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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국제영화제 아주담담 [윤경호 배우]

윤경호 배우편

by 김군

함께 길을 걷는 동행자가 있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 있는 일이다. 소극적이고 한정된 틀 안에서 삶을 살아가는 나에게도, 드물지만 그런 존재가 있다. 사람이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사람이 아닌, 조금은 특별한 존재다. 바로 _부산국제영화제_이다. 이제는 서른을 훌쩍 넘긴 이 축제를 나는 매년은 아니지만, 일상이 허락하는 한 꾸준히 찾아갔다. 생각해보면 절반 이상은 영화제가 열릴 때마다 부산을 방문했던 것 같다.그 긴 시간 동안, 이 영화제는 내 삶의 곁을 조용히 걸어온 동행자였다.


그러나 요즘 들어 우리의 동행에도 틈이 생겼다. 세상의 패러다임을 뒤흔든 코로나19는 영화제에도, 나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시장은 위축됐고, 축제는 볼거리가 줄어들었다. 분위기도 예전 같지 않았다. 나 역시 삶의 변곡점을 맞아 방황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공교롭게도 서로가 다시 정비된 시점에 우리는 재회했다. 영화제는 어느덧 서른을 넘었고, 나도 조금은 변해 있었다. 그렇게 다시 만난 부산국제영화제는 이전보다 더 애틋하고 소중하게 다가왔다.


짧지만 따뜻했던 그 여정을 기록해보고자 한다. 보았던 영화들, 프로그램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인연들의 이야기. 사실, 시간 순으로 정리하면 깔끔하겠지만, 정리에 영 소질이 없는 나는 기억의 단편들, 마음에 남아 있는 장면들을 먼저 꺼내어 보려 한다. 그것이 나다운 기록의 방식이기도 하다.


아주담담 윤경호 배우 아주담담 윤경호 배우

‘대기만성(大器晩成)’,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다. 늦게 핀 꽃은 그 향이 더 짙고 오래 남는다. 그래서일까. 이 사자성어의 옷을 입고 있는 사람에게는 유독 호감이 간다. 어느 날, 텔레비전을 보다가 평범하지만 묘하게 눈길을 끄는 단역 배우를 보았다. 누구나 자신이 하는 일에 열정과 애정을 가지고 살아간다. 하지만 그날 브라운관 속 그 배우의 눈빛은, 무언가 다르게 느껴졌다. 정말 연기를 사랑하는 사람이구나. 그리고 절대 그 사랑을 놓지 않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론 마음이 씁쓸했다. 나는 이미 좋아했던 것들을 하나둘 놓아버리며, 그것을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스스로를 달래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그 배우의 모습이 더 강렬하게 다가왔다. 앞으로 어떤 작품에 나올지 모르겠지만, 꼭 기억해 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의 이름은 윤경호였다. 나는 일에서는 ‘똥손’처럼 선택을 잘 못하지만, 유독 될성부른 떡잎 같은 배우들은 잘 알아본다. 윤경호는 어느새 계단을 한 칸씩 오르며, 존재감 있는 연기자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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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그를, 작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우연히 마주쳤다. 설레는 마음에 뭔가를 남기고 싶었다. 하지만 흥분한 나머지 뇌에서 오류가 생겼다.
그가 출연하지 않은 작품의 블루레이에 사인을 요청해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흔쾌히 웃으며 사인을 해주었다.


“저 이 작품 안 나왔는데, 착각하셨나 봐요.”


쑥스러움과 미안함이 뒤섞인 그 순간은, 의외로 금방 지나갔다. 그리고 1년 뒤, 같은 공간, 같은 영화제에서 다시 그를 만났다. 이번엔 ‘아주담담’이라는 이름의, 배우와의 심층 인터뷰 프로그램이었다. 관객으로서 참여한 나는, 다시금 그 배우의 진심과 성실함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는 늦게 핀 꽃처럼 잔향이 짙고, 큰 그릇처럼 천천히 채워져 가는 중이었다.

관객의 환호 속에 등장한 그는, 소탈한 웃음과 친근한 모습으로 손을 흔들며 화답했다. 잠깐의 포토타임이 끝난 뒤, 진행자와 함께 공식 행사가 시작되었다. 진행자가 던지는 질문에 차분히 답하며 대화는 이어졌다. 사실 이런 오프라인 행사는 드물다. 그래서인지 배우를 실제로 마주했을 때, 화면 속 이미지와는 다른 인상을 주는 경우가 많았다. 기대와 괴리감을 느낄 때도 있었다. 하지만 윤경호 배우는 달랐다.


