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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열린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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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담마 Feb 12. 2020

빛과 그늘: 삶과 죽음의 메타포

할머니를 그리며

태양이 대지를 녹여버릴 기세였다.


농장의 나무들은 가지를 늘어뜨린 채 겨우 서 있었다. 복순이가 혀를 빼물고 헉헉거리는 모습이 가여워 물통을 들고 다가갔다. 뜨끈뜨끈해진 물그릇을 비우고 찬물로 갈아주자, 개는 물을 홀짝였다. 그때 할머니가 농장을 가로지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손에 뭔가 들고 계셨다. 돗자리였다.


“뭐 하시게요?”


내 물음에 아랑곳없이 할머니는 감나무 아래 돗자리를 펼쳤다. 그리고 누워버리는 게 아닌가.

  

감나무는 밭 귀퉁이에 홀로 서 있었다. 아직 어린 나무라 그늘을 기대할 수 없었다. 설령 가지가 우거졌다 해도 한낮의 지열 때문에 돗자리를 깔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의아해진 나는 할머니에게 다가가 물었다. “더운 데서 뭐 하세요?”


할머니는 그새 일어나 돗자리를 걷으며 뜻 모를 미소만 지었다.


할머니가 창고로 가는 걸 보고 ‘돗자리를 도로 갖다 놓으려나 보다’ 하고 생각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이상한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이번엔 작은 평상을 끌어 오는 중이었다. 달려가 도와드리려 하자 할머니는 손사래를 쳤다.


내가 지켜보는 가운데 당신은 감나무 밑동에다 평상을 바싹 붙였다. 그리고는 신발을 벗고 올라가 누웠다.

  

말이 평상이지 벤치나 다름없는 의자였다. 할머니 머리와 다리가 평상 밖으로 밀려났다. 나무 그늘이 몸에 조금 드리울 뿐 얼굴은 햇볕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차라리 방에 들어가 선풍기를 켜고 눕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더없이 불편해 보이는, 도무지 피서라고 할 수 없는 괴상한 광경에 말문이 막혔다.


그런데 정작 당신은 만족한 듯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입가에 장난기 어린 미소마저 감돌았다. 할머니는 곧 일어나 신발을 신고 평상을 원래 있던 곳으로 끌고 갔지만, 이 일은 내 맘 속에 이상한 자국을 남겼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나는 약속이 있어 아침 일찍 외출 준비를 했다. 가방을 들고 나오다 창고로 갔는데, 뭘 하려고 그랬는지 지금은 잊었다. 중요한 건 할머니가 창고로 다가왔고, 그 순간이 내 마음에 또 하나의 기이한 흔적을 남겼다는 사실이다.


아침부터 태양이 기세 등등했다. 할머니는 땡볕에 서 있었다. 나는 널찍하고 시원한 창고 안에 있었다. 우리는 활짝 열린 창고 문을 사이에 두고 땡볕과 그늘에 각각 자리하고 있었다. 할머니는 말했다. 내가 만날 사람 중 특정인을 지목하며 그의 저의를 조심하라는 내용이었다. 늘 듣는 잔소리에 다름 아니었지만 그날은 이상하리만치 내 마음이 너그러웠다. 바쁜 와중에도 웃으며 할머니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있도록 시간을 드렸다.


할머니는 계속해서 말했다.


불현듯 빛과 그늘의 선연한 대비가 눈에 들어왔다.


‘할머니가 땡볕에 서 있네? 나는 그늘에 있고?’


우리 사이를 가르고 있는 경계를 알아차린 순간 시공간이 엿가락처럼 늘어났다. 다른 건 다 지워지고 햇볕 아래 선 할머니 얼굴만 커다랗게 부각되어 보였다. 아득해지는 기분으로 나는 생각했다. ‘창고로 들어와 얘길 하면 될 텐데 왜 볕에서 저러실까? 나는 왜 할머니더러 그늘로 옮겨오라고 하지 않았지?’

  

그날 오후 할머니는 뇌일혈로 쓰러졌다. 밭에 엎어져 있는 할머니를 삼촌이 발견하고 119를 불렀지만 골든타임을 놓친 후였다. 수술을 받고 할머니는 삼 개월 후에 돌아가셨다.


한밤중 할머니가 위급하다는 전화를 받고 병원으로 달려가며, 앞으로 이런 일을 여러 번 겪게 되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그 한 번으로 끝이었다. 병실에 들어서자 작은 고모가 부음을 전했다.


