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상평] 500일의 썸머

다가감, 다가옴

by 전다희


“이 영화는 완전히 허구이므로, 생존 혹은 사망한 사람과 어떤 유사한 점이 있어도 완전히 우연입니다. 특히 너, 제니 벡맨, Bitch!”

마크 웹 감독의 <500일의 썸머>라는 작품에서 Author’s note로 맨 처음 등장하는 문구이다. 재밌게도 이 영화는 마크 웹 감독의 실화를 모티브로 한 영화라고 한다. 아마 Jenny Beckman이라는 여자가 이 영화의 여주인공 썸머에 영감을 준 인물인 것 같다. 마크 웹이라는 남자 감독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이니 만큼 이 영화는 철저히 톰이라는 남자주인공의 시선에서 진행된다. 덩달아 관객마저 여자 주인공인 썸머의 마음을 알 수 없다. 오로지 썸머에 대해 알 수 있는 증거는 톰의 시선에서 본 썸머의 행동이나 말뿐이다. 마크 웹이 제니 벡맨이라는 여자를 bitch라고 표현한 것처럼 썸머도 이 영화에서 정말 나쁜 년으로 그려진다. 남자한테 다가가 꼬셔놓고 연애는 안한다며 그냥 놀기만 하다가 차버리고 다른 남자와 결혼한 똥차 ‘구(舊)여친’. 실제로 이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은 썸머를 욕하고 비난한다. 하지만 톰의 시선으로 본 썸머의 행동이나 말을 조합하여 다시 썸머의 입장에서 이 영화를 본다면 판단은 완전히 달라진다.


썸머의 입장에서 <500일의 썸머>를 보면 썸머는 정말 사랑스러운 여자다. 둘 사이에 남자친구, 여자친구라는 호칭을 붙이기를 거부했고 사랑한다는 말을 서로 하지는 않았지만 썸머는 톰을 사랑했다. 톰에게 먼저 다가간 것도 썸머였다. 썸머는 톰의 관심사를 공감하려 노력했고 그의 가치관이나 생활환경들을 이해하려 노력했다. 그가 건축에 관심이 많은 것을 알고 그의 건축 이야기를 관심 있게 들어줬고 톰이 어떤 음악을 좋아하는지 관심을 가지고 함께 공유했다. 그래서 톰은 썸머가 자신과 운명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톰은 그의 동생에게 신나서 썸머는 자기의 운명이라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같이 좋아하고 자기가 즐기는 것을 함께 즐긴다고 말한다. 썸머가 톰에게 항상 맞춰줬으니깐. 정말 바보 같은 톰이다.


