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지다는 감정에 대하여
삐지다는 단어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사전적 정의는 '성나거나 못마땅해서 마음이 토라지다.'라고 한다. 대게는 이 단어는 남성보다 여성들의 입에서 오르내리는 경우가 많다고들 생각한다. 하지만 엄밀한 통계를 따져서 분석하게된다면 꼭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사실 이 삐지다는 단어는 성별을 가리지 않고 평이하게 나타난다. 수많은 하루들의 반복 속에 나또한 이 삐지다라는 감정적인 토라짐을 마주한다.
그리고 그에 탈출 방법으로 고독하게 혼자 쓰라림을 안고 홀로 시간을 소비하며 벗어난다. 대게는 이 단어의 지속 시간은 길지 않은 편이다. 역시 결국 희석되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가끔은 평균을 뛰어넘는 경우의 삐짐이 발생하기도 한다. 내 기억 속에 유독 생각나는 단편이 있다. 고2 때쯤이었던 것 같다. 한 친구가 있었고 그를 지금부터 A라고 부르겠다. A는 나와의 접점이 많았다.
공교롭게 초, 중, 고가 모두 같았다. 같은 반을 몇 번 하였지만 정작 우리가 가까워진 것은 꽤나 시간이 지난 시점인 고등학교 때였다. 이상하게 그런 사람들 있지 않는가 거리감이 있지는 않지만 딱히 가까워지지 않는 묘한 딱 그 범주가 A였다. 그래도 그동안 쌓여 있던 접점은 다리가 되어주었고 고 2 때쯤에는 우리는 몇몇 친구들과 무리로 자주 어울려 다녔다.
뭐 대부분은 학교에서였지만 그 시절 친분이 차곡차곡 쌓여 갔다. 수컷냄새가 물씬 나는 남고에서 한정된 공간에서만 시간을 보내다 보니 그 에너지를 소비할 곳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런지 유독 짓궂은 장난들을 많이 쳤다. 대게는 선을 일정정도는 유지한 편이었다. 하지만 가끔은 무심코 금단의 기준을 넘어서 불화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A에게 나는 그러한 행동을 했었었다.
장난은 유치한 것들이 많았다. 그중 외모가 주제가 되는 경우가 그에 해당되었다. 나는 그 유치한 장난을 A에게 하였다. 그의 외모는 특정한 캐릭터와 비슷하였다. 이쁘고 잘생긴 외형이라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예전 어릴 적 개구리 왕눈이라는 만화가 있었다. 그 속에서 빌런이자 폭군인 투투라는 캐릭터가 있다. 밉상 중 하나며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는 캐릭터이다.
그 당시 함께 했던 친구들은 A를 이름 대신 투투라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내가 먼저 시작한 건 아녔다는 점에서 이 장난에 죄책감은 살짝 덜했다. 여느 때와 같이 나는 그를 부를 때 이름 대신 투투라고 불렀다. 그런데 분위기가 묘한 반응이었다. 적당한 짜증과 하지 말라는 말과 함께 투정을 부리는 것이 반응이었는데 굳은 표정으로 도끼눈으로 쏘아보았다.
그러면서 욕과 함께 밀침을 하면서 강한 모습을 보인 것이다. 이에 내가 대응하는 방식은 사과와 그냥 맞붙어 정색하는 행동이 있다. 나는 후자를 선택했다. 분명 전자를 행했다면 별거 아니고 넘어갔을 것이다. 근데 무슨 승부도 아닌데 사과가 진다는 감정이 들었다. 그래서 맞대응하였고 친구들의 말림과 함께 기분이 상했다. 평소에도 아무렇지 않은 일상이었고 나만 한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욱하는 반응일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괜히 삐지는 것은 내가 되어버렸다. 이후 우리의 접점은 인위적으로 끊어졌다. 한정된 공간에서 부딪칠 수밖에 없음에도 서로 외면하고 모른 체하였다. 그렇게 졸업을 하였고 그 뒤 각자 진학한 대학이 달라지면서 자연스레 멀어졌다. 대략 그 토라짐이 발생하고 4년이 지나고 나서 어떻게 한 술자리에서 마주 하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의 과실이 문제였고 잘못이라는 것이 인식하였지만 이미 한번 놓쳐버린 타이밍은 다시 수정하기는 어려웠다. 그냥 그렇게 감내하고 살아갔다. 이제는 내 잘못을 마주하는 것이 무안하고 창피해서 피했는데 딱 마주하게 된 것이다. 홀짝홀짝 술을 몇 잔 하면서 먹다가 적당히 취기가 올라왔다. 과거 이야기들이 하나 둘 나왔다. 그러면서 툭 우리의 사건이 튀어나왔다.
멈칫한 나와는 달리 A는 덤덤하게 말을 내뱉었다. 그때 본인이 심하게 반응한 것이 미안했다고 말이다. 자신은 그 별명이 너무 싫었고 불쾌감이 축척되었는데 한계치가 넘어지면서 공교롭게 그 타깃이 내가 되었다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나도 고해성사를 하듯 당시 타이밍을 놓쳐 상황을 꼬이게 만들었다고 말이다. 우리는 술잔을 서로 기울이면서 다시 사건의 이전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끊겼던 다리가 다시 개통된 느낌이 들었다.
삐지다는 단어가 사회에 구성원으로 일을 하면서는 이질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철저히 주고받고 하는 감정에서 계산은 명확하다. 숫자에는 느낌이나 마음이 포함되지 않는다. 그냥 이러한 감정을 가진다는 것이 이상한 것이다. 장사꾼이 되어야 하고 주판을 튕겨야 하는 세상의 창문은 쌀쌀하며 씁쓸하다. 어찌 보면 마음이 없기에 이러한 삐지다는 감정도 존재의 부정을 당하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가끔은 삐지다는 감정을 잊지 않는 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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쌓였던 아쉬움을 털다 인연을 지워버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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