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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담마 Jan 13. 2020

배움의 두 장소: 골방과 교실

작가 지망생의 글쓰기

평생을 작가 지망생으로 살아오며 ‘나만의 골방’에서 글을 썼습니다. ‘나만의 골방’은 내 마음 한 구석에 딸린 조그만 공간입니다. 늘 잿빛 안개에 둘러싸여 형체와 규모를 가늠할 수 없는 방입니다. 나는 틈만 나면 골방에 기어들어가(그렇습니다, 골방에 갈 땐 ‘기어들어’ 갑니다) 뭔가를 끼적거렸습니다. 소설을 쓴 적도 있고 동화와 에세이를 쓰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그 방의 출입문이 어디 있는지 모릅니다. 손을 더듬어 다가가면 안개가 새어 나왔고, 그곳이 곧 입구였어요. 내 골방엔 입구가 많은 모양입니다. 어쩌면 그 방은 문들로 이루어진 곳인지 모릅니다. 아무튼 드나드는 데 어려움은 없었어요.


일을 하다가도 사람을 만나다가도 정신을 차리고 보면 골방에 앉아 있습니다. 물론 직업인으로 열심히 살며 골방을 잊은 적도 많습니다. 책을 읽지 않고 글을 쓰지 않고도 사람은 살 수 있잖아요. 심지어 내가 한글을 기억하는지 의심스러울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골방으로 되돌아 갔어요. ‘직업인’과 ‘골방인’을 반복하는 것이야말로 나의 운명인듯 했어요.


나는 안갯속에 앉아 공책을 펼쳤습니다. 눅눅한 공책에 연필로 글을 썼어요. 나조차 읽을 수 없는 글이었습니다. 짙은 안개 때문이기도 했지만, 내 눈이 어두운 탓입니다. 골방 밖 내 마음 다른 구석에 큰 아궁이가 있어요. 무지라는 장작이 그곳에서 타는 중이었지요. 평생에 걸쳐 타올랐음에도 연료는 무한정 쌓였습니다. 죽는 날까지 불을 때도 장작은 남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걸 다음 생으로 가져가야 할지도 몰라요. 상상만 해도 끔찍하지만요.


연기는 고스란히 골방으로 스며들었어요. 어쩐 일인지 불을 때도 방은 서늘하기만 해요. 연기는 찬 기운을 만나 작은 물방울로 변해 허공을 떠돌았지요. 잿빛 안개의 정체는 다름 아닌 무지의 연기였습니다.


글을 쓰는 일은 이 연기를 걷어내는 작업입니다. 나는 연필 끝에서 빛이 나오고 바람이 흘러나올 거라 믿었습니다. 실제로 그랬어요. 글을 쓸수록 방이 건조해졌으니까요. 빛으로 안개를 말리고 바람으로 연기를 몰아냈습니다. 나의 골방에 광명을 드리우리라. 시야를 밝혀 골방의 전모를 보고 말리라. 이것이 내 꿈입니다.


어느 날 잿빛 안개가 부유하는 먼지처럼 보였어요. 열심히 쓴 보람인가? 시야가 맑아졌어요. 물방울이 증발해버린 자리에 지식과 깨달음, 망상과 몽상, 견해와 분별의 부스러기들이 떠다녔어요. 어쨌든 한 치 앞을 볼 수 없던 안개가 걷힌 겁니다. 난 벌떡 일어나 앞으로 걸어 나갔어요. 방안을 조명할 만큼 시야가 트인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성큼성큼 걸어나갔어요.


골방은 온데간데없고 눈앞에 거대한 벽이 가로놓여 있었습니다. 국경이었습니다. 작가 지망생의 나라와 작가의 나라를 가르는 경계선이었어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어요. 직업인과 골방인, 안개와 연기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보낸 시간이 허송세월이었다니!


단단하며 높고 육중한 벽을 올려다보았습니다. 벽 너머에 작가들의 세상이 펼쳐져 있었어요. 내 힘으로는 그 벽을 부술 수도 넘어뜨릴 수도 없었습니다. 담장 위에서 손을 내밀어줄 친구가 필요했어요. 나를 벽 위로 끌어올려줄 스승이 필요했어요.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벽을 뒤로하고 걸으며 중얼거렸어요.

 “왜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지? 배움을 찾아 밖으로 나가볼 생각을?”


글쓰기는 혼자 해쳐나가야 할 과업이니까. 글쓰기는 수행의 다른 이름이니까. 작가 지망생은 모두 나와 같을 거라 믿었어요. ‘골방’만이 글쓰기를 배우는 유일한 방법이라 여겼어요. 세상으로 나가 글쓰기를 배워보자 결심하고 나니, 그간의 미련함에 웃음이 날 지경이었어요.

