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즈오카로 향하는 기차 안은 조용했습니다. 기차를 몇 번 갈아탔지만, 연말의 들뜬 분위기는 기차 안에는 없었습니다.
기차를 탄 것은 12월 31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귀성길에 오르는 사람들도 그리 많아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가끔 큰 캐리어를 들고 기차에 오르는 사람은 있었지만요.
숙소가 있는 곳도 시가지에서는 조금 떨어진, 조용한 동네였습니다. 기대하지 않았는데, 숙소 창밖으로 후지산이 보였습니다. 뜻하지 않게 후지산을 바라보며 2023년의 마지막을 맞았습니다.
일본에서는 12월 31일 밤에 소바를 먹는 관습이 있습니다. ’도시코시(年越し) 소바‘라고 하죠. 마침 묵는 숙소에서 연말이라며 컵소바 하나씩을 나눠 주었습니다.
해넘이 소바를 먹으며, NHK의 연말 가요 프로그램인 ’홍백가합전‘을 봤습니다. 1월 1일 아침에는 날씨가 맑았고, 후지산은 더 또렷이 보였습니다.
일본에서, 일본과 어울리는 방식으로 한 해의 마지막을 보냈습니다.
후지산과 가까운 도시인 시즈오카는 아주 큰 도시는 아닙니다. 시즈오카시의 인구는 60만이 되지 않습니다. 작은 곳은 아니지만, 그래도 도쿄나 요코하마에 비하면 대도시라고 말하기는 어렵죠.
하지만 시즈오카에는 일본사의 꽤나 중요한 장면들이 스쳐 간 곳이 있습니다. 시즈오카 시내에 위치한 슨푸성(駿府城)입니다.
새해 첫날, 저도 슨푸성 터로 향했습니다. 슨푸성은 1585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지은 성이라고 합니다. 어린 시절을 시즈오카에서 보낸 그가 다시 돌아와 지은 성이었죠. 물론 그때만 해도 이에야스는 일개 영주에 불과했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후 수 차례의 권력 투쟁을 거쳐,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이은 일본 최고의 권력자가 됩니다. 1603년에는 쇼군(将軍)이 되어 도쿄에 에도 막부를 열었죠.
하지만 이에야스 본인은 쇼군직에 오래 머물지 않았습니다. 2년 만에 쇼군직을 아들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이 슨푸성으로 와 은거했죠.
물론 이것은 상징적인 조치에 불과했습니다. 자신이 사망했을 때를 대비해, 권력 승계를 원활히 하기 위한 조치였죠.
슨푸성에서 이에야스는 적극적으로 정사에 참여하며 ‘상왕 정치’를 이어갔습니다. 이에야스는 이곳에서 조선 통신사들과 만나기도 했습니다.
에도 막부를 연 이에야스가 머문 곳이 슨푸성이었지만, 한편으로 에도 막부의 문을 닫은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머문 곳도 슨푸성이었습니다.
에도 막부의 마지막 쇼군인 요시노부는 1867년 말 권력을 덴노에게 반환합니다. 요시노부 본인은 도쿄로 돌아갔지만, 몰려드는 신정부군에게 저항하지 않고 항복했죠.
항복한 요시노부는 슨푸성으로 와 근신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250년 이상 지속된 에도 막부의 역사를 끝낸 망국의 군주였죠. 정치에서도 완전히 배제되었습니다. 하지만 의외로 그의 근신 생활은 그리 힘겹지는 않았습니다.
요시노부는 에도 막부라는 구시대를 상징하는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메이지 정부라는 신시대에게 권력을 넘겨주는 방식은 아주 말끔하고 평화적이었습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요시노부는 신정부에서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가 슨푸성에 왔을 때 나이는 겨우 32세였습니다. 요시노부는 정치와는 거리를 두었지만, 새로운 문물에는 아주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는 사격이나 사이클링, 사진 촬영 등 다양한 취미를 즐기며 살았습니다.
요시노부의 근신도 2년이 되지 않아 해제되었습니다. 오히려 메이지 덴노로부터 공작에 준하는 작위를 받았죠. 이 작위는 쇼군 시절에 형식적으로 갖고 있던 작위보다 오히려 높은 것이었습니다.
근신 해제 이후에도 시즈오카에 머물던 요시노부는 말년에 가족을 따라 도쿄로 이주했습니다. 도쿄에서는 덴노 가문과도 자주 왕래하며 친하게 지냈죠.
한때 ‘조정의 적’으로 지목되어 토벌의 대상이었던 요시노부지만, 메이지 덴노는 그가 쉽게 정권을 내어준 데 대해 개인적으로 감사의 뜻을 표하기도 했죠.
그가 정권에서 물러나 가족들과 함께 만년을 즐기는 동안, 메이지 유신의 주역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메이지 유신을 이끈 주역 3명을 흔히 ‘유신 3걸’이라 부릅니다. 오쿠보 도시미치, 사이고 다카모리, 그리고 기도 다카요시가 그들입니다.
이 가운데 사이고 다카모리는 메이지 신정부의 급격한 개혁에 반발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반란은 진압됐고, 사이고 다카모리는 할복 자살했죠.
기도 다카요시는 반란 진압에 나섰지만, 지병의 악화로 오히려 사이고 다카모리보다 먼저 사망했습니다. 오쿠보 도시미치는 이 반란을 진압하고 1년도 되지 않아 불만 세력에게 암살당합니다. 셋 모두 나이가 50이 되지 않아 사망했습니다.
요시노부는 메이지 유신의 주역들보다 30년 이상을 더 살았습니다. 15살 어린 메이지 덴노보다도 1년 늦은 1913년에 향년 76세로 세상을 떠났죠.
메이지 유신은 막부 세력에 대항해 벌어진 일종의 쿠데타였습니다. 요시노부는 정권을 덴노에게 돌려주었지만, 그 뒤에도 정치에는 참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거든요.
막부를 폐지하고 요시노부를 정권에서 쫓아낸 것은, 유신 3걸을 중심으로 무사들이 궁궐을 장악한 뒤 내려진 결정이었습니다. 이후 요시노부는 항복했지만, 막부의 남은 세력은 전쟁을 계속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이 쿠데타의 승자는 누구였을까요? 요시노부와 유신 3걸 가운데, 누가 결국은 승리한 것일까요?
어떤 의미에서는 일본사다운 역설입니다. 전투에 승자와 패자는 있어도, 그 계급과 지위는 끝내 변할 수 없는 것이 일본이라는 사회의 특징이니까요.
새해 첫날부터 일본에는 큰 지진이 있었습니다. 진앙과는 300km나 떨어진 곳에 있었지만, 제가 있는 곳에도 흔들림이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진앙 부근에서는 꽤 많은 사망자까지 나왔지만, 일본 열도는 금세 평안을 되찾은 듯 보였습니다. 혹시나 해서 켜두었던 재난 방송은 다음날 아침에는 끝나 있었습니다. 철도도 다음날 곧바로 정상 운행에 들어갔습니다.
후지산 아래에서 보낸 새해 첫날은 많은 점에서 일본다운 것이었습니다. 재해도, 그 뒤에 돌아온 일상도, 슨푸성에 새겨진 막부의 역사도 그랬습니다.
일본다운 역설이 교차하는 이 도시에서, 그런 일본다운 연초를 보냈습니다. 신칸센은 오늘도 후지산 아래의 선로를 빠르게 달려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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