능이다. 죽을힘을 다해 빤다. 무슨 일에든 그 정도 에너지를 들이면 대단한 성과를 거둘 것이다. 우리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했다면 젖 먹던 힘을 다하지 않아서일 것이다.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고, 말씀을 잘 배우라고, 막 태어난 영적 신생아는 모든 것이 미숙하기에 열심히 배워야 한다고, 목사님이 오티반 때 강조했던 것처럼 영적인 세계에 대해 배울 기회가 생기자 제대로 알고 싶은 욕심과 빨리 고수가 되고 싶은 열정이 솟아났다. 체계적이긴 또 얼마나 체계적인지. 검증된 선교회에서 나온 몇 가지 소책자로 크리스천으로서 가져야 할 기본적인 개념과 가치관을 만들어 가는데 왜 진작 이런 걸 몰랐을까, 한탄스럽기까지 했다. 비록 입덧에 시달리느라 문 가까운 자리에 앉아 자주 뛰어나가 토하고, 사람들의 체취를 참지 못해 코를 문 밖에 떼어두다시피 하며 들락거렸지만, 머나먼 고수의 세계와 그 너머에 계신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면 힘들 틈도 없었다. 점점 배가 무거워지고 앉아있는 일이 육체적으로 버거워질수록 마음은 천사의 깃털처럼 가볍게 교회를 향해 날아다니고 있었다.


주말마다 바빠졌다. 

교회를 아예 옮겼다. 차디찬 김밥으로 추위 더위를 견디며 이른 아침부터 찬양 연습하고 휘리릭 흩어지는 본 교회와 성가대는 나를 성장시켜주지 못한다고 판단했다. 2년을 다니고 그곳 담임 목사님 주례로 결혼 예배까지 드렸지만 왜 교회를 그만두느냐고 아무도 물어보지 않았다. 성가대 지휘자만이 한번 연락이 왔을 뿐이다. 그러고 보니 평소에도 본교회의 누군가와 딱히 연락을 주고받은 적도 없었다. 남남 같이 싸늘한 관계 속에서 왜 우린 봉사까지 하고 살았을까, 그 세월이 바보같이 느껴졌다. 교회를 옮기고 토, 일, 두 번이나 다 먼 교회를 다니는 것이 입덧으로 앙상해진 임산부에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분명 달랐다. 따뜻하고 풍성했고, 새로운 것들을 알아가는 즐거움이 컸다. 비록 남들처럼 주말에 태교 여행 같은 건 다니지 못했지만,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차별화된 태교를 하고 있었다. 이제 본 교회는 이곳이다. 나는 여러모로 새로 태어난 게 틀림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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