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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가운 열정 Dec 16. 2022

탈출 08

하나됨

아기가 태어났다.

태명은 '한나'였다. '한나'는 오랫동안 아이를 갖지 못해 마음고생하다가 하나님께 눈물로 간절히 기도하여 마침내 태의 은혜를 입어 선지자 사무엘을 낳은 여인이다. 엄마가 나를 가질 때 그렇게 눈물로 기도했다. 그래서 내 태명이 '한나'였다. 나 역시 쉽지 않은 시간을 보내고 어렵게, 그리고 무려 목사님의 안수 기도로 얻은 아이였기 때문에 내 태명을 따라, 아니 성경 속 인물에게 주신 주님의 은혜를 따라 태명을 '한나'로 지어 불렀다. '한나'는 어감이 '하나'와 비슷해서 나도 모르게 머릿속에 숫자 '1'을 떠올릴 때가 많았다. 엄마가 내 태명을 '한나'로 짓고 나서 내 동생 태명을 '두나'라고 명명했던 것에서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태명은 그랬다 치고 이제 이름이 필요하다.

병원에서는 아이가 나자마자 이름표를 붙일 때에는 주로 그냥 산모 이름을 붙여둔다. 아직 이름이 없는 경우가 더 많거니와 이름이 있다 해도 산모와 한 세트로 관리하는 것이 더 편리하다. 아기가 아무리 봐도 사랑스럽고 신비로웠지만 또 한편으로는 내 이름을 달고 누워있는 것이 어색했다. 얼른 출생신고도 하고 싶은데 아이 이름이 아직 없다. 막연하게 그냥 쭉 '한나'라고 부를까, 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 이름이 정들었고 의미도 좋았다. 뭔지 모르게 '넘버 원'이라는 느낌도 있고, 믿음과 기도와 은혜의 어떤 복합체 같이 여겨지기도 했다. 또 난임의 눈물과 그 시간을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총이 묻어 이름을 부를 때마다 하나님을 기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시부모님은 천하를 줘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내 새끼' 이름을 아무렇게나 지을 수 없다며 강남의 유명한 작명소인지 철학관인지에 가서 돈 몇 백을 주고 두 어 개를 지어왔다. 죄송하지만 솔직히 지금은 그 이름이 기억도 안 난다. 당시 유행을 따라 '채'자와 '빈'자가 들어간 이름들이었는데,  그냥 두 글자를 합쳐서 '채빈'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철학관의 철학을 따르고 싶지 않았다. 



조리원에 리더가 찾아왔다.

출산 축하 꽃다발은 입실 금지여서 못 가져왔지만 아기의 이름을 가져왔단다. 꽃다발보다 더 화사한 소식이었다. 이름은 '하나'. 상상을 초월하는 이름이었다. 내 마음에 들어왔다 나간 것 같이 어쩌면 딱 이름이 '하나'일 수가 있을까? '한나'보다 더 와닿는 이름, '하나'. 최하나. 아빠의 성 '최'와 엄마의 성 '하'를 따고 아빠 엄마 하나 되라고 지은 이름이란다. 하나 되라고. 하나. 얼핏 흔한 이름인 것 같지만, '하나님' 할 때에도 들어가는 글자이고, 우리 부부가 하나 되어야 한다는 목사님의 통찰이 신의 강력한 권면으로 느껴져서 아이의 존재와 이름 자체가 거의 운명적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사실 우리 부부는 그간 싸움이 잦았다.

연애 기간이 짧았던 것도 아닌데 정작 같이 산다는 건 상상과는 달랐다. 매 순간 '이게 뭐지?' 했다. 안온한 내 일상을 침범받는 기분, 사랑이라는 이유로 참아야 하는 귀찮은 일들, 다시 심심함이든 외로움이든 돌려받더라도 사소한 버릇들로 시작되는 갈등과 배신감은 되돌려주고 싶었다. 왜 항상 내가 그의 양말을 세탁기에 갖다 넣어야 하는지, 아무렇게나 먹다 둔 자리들을 일일이 치워야 하는지, 공정하지 않은 가사 노동 분배에 대한 불만이 나날이 뾰족해졌다. 뿐만 아니라 별로 닮지 않은 취향도 은근히 서로를 소외시켰다. 연애할 때엔 로맨틱 드라마를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결혼하고 보니 죄다 액션 영화나 재난 영화 타령이고, 느끼한 걸 먹고 싶어 크림 파스타를 떠올리면 그는 곱창을 언급했으며 소설책을 쌓아놓은 내 머리맡 반대편에는 경제 서적이나 자기 계발서가 쌓여있었다. 뭐 하나 맞는 것이 없었다고는 해도 굳이 싸움이 날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별일이 아닌 일들로 자꾸 짜증이 났다. 



