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상평] 돼지의왕

몰락한 영웅의 비극

by 전다희

1. 할리우드와 현실

우리는 영웅을 숭배하는 것일까. 말 그대로다. 우리는 정말 할리우드 슈퍼히어로에 나오는 시민들처럼 지구를 구하고 돌아온 슈퍼히어로를 존경하고 숭배하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 세상에는 물론 할리우드에 등장하는 슈퍼히어로들처럼 거미줄을 쏘고 하늘을 날아다니고 첨단무기로 온 몸을 무장한 영웅들은 없다. 하지만 위험에 빠진 아이를 구한다든지, 남들이 용기가 없어 쉽게 하지 못하는 말을 나서서 한다든지 하는 우리 주변의 소소한 용기 있는 사람들은 존재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영웅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바라는 일을 먼저 나서서 하는 사람이며 우리의 기대를 한 몸에 진 사람이다. 하지만 우리의 영웅은 정말 영웅일까.

2. 개와 돼지

연상호 감독의 <돼지의 왕>이라는 영화는 우리 현실 속의 영웅의 실상을 보여준다. 그것도 중학교 1학년 아이들의 반이라는 공간 안에서. 중학교 1학년이면 이제 막 초등학교를 졸업한 아가들인데 이들에게 무슨 영웅이 필요하다는 것인가. 하지만 이들은 어느 누구보다도 절실히 그들의 영웅이 필요하다. 경민과 종석은 중학교 1학년 교실의 돼지들이다. 이런 ‘돼지들’이라는 표현에 거부감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이들이 왜 돼지인지 잔혹하리만큼 여실히 보여준다. 잔인하다기보다 잔혹하다. 잔인한 장면이 거의 없다시피 하는 이 영화가 청소년 관람불가인 이유도 이런 잔혹한 현실을 여과 없이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경민과 종석으로 대표되는 이 반의 아이들은 이 교실의 ‘개들’에게 철저히 억압받고 짓눌린다. ‘개’로 대표되는 학생 무리들은 선생님, 선배 등 권력들에게 예쁨을 받으며 돼지들에게 폭력을 가하고 심지어 같은 반 남학생들에게 성추행까지 가한다. 하지만 돼지들은 이 개들에게 저항할 수 없다. 그저 오늘 개들의 표적이 자신이 아닌 것에 하루하루 안도하고 자신의 살을 찌우는 데만 급급할 뿐이다. 생각을 하려하지도 않고 저항을 할 생각은 더더욱 하지 않는다. 이런 돼지들 가운데 ‘철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개들’에게 절대 억눌리지 않는다. 뛰어난 싸움 실력으로 개들에게 저항하고 곤경에 처한 경민과 종석을 도와준다.

3. 왕과 돼지

그렇게 철이는 돼지들의 왕이 된다. 사실 철이는 왕이 되고 싶어 한 적이 없다. 아이들을 괴롭히는 반의 악당 무리들이 맘에 안 들었을 뿐이다. 하지만 경민과 종석은 철이를 그들의 왕으로 추대한다. 철이와 함께라면 이 부조리한 교실의 질서를 역전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신은 왕이 될 자신이 없으니, 앞에 나서서 악당들과 싸울 용기가 없으니, 자기 대신 맞서 싸워줄 누군가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게 철이였다. 철이는 그들의 영웅, 우상이 된다.

