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담마 Jan 17. 2020

당신은 사냥꾼입니까? 몽상가입니까?

배움의 두 방식


이 글은 <배움의 두 장소: 골방과 교실>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https://brunch.co.kr/@kmj1121roxf/42

      



무언가를 배울 때 사람은 두 부류로 나뉩니다. ‘사냥꾼’ 타입과 ‘몽상가’ 타입이 그것입니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에도 불구하고 이런 분류법엔 마음이 끌립니다. 나탈리 골드버그의 <글 쓰며 사는 삶>을 읽다가 눈이 번쩍 뜨였어요. 단순하기 그지없는 이분법이 우리에 관해 많은 것을 설명해주고 있었거든요. 당신의 글쓰기 공부 과정을 이해하는데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나탈리는 자전거를 배우는 두 아이의 사례를 통해 몽상가와 사냥꾼의 차이를 설명합니다.


에디(나탈리의 지인인 듯)에겐 두 아들이 있어요. 큰 아들 조이가 자전거를 배울 나이가 되었어요. 아빠는 아이를 데리고 나가 자건거 타는 법을 가르쳤어요.

      

조이의 관심은 외부 세계를 향해 활짝 열려 있었어요. 아이는 사냥꾼처럼 지켜보고, 듣고, 주목했습니다. 자전거의 구조와 길의 형태를 분석하며 정보를 취득해 나갔어요. 아빠의 가르침대로 연습을 계속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이는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둘째 아이 매트를 가르칠 때도 아빠는 똑같은 방식을 적용했습니다. 그러나 매트에겐 이 방법이 통하지 않았어요. 그 아이는 몽상가였습니다. 아빠의 설명을 대충 듣더니 자기 방식대로 타보겠다고 고집을 부렸어요. 아빠는 20분 후에 나와 보았어요. 자전거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어요. 매트는 자전거를 탓하며 길 한가운데서 펄쩍펄쩍 뛰고 있었습니다.


매트는 맥락 없이 무작정 배웠어요. 매트에겐 ‘사물을 보는 눈이 따로’ 있었어요. 그 아이는 뭔가를 배울 때 ‘자신이 납득할만한 방식’으로 답을 알아내야 했습니다. 오랜 연습 끝에 결국 매트도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되었어요. 같은 성취였지만 두 아이에게 끼친 영향이 달랐습니다. 조이에겐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된 일이 자신감을 얻게 된 여러 경험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어요. 그러나 매트에겐 이 일이 ‘대단한 성공이었으며 인생이 바뀐 사건’이었습니다.

    

나탈리 골드버그는 재치 있는 설명을 덧붙였어요. 몽상가는 수영을 배울 때 앞뒤 재지 않고 일단 물속에 뛰어듭니다. 여러 번 시도해본 뒤 그는 얼굴을 빠끔 들고 이렇게 말할 겁니다.


"아, 평영이란 게 엎드린 자세로 하는 거구나? 이제 알겠어. 난 등을 대고 누워서 하는 건 줄 알았지.”


이 대목을 읽다가 폭소를 터트렸어요. 내가 ‘골방’에서 해 온 일이 이거였거든요. 사냥꾼이 몸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알아낸 사실을, 몽상가는 수많은 시간을 물속에서 허우적거린 끝에 깨닫습니다. 사냥꾼은 선배들이 시행착오 끝에 닦아놓은 지식 체계를 빠른 속도로 흡수해 나갑니다. 기존의 지식 체계를 도움닫기로 단시간에 높이 뛰어오릅니다.


그러나 몽상가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 체계를 거부해요. 그는 구름판도 없는 뜀틀 앞에서 다리 힘에 의지해 뛰어오르려 합니다. 사냥꾼이 손에 쥐고 출발했던 정보를 몽상가는 고군분투 끝에 알아냅니다. 그 뻔하고 보잘것없는 지식이 몽상가에겐 자기 존재를 총체적으로 전율케 하는 깨달음이 됩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도 이런 맥락의 이야기를 했어요. <나는 여행기를 이렇게 쓴다>에서 그는 폴 서루의 소설에 나오는 미국 여성의 대화를 인용합니다.