이를 테면, 초코파이 사건 같은 것이 그랬다. 

이게 은근히 사무쳤던 모양이다. 두고두고 기억이 나는 걸 보면. 냉동실에서 초코파이를 꺼내 먹으려고 보니 덜렁 초코파이 빈 상자만 들어있었다. 남편은 뭘 먹을 때 나에게 권하지 않는다. 내가 냉큼 받아먹는 편도 아니긴 하지만 한 번쯤 '먹을래?' 해줘도 좋을 텐데, 편의점에 온 것 마냥 냉장고를 휘휘 뒤져서 소파든 식탁이든 아무 데나 가서 혼자 먹는다. 그래, 그건 그렇다 치자. 적어도 빈 상자는 마지막에 먹은 사람이 내다 버려야 하는 것 아니냐, 이건 상식의 문제가 아니냐, 도대체 어떻게 대접받고 자랐기에 이렇게까지 아무것도 안 하냐? 나는 '인간의 기본 소양'부터 시작해서 '당신 집안 양육 환경' 문제에까지 쭉 치고 들어가 버렸고, 남편은 그깟 초코파이 빈 상자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몰고 가는지 모르겠다며 티끌 모아 태산 쌓는 내 인식의 흐름 앞에 둘이 같이 쓰려고 만든 서재에 혼자 문을 탁 닫고 들어가 웅크려버렸다. 늘 그런 식이었다. '입만 열면 잔소리'와 '꿀 먹은 벙어리'의 동거는 나의 왠지 모를 억울함을 남편이 적당히 능글대며 뭉개고 마는 방식으로 위태롭게 이어지고 있었다.  



그 무렵이었을 것이다, 남편 친구 정민이가 수련회를 초대했던 것이.

결혼은 행복한 것 같지 않았고, 아이는 아무리 노력해도 생기지 않았으며, 남편은 내가 알던 사람이 아닌 것 같아서, 이제 시작한 지 1년 반밖에 지나지 않았건만 남은 인생에 대해 물음표가 떠다니던 바로 그 무렵. 이기적인 남편과 남편 존중할 줄 모르는 드센 아내의 조합이 과연 제대로 조화를 이룰 수 있을지 걱정이 덜컥 시작되던, 핑크빛이 서서히 핏빛처럼 느껴지기 시작하던, 적어도 싸울 때에 서로의 집안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말아야 한다는 암묵적인 규례를 상기시켜야만 했던, 그나마 싸우기라도 해서 어쩌면 다행 아니냐고, 갈등조차 없거나 그마저 피하는 것이 더 최악이니 우린 그래도 가능성이 있지 않겠느냐며 나란히 베란다에서 초코파이 빈 상자 대신 빈 맥주캔을 우그러뜨리던, 바로 그 무렵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수련회를 따라간 건 잘한 일인 것 같았다.

궁금하고 겁나 죽겠던 '구원'의 문제도 목사님이 오티반에서 복음을 통해 해결해 주셨고, 속 썩이던 난임도 안수 기도를 통해 척 하니 해결해 주셨으며, 심지어 우리 부부의 갈등에 대해서도 목사님이 넌지시 아이 이름 통해 잘 해결해나가도록 통찰해주시다니. 정말 만능 지혜자이시다. 예수님을 닮자고 그렇게 부르짖으시더니 당신 자신이 정말 예수님을 많이 닮아서 그러신 걸까? 성도의 출산에 하나하나 관심을 다 가지시고 태어난 아이 이름까지 기도하며 지어 보내시다니. 



남편과 나는 자모(子母) 동실을 신청하여 신생아실에 있던 하나를 내 방으로 데려왔다.