죽은 사람을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첫눈에 알 수 있었다. 침대에 누워 있는 건 할머니가 평생 걸치고 있던 껍데기였다. 할머니 껍질은 입을 벌리고 누워 있었다. 입 안 가득 암흑이 고여 있었다. 그 암흑은 태곳적의 깊은 동굴이거나 깊은 우물일 것이었다.


돌아갔다, 돌아갔다, 할머니의 알맹이가 돌아가 버렸다. 태곳적의 동굴이거나 우물인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꺼져 버렸다.

  

“불쌍한 우리 엄마, 평생 고생만 하다가……!”

  

고모가 통곡했다. 할머니는 삼십 대에 남편을 여의고 육 남매를 홀로 키웠다. 나와 동생들도 할머니 손에 자랐다. 막 도착한 여동생은 할머니 발을 붙잡고 울부짖었다.


다 내려놓고 슬픔이 이끄는 대로 자신을 내맡길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을까. 고모와 동생이 부러웠다. 장례를 치르며 눈물을 흘렸지만, 나의 애도를 완성하기엔 얕고 묽은 눈물이었다. 깊고 걸쭉한 눈물이 내 마음 뒤편에 고여 있다는 걸 알았다. 그 눈물은 할머니를 사랑하지 못했다는 회한의 다른 이름이었다.


감나무 아래 누워 볕에 얼굴을 드러내고 있던 당신 모습이 떠올랐다. 할머니는 ‘돌아갈’ 때가 되었음을 알고 평상을 끌고 나온 거였다. 나무 밑에 몸을 뉘어본 건 죽음의 예행연습이었다. 그런데 이 세상의 다른 누구도 아닌, 왜 하필 내가 그 의식을 지켜봐야 했을까.

  

내 마음에 남아있는 기이한 인상을 때때로 들춰보았다. 그것은 내가 풀어야 할 화두였다. 할머니와 나 사이에 놓여있던 빛과 그늘의 선연한 대비. 불현듯 시공간이 늘어나며 햇볕 아래 두드러져 보이던 당신 얼굴. 그 순간들에 깃든 의미를 알아내야 했다.


계절이 세 번 바뀌고 다시 여름이 올 때까지 나는 화두를 들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첫닭 우는 소리에 홀연히 깨달은 수행승처럼 내게도 돈오(頓悟)의 순간이 찾아왔다.


나는 막히는 도로 위에 있었다. 차창을 올리고 에어컨을 켜야 할 만큼 더위가 성큼 다가왔다. 도로 한가운데 멈춰 서서 멍한 기분으로 건너편 인도를 바라보았다. 땡볕 아래 한 무리의 사람들이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횡단보도 이편은 빌딩 그림자에 가려 그늘이 드리웠다. 횡단보도를 사이에 둔 빛과 그늘의 대비. 그걸 인지한 찰나 보행 신호가 들어왔다.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저쪽에서 이쪽으로.

  

‘아, 저렇게 오고 가는 건가?’

  

느닷없이 울음이 터져 나왔다. 내 마음 뒤편에 고여 있던 깊고 걸쭉한 눈물이 솟구쳤다. 빛과 그늘은 삶과 죽음의 메타포였다. 그날 아침에 내가 본 건 우리의 미래였다. 활짝 열린 창고 문을 사이에 두고 할머니와 나는 저편과 이편에 서 있었다. 죽음은 그처럼 가까운 곳에, 그처럼 환한 빛깔로 존재했다. 할머니는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꺼져 버린 게 아니었다. 할머니는 빛의 나라에 발을 딛고 서서 내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이야기가 한없이 길어졌지만 당신은 그늘로 넘어올 수 없었다. 할머니 머리 위에 쏟아지는 햇빛을 보고도 나는 이쪽으로 건너오라 청할 수 없었다.


우리는 찬란한 저쪽과 그늘진 이쪽에서 이야기를 나누어야 했다. 그것이 산 자와 죽은 자, 후손과 조상이 대화를 이어가는 방식이었다.

  

“더운 데서 뭐 하세요?”


내가 묻자 할머니는 싱긋 웃었다. 할머니는 알고 있었다. 신호가 바뀌면 세상 만물이 자리를 바꾼다는 걸. 양지가 음지 되고 음지가 양지되는 진리, 이쪽 사람이 저쪽으로 넘어가고 저쪽 사람이 이리로 건너오는 진리. 작은 평상에 누워 당신은 미소로 진리를 전했다. 우둔한 나는 그 교외별전(敎外別傳)의 뜻을 이제야 알아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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