4. 왕의 최후

그래서 돼지들은 성공했을까. 개들을 무찌르고 교실의 부조리한 체제를 뒤집었을까? 결과부터 말하면 그러지 못했다. 악을 무찌르려면 더한 악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철이는 결국 학교에서 퇴학당한다. 그리고 마지막 결정을 한다. 교실의 ‘개들’이 나중에 커서 지금 이 순간을 절대 웃으면서 기억할 수 없게 모두가 보는 조회시간에 옥상에서 뛰어내려 자살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이 작전을 경민과 종석에게 전한다. 경민과 종석은 철이의 작전을 반긴다. 이렇게 하면 개들의 세상을 전복시킬 수는 없어도 그들에게 한 방 먹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철이도 결국은 어린 중학교 1학년 학생일 뿐이었다. 옥상에서 죽기 무섭다며 울고 있는 철이를 발견한 종석은 엄청난 실망감에 사로잡힌다. 자신은 철이를 영웅이라고, 자신들의 왕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닌 것 같았다. 결국 철이는 쇼로만 자살소동을 끝내려고 한다. 하지만 종석은 뒤에서 그런 철이를 밀어버린다. 그는 바랐던 것이다. 철이가 영원히 그들의 왕으로 남아주기를. 그게 아니라면 돼지들은 더 이상 철이가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철이는 자신을 영웅으로 추대한 돼지들에게 죽음을 당한다. 돼지들에게 진심과 진실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철이가 어떤 사람인지, 그가 어떤 불우한 환경을 안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에 대한 어떤 이해나 확인도 없이 그를 자신들 마음대로 영웅으로 만들고 괴물로 만들었다. 자신들의 이익이 통한다면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5. 왕은 누구인가

그래서 진짜 왕은 누구인가. 반 아이들에 등 떠밀려 영웅이 된 철이일까, 아니면 그를 자신들의 왕으로 추대한 민중일까. 민중은 그들에게 이익만 된다면 영웅이든 괴물이든 상관없다. 그를 무엇이든지 만들어줄 수 있다. 민중은 왕이며 동시에 영웅의 적이다. 영웅의 진짜 적은 악의 무리가 아니다. 민중들이 그에게 힘을 준만큼 영웅이 그들에게 실망을 준다면 민중은 언제든지 그를 몰락시킬 수 있다. 이게 자신은 악에 저항할 힘이 없으면서 자신들을 위해 싸워줄 어떤 이를 바라는 돼지들의 특성이다.

6. 우리의 영웅은 정말 영웅일까.

이런 의문이 든다. 할리우드 슈퍼히어로는 정말 행복할까. 언젠가부터 자신의 “영웅 일”에 신물이 나지 않았을까. 자신이 영웅임을 스스로 포기하려 할 때, 악의 무리를 그저 두고 보기만 하고 싶을 때, 악의 무리와 맞서 싸우기 이제는 무서울 때, 그를 영웅으로 추대했던 민중들은 과연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까. 실망감에 휩싸여 그를 바라보는 악당보다 더 무서운 표정으로 영웅을 노려보지는 않을까. 우리는 평소에 막연하고 의심 없이 영웅을 동경하고 있다. 할리우드 슈퍼히어로든 현실의 소소한 영웅이든. 그들은 좋은 사람이야. 능력 있는 사람이야. 우리를 지켜줄거야. 모든 삶은 크고 작은 모순들로 이루어져 있다. 영웅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민중은 영웅의 모순을 인정할 수 없다. 그는 완벽해야 하고 우리와 다른 우상이어야 한다. 그가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 약한 모습을 보이는 영웅은 가차 없이 버리는 것이 우리 민중들이다. 누군가는 <돼지의 왕>을 영웅의 몰락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영웅은 애초에 없었다고. 민중들 앞에서 악으로부터 민중을 지키는 사람은 영웅이 아니었다고. 민중들의 방패막이, 혹은 제물일 뿐이라고. 나약한 민중들은 부조리한 현실에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는다. 이런 민중 가운데 이 체제를 가장 참을 수 없던 이가 먼저 앞으로 나서게 된다. 그러면 민중들은 그를 영웅인 양, 우리와는 다른 인물로 치켜세운다. 그렇게 영웅이면서 동시에 제물이 된 인물이 탄생한다. 그래서 영웅은 누구나 가능하다는 말이 있는 것 같다. 남들보다 앞에 나설 수 있는 조금 더한 용기만 있다면 말이다. 그렇게 조금 앞으로 나선 인물은 민중들에 의해 영웅으로 불려진다.