그리고 끊임없이 '하나야, 하나야' 불러댔다. 그 이름을 부를 때마다 조금씩 강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남남 같던 남편이 한없이 특별하게 느껴졌다. '하나'에게 부모가 될 수 있는 사람은 나와 남편뿐이다. '하나'의 모든 과정을 함께 지켜보고 기쁨과 고통을 '부모'로서 나눌 사람, 균등한 책임감과 두려움의 무게를 나누어 짊어지고 걸어갈 단 한 사람. 초코파이 빈 상자를 냉동실에 가득 채워두더라도, 신던 양말을 욕실 앞에 한 달치씩 쌓아 두더라도 이제 상관없었다. 오직 당신만이 하나의 아빠라는 사실. 부부끼리 있던 것과는 또 다른 감격과 동질감이 10월 초 조리원의 건조한 공기를 촉촉하게 데웠다. 하나라는 존재 자체가 그런 막중하고 벅찬 감정들을 주었겠지만 이름의 특별한 의미가 자꾸 상기되어 '하나야' 하면 '여보 사랑해'가 자동으로 머리에 재생되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 나는 남편과 하나 되어야 한다.' 그게 하나님의 뜻이라는 걸 성경 구절을 통해서도 이미 확인한 바 있다.



조리원에서 퇴원하고도 두 달이 흘렀다.

산후조리의 중요성은 귀가 닳도록 들었지만 그건 아기를 돌보는 사람이 전담으로 24시간 붙어있을 때에나 가능한 이야기이다. 낮에 아무리 도우미 여사님이 와 있어도 밤새도록 젖을 물리고 기저귀를 갈고 아토피로 긁어대거나 배앓이로 울어대는 걸 안고 서성이는 일은 철저하게 내 몫이었다. 종종 아기 목욕을 시킬라치면 남편은 '무섭다'고 했다. 아기를 떨어뜨릴까 봐 안는 것도 무섭고, 물에 빠뜨릴까 봐 욕조에 붙잡고 있는 것도 무섭고, 질식시킬까 봐 젖은 아기를 꺼내어 수건에 감싸는 것도 무섭단다. 그러고 보면 목욕뿐만이 아니라 다 그랬다. 아기가 어떻게 잘못될까 봐 어쩔 줄을 몰랐다. 너무 작고 말랑해서 어쭙잖은 자기 손에서 뭉개질까 봐 엉거주춤 근처에 서서 목만 내빼고 들여다보았고, 행여 앙앙 울면 그 소리에 온몸이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움찔하며 꼼짝하지도 못했다. 차라리 그냥 먼저 움직이는 가벼운 엉덩이와 뭐든지 내 손을 거치는 게 더 안심이 되는 통제적 성격 또한 한몫하여 전쟁 같은 육아는 점점 더 나만의 영역이 되어가고 있었다.



하나를 낳은 지 백일이 지나서야 다시 교회에 발을 디뎠다.

겨울이었고 아기도 너무 어린 데다가 교회는 멀어서 굳이 꼭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지만, 그즈음의 남편은 하나가 아니라 철저하게 '둘'을 선언하고 있었기 때문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거의 잠을 자지 못해서 종종 쓰러지기도 했고, 밥을 먹을 시간이 없어서 종일 굶기 일쑤였다. 종일 참다가 간신히 화장실을 갔다가도 하나의 울음소리가 들리면 이게 사람 사는 건가, 싶을 때도 있었다. 하나는 내려놓기만 해도 울었다. 그런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편은 전보다 더 늦게 들어왔다. 지친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지혜자와 상의하고 싶었다. 내 오랜 아픔을 깊이 통찰하여 아기가 생기도록 안수기도 해주시고 심지어 엄청난 기도빨로 새 생명이 잉태되는 결과를 안겨다 주신 목사님과 아기의 이름을 조리원으로 날라다 주며 당장 급한 당면 과제에 대해 긴밀하게 관심을 갖고 문제 해결사로 등극한 리더는 내게 무한 신뢰와 존경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친구들은 오히려 더 지독한 하소연으로 내 입을 막거나 무작정 내 편을 들기만 하는 등 균형 잡힌 해결안을 제시하는 데에 무수히 실패했고 심각한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했던 터라 친정 식구들과 의논하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리더에게 달려간 건 즉각적인 효과가 있었다.

