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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강사가 되기까지

미국 대학 유학과 그 고독한 내면

아 우선 나로 말하자면, 중학생 때부터 영어를 잘하고 싶은 마음이 컸던 학생이었다. 그냥, 영어를 잘하는 사람들이 멋져 보였다. 그래서 영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사람들에 대한 동경심으로 가득 찬 학창 시절을 보냈다. 그러면서 언젠가 나도 미국 유학을 가리라는 꿈을 키워갔다.


감사히도 그리고 운이 좋게도, 고등학교 졸업 후 꿈은 이루어졌다. 처음에는 부모님이 미국 유학을 정말 크게 반대하셨다. 근데 역시,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그렇게 가고 싶다 말하던 나에게 부모님이 지셨다. 나는 그렇게 만 19세에 미국으로 향하게 되었다.


그런데 막상 어렵게 어렵게 들어간 학교에서 첫 학기 영어 과목 교수님으로부터 들은 말이, "넌 영어를 모국어처럼 절대 구사할 수 없을 거야. 이미 늦었어. 언어 형성기는 만 12세에 끝나거든."이었다. 얼마나 하늘이 무너지고 앞이 노래지던지, 근데 또 그 와중에 오기가 생겼다. '내가 진짜 영어 잘해서 감탄을 자아내게 해야지. 원어민 같은 느낌으로 영어를 하도록 해야지.'


그래서 지독하게 고독한 유학 생활을 했다. 미국 대학 중에서 파티로 넘버 원인 학교에서,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지독하게 고독하고 외로운 사람으로 지냈다. 스스로 약속한 두 가지가 있었기에.

나의 영어공부 룰 넘버 원, 한국인과 친구 하지 않기. 룰 넘버 투, 쓸데없는 파티에 시간 낭비하지 않기.



그래서 결국 그렇게 되었냐고? 글쎄. 언어는 또 참 객관적인 기준이 없는 학문이기도 하다. 만약 누군가 당신에게 "한국어 얼마나 잘해요?"라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할 것인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내 기준에 듣기가 웬만큼 다 가능하고, 영어 자막 있으면 넷플릭스에서 영화를 다 볼 수 있는 정도면.. 목표는 이루지 않았는가 싶다. 그리고,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어떤 식으로든 표현할 수 있게 된 지금, 좀 잘하지 않나 생각도 가끔은 한다.





아무튼 확실한 것은 미국에서 영어를 배워 영어강사로 일하다보니, 한국에서의 절대 문법적 구조를 따지며 공부하는 영어는 원어민스러운 언어가 될 수 없다는 걸 더 느끼고 있다. 문법적 구조가 어느 정도 필요하기는 하지만, 아마 로봇이 말하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을까. 영어가 늘고 싶은 그대여, 지금 영문법을 쳐다볼 시간에 한국어 책이라도 한 자 더 보고 어휘의 폭을 넓히길 간곡하게 바란다. 영어 강사이기에 영문법을 버릴 순 없지만, 문법에 지레 겁먹고 영어를 포기하는 친구들을 보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다시 내 유학 시절의 생활로 각설하자면, 한국인 친구들을 사귀는 것을 멀리했기에 자연스레 마음을 온전히 터놓을 친구가 많지 않게 되었다. 영어로 내 온 마음을 표현하는 것은 참 어려웠다. 내가 한국어로 하는 생각을 그대로 영어로 전달하는 것이 어렵고, 이런 게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구나를 느낄 수 있었다. 고로, 진정으로 서로를 이해한다는 것이 외국인과는 어렵다는 걸 느꼈다. 인종차별이 아닌, 그냥 정말 다름을 인정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가벼이 친구를 만들 수 있는 파티는 또 내 성격에 맞지 않았기에, 난 소위 말하는 '아싸'의 길을 걸어가게 되었다. 다행히도 룸메이트는 미국인 친구들이었어서, 그들과 대화도 하고 미드도 챙겨보며, 영어의 인풋과 아웃풋은 놓치지 않으려 노력했다.