“책에서 뭔가를 읽고 사진에서 뭔가를 보지. 누군가로부터 어떤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하지만 난 내 발로 직접 그곳에 가보지 않고는 납득되지 않고, 마음이 놓이지 않거든. 가령 나는 내 손으로 그리스의 아크로폴리스 기둥을 직접 만져보지 않고는 못 배겨.”

    

여행은 삶에 관한 훌륭한 은유입니다. 하루키의 표현을 좀 더 빌리자면, 몽상가는 ‘자기 눈으로 직접 그곳을 보고, 자기 코와 입으로 그곳의 공기를 들이마시고, 자기 발로 그 땅 위에 서서, 자기 손으로 그곳에 있는 물체를 만지고 싶어’ 하는 사람입니다.

      

몽상가는 뜀틀을 한 단 한 단 높이며, 그렇게 쌓아 올린 것만을 자기 것이라 믿습니다. 남의 방식을 답습하는 건 운동이 아니라 노동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는 생각하는 듯해요. 비효율도 이런 비효율이 없습니다.

     

효율을 따지는 이 시대가 사냥꾼을 우대하는 건 당연합니다. 창의력 운운하며 몽상가를 두둔할 때조차, 한 사람의 창의적인 인재가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을 먹여 살린다는 산업의 논리를 따르니까요. 나탈리 골드버그는 몽상가들이 이 때문에 피해의식을 느끼며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사냥꾼 성향을 발달시킨다고 말합니다. 저 역시 그랬어요. 내가 다른 사람과 배우는 방식이 다르단 걸 인정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닦달했어요.

      

‘골방에서 나가! 교실로 가서 사람들을 만나라고!’  

    

무라키미 하루키는 말합니다.

     

‘푸에르토 바야르트 공항에 내려 배낭을 어깨에 멨을 때는, 솔직히 ‘그래, 바로 이거다. 이 느낌 말이야’ 하고 생각했다. 거기엔 확실히 자유로운 느낌이 있었다. 그것은 나라는 한 사람의 입장과 나 개인의 역할에서 우러난, 연대적으로 배어나는 나 자신으로부터의 자유였다.'

    

하루키는 이런 말도 했습니다.   

   

‘학교 선생님이 아무리 논리 정연한 설명을 해준다 하더라도 이유라는 것은 원래 형태가 없는 것에 대해 억지로 만들어 붙인 일시적인 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언어로 나타낼 수 있는 뭔가가 과연 얼마나 의미가 있겠는가? 정말 의미가 있는 것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그 어떤 것에 감추어져 있지 않을까?’     


‘나 자신으로부터의 자유’를 원하는 사람.

그 무게를 어깨에 짊어지려는 사람.

이유를 따져 묻고 의미를 찾는 사람.

몽상가는 그런 사람입니다.


당신은 사냥꾼입니까? 몽상가입니까?

     

판단이 서지 않을 땐 감정에 귀 기울여 보면 됩니다.       


나탈리 골드버그는 포켓볼을 배울 때의 일화를 들려주었어요. 봅(나탈리의 친구인 듯)의 설명을 듣고 있는데 그녀는 자신이 난독증 환자처럼 느껴졌어요.


"봅, 그냥 내가 직접 해볼게. 하면서 배우는 게 낫겠어."


그녀는 당구대를 혼자 차지하고 포켓볼을 쳤습니다. 그제야 마음이 편안해졌어요.

     

그렇습니다, 편안함. 이것이 판단의 기준입니다.      


사람들 사이에 끼어 있을 때 나는 몸도 마음도 불편합니다. 그러나 ‘골방’으로 돌아와 홀로 공책을 펴고 앉으면 편안합니다.   

   

당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더 이상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면, 주저하지 말고 스스로에게 솔직해지자.
  
                                                                                               --- <피니시> 존 에이커프     


다시 '골방'으로 돌아가야겠어요. “아, 평영이란 게 엎드린 자세로 하는 거구나?” 이런 말을 주절거리게 되겠지만요.

 

작가의 이전글 유한함이 무한함에게 건네는 위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