리더는 그 내용에 관해 남편의 리더에게 문자를 남겼다. 그러자 곧 그쪽 리더에게서 전화가 왔다. 

"자매님, 제 잘못입니다. 용서해주세요. 제가 잘못 가르쳤습니다."

"어머, 리더님이 무슨 잘못이에요? 그러지 마세요."

"아닙니다. 아기가 태어났으니 더욱 가정을 위해 취업에 집중하는 게 좋다고, 제가 더 늦게까지 공부하라고 독려했거든요. 자매님이 혼자 아기 돌보는 게 그렇게 힘드신 줄도 모르고요. 제가 아직 육아 경험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제 부덕입니다."

"아니에요, 리더님이 무슨.."

나는 어쩔 줄 몰라 말을 잇지 못했다. 수화기 너머에서는 여전히 끙끙 앓는 소리가 났다.

"자매님, 이제부터 잘할 겁니다. 제가 지금 무릎 꿇고 전화받고 있습니다. 찾아보니 산후 우울증이란 것도 있고, 보통 일이 아니던데, 정말 제가 너무 생각이 짧았습니다. 우리 형제님 진짜 앞으로 잘할 겁니다. 제가 잘 가르치겠습니다."

결혼도 안 한 남자가 육아에 관해 뭘 안다고 잘 가르치겠다는 건지. 그러고 보니 내가 육아 전쟁을 치르는 동안 남편 홀로 이 악물고 취업 전쟁을 치르고 있었을 것이 그제야 헤아려졌다. 그 전쟁들로 인해 각자 거덜 난 체력과 정신력이 서로를 향해 칼날을 겨누게 했던 것은 아닌지. 나는 어쩌면 당장 행동의 변화보다도 먼저 진실한 사과가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남편 리더의 절절하다 못해 과한 사과가 그간 잠 못 자 충혈된 눈을 맑게 할 수도 없고, 아이를 안아 올리느라 녹아내린 뼈마디를 재생시키지도 못하지만, 마치 24시간 보육 도우미를 당장 고용하기라도 한 것 같이 마음이 환해지고 든든해졌다. 



따지고 보면 남편과 해결할 일이었다.

사과를 받더라도 남편의 사과를 받아야지 리더가 무릎까지 꿇어가며 할 일인가 싶었지만, 리더라는 존재가 그렇게 막중하고 강력한 책임감을 가지고 사람을 돕고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 경험치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랄까? 사실 아기를 낳아본 적 없는 사람의 가르침이 아니라 세 쌍둥이 독박 육아로 이골이 난 고수 아빠에게 배우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마음속에 지혜로운 사람들은 목사님과 리더로 딱 정리가 되어버렸나 보다. DMZ가 생겼다. 리더는 UN이 되어 우리가 평화적으로 담화를 나누고 협정을 맺으며 각자에게 유리한 이기적인 기준이 아니라 오직 성경적인 기준만으로 의견을 좁히거나 포기하고 방향을 바꾸거나 맞추어갈 완충 지대를 구축해 주었다. 우리는 점점 더 리더들을 통해 서로의 입장을 전달했고, 육아에 대한 꿀팁들을 얻었으며,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을 정해나갔다. 싸움이 날 만하면 리더부터 찾았다. 



하나됨이란 그런 것이었다.

부부의 하나됨을 추구하는 과정에 손을 맞잡은 부부의 나머지 다른 손을 각자의 리더들이 붙잡고, 리더들의 손은 또 그 위의 리더들이 손을 잡으며, 쭉 연결되어 나중에는 그 손 끝에 목사님이 손을 잡아 줄줄이 연결되어 가는 하나됨. 그냥 부부끼리의 하나됨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 전체와 이어져가는 하나됨. 서로가 서로를 책임지고 돌보며 격려하고 화목하게 지내는 하나됨. 남편과 하나되지 못해서 사달이 날 것 같던 내가 점점 리더와 하나되어 가면서 남편과의 싸움이 잠잠해져갔다. 그렇게 시작되었다. 최하나의 엄빠, 최진무 하연우의 하나됨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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