7. 또 다른 돼지의 왕, 배트맨

이러한 영웅의 비극은 영화 <다크나이트>와 <다크나이트 라이즈>와 같은 배트맨 시리즈에서도 잘 드러난다. <배트맨 비긴즈>에 나오는 민중들은 악을 무찌르는 배트맨에 열광한다. 배트맨이 악당들로부터 자신을 지켜줄 것 같았다. 하지만 <다크나이트>에서 민중들은 배트맨에게 등을 돌린다. 배트맨 때문에 악당들이 더 활개를 치는 것 같았다. 이제 자신들의 영웅이었던 배트맨은 더 이상 필요가 없다. 그래서 민중들은 그를 괴물로 만든다. 그리고 배트맨의 존재에도 위협을 가한다. <다크나이트>에서 배트맨이 자신의 행적에 고민을 하게 만든 존재는 조커가 아니었다. 바로 민중이었다. 그래서 배트맨은 하비 덴트를 우상으로 세워두고 자신은 뒤에서, 어둠 속에서 정의를 위해 싸우기로 결정한다. 민중들에게 희망을 주는 우상은 밝은 곳에서 일하는 하비 덴트여야 한다는 것이다. 민중이 원하는 것은 완벽한 우상이기 때문이다. 할리우드 영화도 이런데, 현실은 더 가혹하다. 세상은 할리우드 슈퍼히어로 영화처럼 간단히 구원받지 못한다. 현실은 슈퍼히어로가 나타나 간단히 악의 무리만 처치하면 세상에 평화가 오는 그런 단순한 곳이 아니다.

8. 누구의 잘못인가

어떤 이를 영웅으로 세우기도 하고, 또 그를 몰락시키는 것이 민중들이라면, 이 부조리한 영웅의 비극은 단순히 민중 때문이라는 것인가? 그건 또 아니다. 그래서 이 영웅의 이야기가 더 비극적인 것이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이 영웅의 비극을 단순히 민중들 때문이야 라고 치부해 버리기엔 민중 개개인은 너무도 나약하다. 그들은 단지 이 체제에 빠져나가고 싶지만 용기가 없을 뿐이다. 그래서 기다리는 것뿐이다.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으니깐 말이다. <돼지의 왕>은 이런 의미에서 영웅의 비극이자 민중의 비극이다. 이 부조리한 체제가 어디서부터 누군가에 의해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영웅이나 민중이나 이 체제의 희생양일 뿐이다. 철이가 죽었지만, 돼지의 왕이 죽었지만, 종석이가 살인자가 됐지만, 개들의 세계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번외. 악을 무찌르기 위해

악을 무찌르는 것은 더한 악일까? <돼지의 왕>에서는 철이의 이런 대사가 나온다. “그럼 우리가 힘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착하게 살면 될까? 아니야.. 힘을 가지려면 우린 악해져야돼. 계속 병신처럼 살고 싶지 않으면 괴물이 돼야해. 알겠니” 철이의 이런 대사는 극중 찬영의 등장으로 더 신빙성을 얻는다. 찬영은 이 교실의 모든 사람에게 친절한 전학생이다.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고 화술도 좋은 찬영은 돼지들에게 철이와는 다른 또 다른 희망이 되었다. 어쩌면 힘을 쓰지 않고도 개들에게 대적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였다. 하지만 딱 3일 걸렸다. 찬영이가 개들에게 굴복하는 시간. 이 비정상적인 교실에 적응하기까지 말이다.

그렇다면 악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정말 악밖에 없는 것일까. 어쩌면 악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더한 악밖에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그저 자기의 행동에 대한 변명을 하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자기 행동에 스스로 원인을 제공하고 설명 가능한 차원으로 바꾸어놓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영화에서 악을 이기려면 더한 악으로 맞서야 한다고 말하는 철이는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 어쩌면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이러한 고민을 계속 하게 될 것이다. 악을 이길 수 있는 것은, 부당한 권력을 이길 수 있는 것은, 그에 상응하는 선일까 아니면 그보다 더한 악일까 하는 고민. 이 고민에 대한 답을 내기는 너무 어렵다. 그래서 그저 기다리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런 판단도 하지 않은 채 누군가 나대신 판단을 해서 나서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며 영웅으로 삼을 인물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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