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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담마 Nov 30. 2019

합평 모임에 가면 생기는 일

자기 글을 대하는 태도

실패한 작품은 바로 그 실패 자체로 인해 창작 메커니즘의 일면을 드러내고 문학적 성공을 이끄는 불가사의한 연금술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망친 책, 어떻게 개선할 것인가>



더 이상 손볼 데가 없었다. 작품은 완벽했다. 메일을 발송하며 걱정이 될 정도였다. 내 글을 읽고 사람들이 난감해하며 펜을 잘근잘근 씹어대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이 사람 너무 하는 거 아냐? 글을 이렇게 써서 보내면 어떻게 해. 지적할 걸 하나는 남겨둬야지!”     


사람들이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왜 안 그러겠는가. 다른 이의 글에 뭐라도 조언을 해줘야 하는 게 합평에 참여하는 자의 임무 아닌가. 그런데 칭찬, 아니 감탄만 자아내는 글에 무슨 조언을 할 수 있겠는가.     


나는 그들에게 다소 미안한 감정을 느끼며 받은 편지함을 열어본다. 그들이 보내온 작품을 출력해 읽어보면 아니나 다를까, 지적할 곳이 다.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본문 여백에 코멘트를 달기 시작한다. 이 사람들 너무 하네.  글을 이렇게 써서 보내다니....


겸손을 가장한 미소로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으면 합평이 시작된다. 내 글이 첫 순서다.    

  

찬사를 기다렸던 내게 느닷없는 훅이 들어온다. 표정을 들키지 않으려고 고개 숙여 메모한다. 습관이다. 상대가 논평땐 입 꾹 다물고 듣기만 한다. 그들이 질문을 해오지 않는 이상 입을 여는 법이 없다. 나는 독자의 말을 한마디도 놓치고 싶지 않다. 펜을 달려 기록한다. 칭찬은 칭찬대로 비판은 비판대로.

     

속기사처럼 A의 말을 모조리 받아 적는다. 물론 수긍하기 어렵다. 그가 희한한 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난 속으로 생각한다.


‘어떻게 이 부분에서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있지? 세상에, 이 문단을 저렇게 해석하는구나. 뭐? 이 문장이 걸린다고?’     


평소 A의 관점이 좀 독특하긴 했다. 분명 A만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B도 C도 비슷한 얘기를 한다. 완벽한 작품? 모든 게 망상이었음이 드러난다.

     

“뜻이 모호해요.”

“문장을 좀 정리하셔야겠어요.”

“특히 이 부분이 작위적이요.”


비평이 난무한다.  그들은 색색의 펜으로 내 작품을 난도질해 돌려준다. 본문 여기저기에 빨갛고 파란 볼펜 자국이 수두룩하다. 문단마다 꼼꼼하게 코멘트를 달아놓았다. 합평은 다음 순서로 넘어간 지 오래지만 나는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이윽고 내가 독자의 자격으로 비평을 가할 차례다. 기분은 처참하지만 내 작품은 밀어 놓아야 한다.       

 

 논평이 시작되기 무섭게  A가 끼어든다. 그는 내 한 마디에 서너 마디 토를 달며 자기 글을 변호한다.


이건 이런 의도였고, 저건 저런 의도였다. 앞부분에 복선을 깔아 두었다. 다시 살펴봐라.    

  

은연중에 그는 내가 자 글을 잘못 읽었다는 얘길 하고 있다. 합평할 때 초보들이 보이는 전형적인 태도다. 작품에 결함이 있는데도 그걸 못 보고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작가가 독자를 따라다니며 일일이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다,, 고 설명해 줄 수 있다 여기는 걸까. 설령 내가 잘 못 읽었다 해도 그럴 순 없는 일 아닌가.


문득 나를 돌아본다.

‘아, 방금 내가 저랬구나!’


A처럼 말로 표현하지 않았을 뿐이다. 나는 속으로만 내 작품을 변호했다. 난 잘 썼는데, 당신이 잘 못 읽은 거라고.


A는 의기양양하다. 자신이 기존의 관습을 깨고 있다고 여기는듯하다. 아주 특별한 소재와 주제를 다루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있다.  


이럴 때 대처하는 방법 두 가지다.


상대가 받아들일 수 있는 한도 내에서만 말해다. 못 받아들이는 이야기를 굳이  필요 없다. 이러면 누가 손해겠는가.


또 다른 방법은 할 말을 다 하는 것이다. 상대가 끼어들어 변론을 늘어놓으면 이렇게 말하면 된다.

“받아들이고 말고는 작가의 몫입니다. 나는 그렇게 느꼈습니다.”      


합평하고 돌아오면 맥이 풀려 아무것도 하기 싫다. 모임을 얼마나 열심히 준비했가. 새벽에 일어나자마자 노트북 켜고 수정에 매달렸다. 미친 듯이 글을 썼는데, 이제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멍한 정신으로, 의욕을 상실한 채 이틀을 보낸다. 여러 생각이 스친다. 그럼 그렇지, 하는 자괴감. 이제 뭘 어떻게 써야 하나? 내가 뭘 더 할 수 있나? 갑갑하고 답답한 벽을 마주한 심정으로 책만 읽는다.


하필 이럴 때 읽고 있는 책 제목이  <책 쓰기가 이렇게 쉬울 줄이야>다.


이 제목은 사기야! 속으로 부르짖고 보니 이런 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벽을 넘어뜨리면 다리가 된다.


상태가 심각하지 않았다면 이런 구절에 무릎을 쳤겠지. 그러나 절망이 깊을 땐 이런 말조차 위안이 되지 않는다.

     

합평이 끝나면 그날 받은 피드백을 즉각 작품에 반영하라는 가르침을 듣기도 했다. 그러나 나에겐 불가능한 일이었다. 난도질당한 본문을 마주할 용기와 의욕이 없기 때문이다. 시간이 필요하다. 안 보이는 곳에 글을 묻어두고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시간은 흐르기 마련이고 언젠가는 수정 작업을 하게 될 것이다.


합평 초기엔 아주 오래 걸렸다. 수개월이 흐른 후에야 메모를 꺼내들 수 있었다. 요즘은 나름 맷집이 생겨 몇 주, 혹은 며칠 정도면 수정 작업에 들어갈 수 있다.

  

워드를 띄워놓고 합평 때 했던 메모를 보며 하나하나 수정한다. 지적받았던 부분에 문제가 있었다는 걸 금방 알게 된다. 그래도 이 부분만은 저들이 잘 못 읽은 거야,  끝내 고집을 피우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넘어간 부분을 시간이 더 지나고 보면, 이 역시 그들이 옳았다는 걸 알게 된다.

 

지금껏 받아본 피드백 중 가장 충격적인 건 D의 메모였다.


본문 상단에 이렇게 씌어있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이 지적을 대면할 수 있기까지 3개월이 걸렸다. 나는 그 작품을 대폭 뜯어고쳤다. 원래 분량에서 20% 가까이 문장을 쳐내고 나니 작품이 선명해졌다. 이제야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가 드러났다. 결국 D가 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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