그렇게 톰에게 모든 것을 맞추던 썸머는 이런 자신의 사랑에 지칠 수밖에 없다. 이 영화에서는 링고스타가 계속해서 등장한다. 그저 평범한 연인들의 대사 안에서 스쳐지나가듯 등장하는 소재이지만 이 링고스타가 갖는 의미는 특별하다. 썸머는 톰에게 자신은 비틀즈 중에 링고스타를 제일 좋아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톰은 어떻게 링고스타를 제일 좋아할 수 있냐며 비웃으며 무시한다. 이 뒤로도 계속 링고스타 얘기를 하는 썸머를 무시하며 이를 공감하고 공유하려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썸머가 계속해서 링고스타 얘기를 하는 것은 톰에게 던지는 일종의 힌트일 수 있다. 우리 관계는 연인이 아닌 마음이 맞는 친한 친구라고 말하는 썸머가 그런 썸머 때문에 답답해하는 톰에게 주는 힌트. 이혼한 부모님 밑에서 자라 사랑이나 운명을 믿지 않고 인간관계에 상처받아 쉽게 정을 주지 않는 썸머가 톰에게 주는 해결책이었을 수 있다. 하지만 톰은 그런 썸머의 힌트들을 다 무시해버린다. 그리고 나중에 썸머와 헤어진 후 다시 잘해보고 싶어서 주는 선물에서 이런 톰의 성향을 전적으로 보여준다. 바로 <행복의 건축>이라는 알랭드 보통의 책. 톰은 썸머가 정말 건축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던 걸까. 썸머는 톰을 위해 그의 취미를 맞춰줬던 것이다. 역시나 이미 톰에게 마음이 떠난 썸머는 이 책 선물을 보고 톰의 기대만큼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톰은 썸머의 이런 마음을 알지 못했다. 만약 톰이 썸머에게 링고스타의 음반을 선물했다면 썸머의 반응은 달랐을까. 썸머와 톰은 다시 잘 됐을 수도 있었을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은 곧이어 등장한다. 헤어지고 얼마동안 보지 못했던 썸머가 다시 톰에게 등장한다.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결혼반지를 낀 채로. 누군가의 여자친구가 되고 싶지 않다고 말한 그녀가 어떤 이의 와이프가 되어 등장하다니. 톰은 당황하여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썸머는 한 남자로 인해 사랑을 믿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 남자는 바로 카페에서 도리언 그레이의 책을 읽던 썸머에게 먼저 무슨 책을 읽냐고 물어본 남자였다. 그게 다였다. 썸머가 왜 그 남자를 사랑하게 됐고 그 남자를 운명으로 생각했는가에 대한 이유. 그리고 이 남자와 만난 것이 운명이었다고 말한다. 만약 자기가 카페에서 책을 읽고 있지 않았더라면, 10분만 늦게 도착했었더라면, 그 때 다른 책을 봤었더라면 그 남자와 자기가 연결되지 않았을 거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썸머는 “It was meant to be.”라고 말한다. 예견되었던 일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결혼에 설레여 하는 썸머를 보고 마음이 복잡해진 톰은 면접을 보러갔다가 맘에 드는 여성을 만나게 된다. 그녀와 몇마디 나눈 후 뒤돌아선 톰은 무언가를 깨닫는다. 운명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을. 어느 것이든지 필연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없다는 것을. 썸머가 그 남자와 사랑에 빠지고 결혼하게 된 것은 썸머의 말처럼 “meant to be”가 아니라 그 남자의 용기 덕분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썸머는 자신에게 먼저 다가오고, 관심을 갖고 이해하려 한 남자에게 끌렸고 사랑을 느꼈던 것이다. 20여년 동안 닫혀있던 그녀의 마음을 열어준 건 그녀의 남편의 많은 배려와 이해였을 것이다. 사실 썸머와 톰이 처음 잘 됐었던 것도 썸머가 먼저 다가왔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운명은 없다고 느낀 톰은 자기가 먼저 그 여자에게 다가가 커피 한 잔 하러 가자고 말을 건내고 승낙을 받아낸다. 그런데 톰은 그 여자에게서 뜻밖의 소리를 듣는다. 그녀의 이름은 어텀(Autumn)이라고. 운명처럼 썸머(Summer)가 가고 어텀(Autumn)이 온 것이다.


그녀의 이름을 들은 톰은 스크린을 통해 관객에게 슬쩍 의미심장한 미소를 날린다. 이 미소는 아마 깨달음의 미소일 것이다. 운명은 존재한다. 하지만 가만히 있으면 다가오는 것이 운명은 아니다. 우리가 먼저 용기를 갖고 다가가서 손 내밀면 바로 그 사람이 운명(the one)인 것이다. 필연적으로, 어쩌면 운명처럼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다. 강렬했지만 시끄러웠던, 열정적이었지만 쉽게 지쳤던 여름같이 뜨거웠던 사랑이 가고 마음의 성숙으로 일궈낸 가을이 왔다. 이 가을과의 사랑은 톰에게 여름과의 사랑보다 더 순조롭고 행복할 것이다. 이 인연은 톰이 깨닫고 톰의 노력으로 만들어낸 인연이기 때문이다.



이 단순하고도 복잡한 깨달음은 단지 남녀 사이의 관계에서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이 영화는 (연애중이 아닌 나에게) 더 의미 있었다. 이 영화는 이런 나레이션으로 시작한다. “이 이야기는 남자가 여자를 만나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사랑이야기는 아닙니다.” 장르가 로맨틱코미디인데 사랑영화가 아니라니. 남자와 여자가 만나는데 사랑 얘기가 아니라니. 하지만 영화의 이 나레이션처럼 이 영화는 오로지 사랑이야기는 아니다. 이 영화는 사랑의 관계를 넘어서 사람들 사이의 모든 관계에 대해 얘기한다. 남자와 여자가 등장해 이들이 만나고 헤어지는 얘기가 나오지만 이 둘의 이야기는 전형적인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였다. 상대방이 자신에게 먼저 다가오기를, 손 내밀어주기를 기다리지 않고 자신이 먼저 다가가는 것. 이것처럼 인간관계에 중요한 것이 있을까. 사람 간의 차이를 인정하고 공감하려하거나 이해하려하는 노력, 상대방을 더 알아가려는 노력. 이 노력이 복잡한 인간관계로 인해 피곤해진 나에게 어쩌면 하나의 해결책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다 나의 ‘다가감’이나 그(녀)의 ‘다가옴’으로 운명적으로 인연이 되었다. 이 운명적인 인연은 서로의 이해와 배려의 노력을 통해 다시 운명적으로 관계를 이어나간다. “운명은 정해진 것이 아니라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