  

그렇게 발을 디딘 곳이 동화교실이었어요. 그 이후로 에세이와 인문학을 다루는 이런저런 수업과 모임에 쫓아다녔어요. 몇 분의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모두 존경할만한 분들이었어요. 함께 수업 듣는 이들도 친절하고 배려심 많은 사람들이었어요. 직업적으로 만나온 부류와는 달랐어요. 이것이 문학의 힘이지, 하고 나는 생각했어요.

  

신선한 충격의 연속이었어요. 교실에 앉아있는 사람 숫자만큼이나 다양한 글쓰기가 존재했습니다. 글을 쓰는 이유와 목적이 백인백색입니다. 어떤 사람은 미래의 직업으로 글쓰기를 생각하고 있었어요. 어떤 사람은 즐거움을 위해 글을 쓴다고 했어요. 성과를 낸 기존 장르가 있으나 거기서 대성할 자신이 없으니, 보험용으로 이 장르를 공부하고 있노라 말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그럼 나는?

왜 글을 쓰는 걸까. 돈을 벌려고? 유명해지려고? 글쓰기를 운명으로 여겼고 종교처럼 여겼습니다. 분명한 건 쓰지 않고는 살 수 없으니 쓰는 겁니다. 밥 먹고 차 마시는 와중에 나온 얘기만으로 사람을 안다고 할 순 없어요. 내가 만난 그들에게도 문학의 이끌림이 있을 것입니다. 쓰지 않고는 살 수 없으니 쓰는 거겠죠.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사람과의 교류가 나를 성장시켰습니다. 에너지를 주고받는 시간이었습니다. 저마다 갖고 있는 에너지의 스펙트럼이 달랐어요. 내 것을 나누고 다른 이의 것을 취하며 다양한 색을 경험했어요. 무엇보다 세상을 향해 내 마음이 열렸습니다. 그러나 이런 성과는 불행을 딛고 획득한 것입니다.

  

수업이 끝나면 식사 하고 차 마시는 자리로 이어졌어요. 문학에 대해, 자식과 남편에 대해, 골프에 대해, 강의에 대해, 사회 이슈에 대해, 유행에 대해, 동식물과 날씨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어요. 물론 나는 듣기만 했습니다.

  

다들 만면에 미소를 짓고 있었어요. 한꺼번에 와아, 하고 웃으며 카페를 뒤흔들어놓기도 했지요. 그 와중에 나는 생각했어요.

 ‘저들도 자기만의 골방이 있을까?’

  

어떤 사람에겐 골방 냄새가 났어요. 어떤 사람에겐 그런 방이 없는 것 같았어요. 작가 지망생이라면 마음의 골방 하나쯤은 갖고 있을 줄 알았는데. 이 또한 신선한 충격이었어요.

  

골방과 작가 지망생은 뼈와 살의 관계 같은 것 아닐까요. 빼와 살이 붙어있을 때 생명은 존재합니다. 뼈에서 살을 발라내면 죽음뿐입니다. 골방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작가 지망생일 수 있나요? 내 생각이 구닥다리인가요?

  

사람들은 웃으며 이야기하고 있지만 난 즐겁지 않았어요. 마음이 불편하고 몸이 부자연스러웠어요. 감정은 진실의 바로미터입니다. ‘그래, 나는 행복하지 않다’ 하고 속으로 되뇌었어요. 내 태생이 주변인이자 구경꾼이고 관찰자라는 사실을 되새길 뿐이었어요.


교실에서의 배움은 내가 알고 있던 사실을 재확인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골방에서의 공부가 허송세월이 아니었단 걸 알게 되었어요. 도리어 나만의 독특한 색깔이 바로 그 골방에서 흘러나온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혼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어요. 그럼에도 도중에 일어나 나오거나 수업을 쉴 생각은 못했습니다. 마음 한 편의 명령을 거스를 수 없었거든요.


 ‘골방에 파묻혀 평생을 보냈잖아. 성과가 있었어? 거대한 벽을 본 게 성과야? 그래서 방식을 바꾼 거잖아. 나가서 배워. 계속 사람을 만나라고!’  

  

자연히 모임에 나갔다 오면 후유증이 컸어요. 어색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있다 돌아온 내가 싫었어요. 자괴감과 피해의식 같은 감정 소모에 시달렸습니다.

  

배우려고 세상으로 나가 홀로 앉아있는 나.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몰랐어요, 배움에 두 가지 방식이 있다는 걸요. 나탈리 골드버그의 <글 쓰며 사는 삶 >을 읽다가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무언가를 배울 때 사람은 두 부류로 나뉩니다.  ‘몽상가’와 ‘사냥꾼’이 그것입니다.




다음 편에 <당신은 사냥꾼입니까? 몽상가입니까?>가 이어집니다. 제가 쓰고 있는 책 <작가 지망생의 벽>을 계속 연재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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