놀거리가 많이 없는 미국 시골에서 아의 삶을 살아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나만의 시간이 많아졌다. 온전히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 24시간 중에 적어도 12시간 이상은 있었던 거다. 심지어 학교가 바다와 산으로 둘러싸인 아주 친환경적인 곳이었기에, 이보다 더 사색과 독서하기 적합한 곳이 있었을까 싶다. 결국 나는 20대부터 책과 사색 그리고 여행에 미친 듯이 빠져들기 시작했다. 지금의 내 모든 생각의 기반이 이때 나오지 않았을까. 책을 읽고 여행을 다니며 사람들을 참 많이 관찰했다. 각자의 삶의 방식이 다른 걸 이때 몸으로 이해했다.



공부하다 힘들면 바다를 바라보며 조깅을 하고, 책을 싸들고 해변에 나가서 읽다가 들어오기도 하고. 돌이켜보니, 나의 내면에 온전히 투자할 수 있던 유일한 시간이었다. 가끔은 해 질 녘에 바다로 나가서 날이 밝을 때부터 노을이 지고 밤이 찾아올 때까지 잠자코 앉아서 하늘과 바닷물을 바라보고 있을 때도 있었다. 하늘색이 한국에서 보던 색과는 확연히 달라서, 어쩔 땐 샛노랑, 어쩔 땐 핑크, 심지어 보랏빛 하늘까지 볼 수 있었다.


그럴 때면, 나 진짜 살아있어 너무 감사하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론 내가 이 학교를 졸업하고서도 이렇게 아름다웠던 순간들을 하나하나 다 기억할 수 있을까 걱정하며 내 뇌의 한정된 메모리에 조금은 속상하기까지도 했다.



물론, 이처럼 아름답고 여유로운 기억만 있는 것은 아니다. 시험 기간을 떠올리면, 나 진짜 치열하게 공부했지 싶다. 영어로 된 모든 교과서를 읽고 또 읽었고, 수업 시간에 교수님의 말을 다 이해하기 위해 간혹 녹음도 해가며 적어도 시험 1주일 전에는 웬만큼 준비를 다 끝내려고 미리미리 공부했다. 어차피 진도를 시험 직전까지 나가시는 교수님이 태반이었기에, 직전에 배우는 내용만 딱 시험 전날 공부할 수 있도록 공부량 조절을 하는 것에는 도가 텄다. 그리고 또 노력한 만큼의 결과가 나오지 않음에도 더 이상 좌절하지 않는 것에 대한 연습을 철저하게 했던 시간들이 이었다.



미국 유학은 그 무엇보다 값진 시간들이 분명했다. 내 안의 나를 깨뜨리는 고독의 시간을 지나 인격적으로 그리고 영어 학문적으로 큰 발전을 선사했던 귀한 시간들이다. 그러나 막상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와서, 영어 강사라는 직업을 갖기까지는 고민이 많았다.


첫째로, 내가 영어를 잘하는 것일 뿐이지 남을 잘하게 만들 수 있는 법을 아는 것은 아니고

둘째로는 누군가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 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그런데 내 안에는 그런 열망이 샘솟고 있었다. 내가 귀하게 그리고 값지게 배운 지식과 지혜들을 누군가에게 간접체험을 시켜주고 싶은 그런 열망. 연간 평균 100권의 독서를 통해 축적한 인사이트와 더불어 비싸게 값을 지불하고 경험해온 미국 유학 생활을, 누군가는 쉽게 수 깨달을 수 있게 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리고, 여행을 좋아해서 다녔던 여행사와 영업직을 경험 해고파 다녔던 해외영업 직군의 회사 모두에서 공통적으로 "PT발표"를 할 때 가장 즐거웠다. 이렇게 발표를 좋아하는 내가, 사람들 앞에 나와서 지식을 전하는 강사 일을 하면 얼마나 즐거울까 싶었다.


오랫동안 행동을 주저하다 보면 나이만 들고 내 깨달음들이 거품 속으로 사라질 것만 같아 결국 이전 직장을 그만두었고, 바로 영어강사의 전선으로 뛰어들었다. 난 무조건 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는 해야 하는 것이기에, 열망을 숨길 순 없었다. 이렇게 나는 영어 강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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