화면 속 모습과 실제 모습이 좋은 의미에서 일치했다. 대담의 시간은 그 사람의 진심을 보여주는 자리였다. 연기에 대한 열정, 삶에 대한 태도, 우리가 미처 몰랐던 인간적인 면모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질문과 답이 오가는 그 시간, 유난히 기억에 남는 말들이 있었다. 가볍지 않지만 무겁지도 않은, 마음에 오래 남는 이야기들이었다.


"오늘이 제 커리어 하이라고 생각을 항상 해요. 그리고 내일부터 내리막일 수 있다

근데 이제 그 준비를 항상 마음속으로 갖고 다만 그 내리막을 가더라도

어 멋지게 어 꾸준히 어 저의 어떤 신념을 잃지 않고 가고 싶다 그런 생각으로 가지고 살려고요."


'연기의 기본은 사랑이라'는 멘트를 대담의 한 순간에 하였는데 이 부분 또한 꽤나 마음에 들었었다. 관객과 작품, 그리고 함께하는 동료들에 대한 애정이 모여야 비로소 좋은 작품이 탄생한다는 그의 가치관은 인상 깊었다. 그 말에 진심이 묻어 있었고, 그래서 더 멋지게 느껴졌다. 또한 그는 말을 재미있고 조리 있게 풀어냈다. 나는 그저 관찰자의 위치에 있었지만, 그의 대화는 자연스레 귀를 끌었고, 어느 순간 집중하게 되었다. 직접 참여할 수 없는 자리였지만,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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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정도 진행자가 이야기를 이끌다가, 관객에게 마이크를 넘기며 질문할 기회를 주었다. 잠시 머뭇거렸지만, 이내 손을 번쩍 들었다. 왠지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았다. 작년, 나의 작은 실수에 대해 사과하고 싶었고 그에게 진심 어린 질문 하나를 던지고 싶었다. 배우 윤경호가 연기해 온 수많은 캐릭터 중에서 그의 마음속에 가장 강하게 남아 있는 장면이나 대사는 무엇일까? 그가 연기를 하며 간직하게 된 내면의 잔상, 그 흔적이 궁금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안에 강렬한 파편 하나쯤은 가지고 산다. 때로는 그것이 삶의 동력이 되기도 한다. 윤경호에게도 그런 조각이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그 파편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운이 좋게 선택되어 떨리는 마음으로 작년의 일에대한 송구스러움을 가지고 있었다 하였고 더불어 생각하고 있던 질문을 덧붙였다. 유쾌하게 웃으면서 화답을 해주었는데 작품을 할때마다 다르지만 도깨비에서 연기한 김우식이라는 캐릭터를 꼽았었다. 이 작품을 통해 사람들을 알아봐주시고 전생에 나라를 구하신 분이라면서 카페에서 서비스도 받았다는 에피소들이 연기를 하는 픽션의 세계와 현실이 만나는 감격적인 순간이라는 코멘트를 붙였었다.


40분의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가고, 어느덧 행사는 끝이 났다. 관객들 모두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의 이야기에 매료된 눈빛들이, 공간을 떠나지 못하고 머물렀다. 그 눈빛을 읽은 걸까. 윤경호 배우는 자리에서 마이크를 들고 말했다.


“여기 계신 분들, 모두 사인해 드릴게요.”


뜻밖의 말에 주변이 술렁였고, 나는 조용히 줄에 섰다. 내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마음속에서 두 가지 감정이 뒤섞였다. 설렘과 작년의 그 미안함. 눈앞에 그가 앉아 있었다. 나는 작년의 오해에 대해 다시 한번 사과를 전했다. 그리고는, 장난스럽게 부탁했다. “혹시 사인에 ‘헷갈리지 마세요’라고 적어주실 수 있을까요?” 그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사소했던 실수는 따뜻한 기억이 되었다.


그는 부탁대로, 사진처럼 유쾌하게 사인을 남겨주었다. 그 짧은 문장 하나에도 그의 성격이 묻어났다. 아마 다시는 이렇게 가까이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눌 기회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괜찮다. 이 짧은 단편 같은 순간의 잔향이, 배우 윤경호라는 사람의 매력으로 오래도록 남을 테니까.


앞으로도 그의 연기를 지켜볼 것이다. 작품 속에서 또 어떤 얼굴로 나타날지 기대하고, 멀리서지만 묵묵히 응원하고 지지할 것이다.소탈하지만 뚝심 있고, 인간미 가득한 배우. 나는 결국, 윤경호라는 사람에게 반해버린 것 같다.


https://youtu.be/faDESHvm0F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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